4. 탈출
탈출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일정은 꽤 빡빡했다. 루카민은 그다음 날 바로 거리로 나가 카니벨라의 탈출을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는 루카민이 몰래 준 지도들을 보며 탈출 경로를 모색했다.
‘루미니르 제국…….’
루미니르 제국은 대륙을 제패하고 있는 최고의 나라이자 유일한 제국이다. 또한 대륙의 정보를 독점하는 레미아치 가문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곳만큼 6년 전 사건을 조사하기에 좋은 곳은 없었다.
들어가기 매우 어려운 곳이지만 그녀는 루카민이 방법을 가지고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그렇게 심기일전하는 사이, 드디어 그녀가 레미우스 왕국으로 가야 하는 날이 되었다. 시녀들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혼인 행렬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기 싫은 척 숨어 동태를 살펴보았다. 그때, 큰 손이 불쑥 나와 그녀의 손을 거칠게 잡았다.
“공주님, 가셔야 합니다.”
“아야, 가기 싫어! 가기 싫다니까!”
그러나 여왕의 시종(이자는 남자였다)은 그녀를 거칠게 끌고 갔다. 성문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여왕과 왕비, 그리고 란시엔과 둘째 동생 라카에리가 있었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아바마마…… 카벨은 가기 싫어요.”
“카니벨라, 미안하구나. 그래도 그곳에 가서는 여기서보다 더 행복해져야 한다.”
그러면서 왕비는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곧장 고개를 돌렸다.
“전하!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곧, 그녀를 호위할 기사들이 우렁차게 말하며 등장하였다. 그중 기사단장은 은빛 갑옷을 입고 명마를 몰고 있었다. 그녀는 왕비의 품에 안기는 척, 날카로운 눈빛으로 기사를 바라보았다.
‘단쿤이란 자가 아니라서 다행이군.’
그자가 따라왔으면 곤란할 뻔했다. 탈출을 시도하기도 전에 비명횡사할 것만 같았다. 다행히 기사단장은 순박한 호구 같은 인상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마, 제가 마마를 모시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기색에 남자는 다소 당황하며 다시 한번 말했다.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가셔야 합니다.”
그녀는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기사의 표정이 변했다. 빨리 가야 한다는 다급함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모른 척했다.
‘아이라면 여기서 더 칭얼거려야 하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떨어지기 싫다고 소리치며 왕비의 옷을 잡고 그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가기 싫어!”
출발이 지체되자 뮤일라가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주변의 기사들에게 명했다.
“지금 당장 공주를 데리고 레미우스 왕국으로 향해라. 공주의 몸에 손대는 것을 허락하지.”
여왕의 중재에 기사들은 재빨리 그녀를 떼어 내고 마차에 태웠다.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마차에 달린 창문을 연 채 눈물범벅이 되어 소리쳤다.
“안 갈 거예요! 카벨은 안 갈 거란 말이에요!”
그러나 마차는 무심히 출발해 버렸고, 그녀는 궁이 멀어지자 곧장 창문을 닫았다. 백성들이 그녀의 혼인을 축하하며 거리에서 축제를 벌이고, 바닥에 꽃을 뿌려댔지만 정작 당사자는 관심이 없었다.
“루카민, 거기 안에 있나?”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며 인기척을 확인한 후 루카민을 불렀다. 그는 이미 안에 있었고, 마차 천장 사이의 구멍 안에 아슬아슬하게 숨어 있었던 것이다.
“탈출 용품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그녀에게 배낭 하나를 주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사전에 준비하라 일렀던 모든 물품들이 들어 있었다. 위조 신분증, 말린 음식 몇 가지, 여분의 옷가지, 돈 등이 있었다.
“그건 나중에 산맥으로 들어가면 쓰도록 하지.”
그녀는 루카민이 가지고 있는 한 약품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이 나한테 도움이 다 될 때도 있네. 마차가 합승용이라서.”
그녀는 뮤일라를 한껏 비꼬았다. 뮤일라가 일부러 준비한 마차는 오히려 루카민이 숨어들기에 도움을 주었다. 그때, 루카민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걸리는 기척이 있습니다.”
“나도 알아. 그래도 괜찮지?”
그녀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누군가가 따라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고,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척이었다.
그리고 마차는 계속 나아가 정확히 5일 후, 카이셔스 산맥에 도착했다.
* * *
마차는 산맥으로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험준한 산맥의 길은 그녀의 혼인을 위해 동행하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일으켰다.
“산맥 올라가다 죽겠다.”
“왜 우리가 이상한 공주 한 명 때문에 고생을 해야 하는 거야?”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은 누가 책임지나.”
그녀는 그들이 불평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창문 너머로 심드렁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는 뭐 좋아서 가는 줄 아니?
“닥치지 못하겠느냐? 노예 따위가 어디 감히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들의 수군거림이 너무 컸는지 기사들이 와서 소리쳤다. 기사들의 호통에 사람들은 조용해졌으나 한 번 퍼진 불안감과 불만은 기사들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를 안은 채 일행은 첫 번째 휴식지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 동안 여기서 쉬고 내일 다시 출발할 것이다.”
기사단장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천막을 만들고, 불을 피웠다. 또한 병사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혹시 모를 산짐승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산맥의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그녀는 간만에 창문을 열어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아, 오늘이 그날이구나.
“지금의 상황은 어떻지?”
“산맥의 중반부입니다. 이제 내려가게 된다면 사나흘 후 레미우스 왕국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오늘이 그날이군.”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루카민과 헤어져야 할 때였다.
“너와 함께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정말 아쉽구나.”
“이미 정한 일입니다. 공주마마께서 6년 전 사건에 대해 파헤치는 대신에 저는 지금의 여왕 일가가 부정적인 방법으로 왕위를 탈취했다는 증거를 찾겠다고 이미 약속을 했지 않았습니까.”
