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거래
카니벨라와 루카민이 헤어지기 전.
카니벨라는 루카민이 사라지자 곧장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사이 명상을 하였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고, 또한 각오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기사단장이 들어왔다.
그녀는 이 기사단장이 부담스러웠다. 실력도 나름 뛰어나 보이고(물론 루카민보다는 아니었지만) 자꾸 마차에 들어올 때마다 눈을 굴리는 게 루카민의 존재를 느낀 것이 아닐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를 깨운 것은 기사단장의 목소리였다.
“마마, 드시지 않을 것입니까?”
“아, 안 먹을 거야! 그러니까 나가!”
그녀의 그 해맑은 말에 기사단장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고는 다 먹으면 불러 달라 말하고는 나갔다.
“이 짓도 이제 피곤해서 못 해 먹겠군.”
그녀는 산맥에 올라가기까지 쉬지 않고 어린아이 연기를 했다. 그래서 슬슬 싫증이 나고 피곤했다. 때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이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 게다가 약을 탄 수프를 먹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다른 곳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탈출, 그리고 누군가의 감시.
며칠 전에 루카민이 ‘정체 모를 사람’이 그녀를 감시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의 신경은 꽤 날카로웠다.
‘누가 보낸 감시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할 필요성이 있겠어.’
그 때문에 그녀는 더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했고, 아무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도 보지 않은 사이 수프를 바닥에 버리고 재빨리 기사단장을 불렀다.
“나, 다 먹었어!”
그 말에 기사단장은 재빨리 그릇을 가지고 마차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숨겨 놓았던 짐을 꺼냈다. 그리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제 나가면 되겠어.’
곧 루카민의 기척이 들렸다. 문을 열려 하는 순간, 살기가 느껴지더니 검들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재빨리 자신의 전용 레이피어를 찾았다. 그때, 딱 맞게도 상대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그자를 발로 차고 힘줄을 끊었다. 상대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남자에게 검을 대고 물었으나 남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음독자살을 했다. 남자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쓰러졌다.
‘젠장.’
그녀는 상대의 정체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여기서 탈출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녀는 루카민이 매수해 놓은 마차를 타고 달려가면서도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걱정했다.
그녀야 다른 나라(제국)에 가서 안전하게 조사를 진행하겠지만 그는 적들이 가득한 소굴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카민, 무사해야 해…….’
그사이에도 마차는 산맥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루미니르 제국풍의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부터 있게 될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에 긴장이 되어 침을 삼켰다.
그런데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서더니 마부가 마차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혹시 마마께서는 루미니르 제국에 어떤 연유로 가시는 것입니까?”
그녀는 마부의 과도한 관심이 불편해 뾰족하게 대꾸하였다.
“