“그건…….”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여도 왕가의 뒤를 캐는 일이다. 그리고 6년 동안 조사해도 오리무중에 빠졌던 사건에 대해 파헤치는 일이다. 위험은 당연히 따라올 것이고, 아무리 조심히 움직여도 둘이서 움직이면 눈에 띈다.
이건 작전을 짤 때 이미 결정했던 일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애써 자신에게 닥쳐온 이별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명심하도록. 절대, 죽으면 안 된다.”
“걱정 마십시오, 전 이미 죽은 자입니다. 절대 죽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약속해. 반드시 우리 둘 다 진실을 알아 다시 만나기로. 너는 뮤일라 일가를 박살 내고, 나는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아서 다시 만나자고.”
그리고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았다.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루카민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어린 주군은 평소, 그에게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혹여나, 만약에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찌하나.
그런 생각이 들자 이때까지 차마 하지 못했던 걱정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애써 걱정을 누르고 주군의 어린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다부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 걱정은 하지 마.
그는 그녀의 표정에서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어린 주군의 모습에 전율이 일었다. 언제 이렇게 크셨을까?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네, 반드시 약속하겠습니다.”
아, 나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하겠다.
그는 반드시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그리고 마차에서 나가기 전에 맹세의 의미로 그녀의 손등에 짧게 키스를 했다. 그리고 곧 사라졌다.
루카민은 그녀에게 있어 마지막으로 남은 자기의 편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잃게 된다면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무너지고, 또 무너져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질 것이다.
‘루카민…….’
그녀는 작전을 실행하러 사라진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방치했던 왕비 대신 아버지 노릇을 했던 사람이고, 동시에 그녀에게 검술을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못하게 된 그녀 대신 세상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꼭 반드시 만나는 거야…….’
그녀의 바람이 산의 저녁 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카니벨라가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이, 루카민은 재빨리 주방장이 요리를 하고 있는 곳으로 갔다.
“오늘은 무슨 음식입니까?”
“오늘은 토마토와 돼지고기를 넣은…… 깜짝이야! 자네는 누군가?”
주방장은 낯선 목소리의 물음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을 했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게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까맸다. 사신과도 같은 그의 모습에 주방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도와주러 왔는데 그리 놀라시니 섭섭하군요.”
“에잉, 미안하구먼. 내가 워낙 잘 놀라는…… 아니, 자네 뭐 하는 짓인가!”
그는 소금을 쥐고 실수인 척 음식 안에 모조리 집어넣어 버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요리사는 화를 냈다.
“물을 가지고 올 것이니 아무 짓도 하지 말고 기다려!”
요리사는 재빨리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는 그제야 웃음기를 지우고 약병을 꺼냈다. 그리고 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수프에 뿌렸다.
“오늘이 바로 탈출일이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약을 휘저었다. 그러자 희미한 보라색 빛이 나더니 곧 사라졌다. 그리고 주방장이 곧 돌아왔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내 옆을 보조하기만 하게!”
“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주방장을 도와 당근을 썰고, 국을 저었다. 그리고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그릇에 음식을 담았다. 그리고 배식 시간이 되었을 때 재빨리 사라졌다.
“맛있군!”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시간이라니까.”
그리고 그러한 해프닝을 모르는 사람들은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루카민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일말의 미안함을 느꼈으나, 그에게는 카니벨라가 훨씬 중요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갔다. 밤이 깊어지고 슬슬 잠에 드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 졸리지 않아?”
“나도.”
사람들이 서서히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루카민은 모두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무에서 내려와 은밀하게 카니벨라의 마차로 다가갔다.
그때 살기가 느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검을 쳐들고 다가오는 적의 공격을 막았다.
챙!
검이 부딪히며 울렸다. 보니 ‘그 수상한 기척의 주인’이었다.
“네가 그 범인이었군.”
루카민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남자 역시 실력이 대단했지만 루카민의 실력이 훨씬 나았다. 남자는 그새 수세에 몰렸다. 남자의 등이 카니벨라의 마차에 부딪혔다.
“젠장!”
남자는 카니벨라를 인질로 삼기 위해 마차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을 열자 맞이한 건 그녀의 발차기였다.
“으아악!”
남자는 내동댕이쳐졌다. 그녀는 남자의 몸이 둔해진 틈을 타 검으로 남자의 손발의 힘줄을 베었다. 남자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살벌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넌 누구지?”
그녀는 남자의 목에 검을 대며 물었다. 그러나 남자는 언제 넣었는지 입 안에 있던 독을 깨물었다. 거품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아레…… 마…… 이를 위하여…….”
그리고 남자는 눈을 감지 못하고 죽었다. 그 모습을 보며 둘은 입술을 깨물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 이 남자를 숨겨 놓았고, 이 남자를 심은 누군가는 6년 전 사건과 뮤일라 일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것이 큰 싸움이 될 것을 직감하였다. 그리고 하늘에 다짐하듯 그에게 말했다.
“우리 둘 다 반드시 싸움에서 승리하여 다시 만나자.”
“네, 알겠습니다.”
그는 맹세의 의미로 그녀의 손에 키스를 하고 숲 깊숙한 곳으로 안내했다.
“미리 매수해 둔 마부입니다.”
그녀는 재빨리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창문을 열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마마, 기억하십시오. 제 소원은 언제나 마마가 행복해지시는 것입니다.”
“…….”
“복수에 사로잡히지는 마십시오, 그건 마마의 행복에 방해가 됩니다.”
“……노력하마.”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인사였다. 마차가 나아가고, 그는 자신의 시야에서 마차가 사라지기 전까지 한참을 서 있었다.
“부디 무사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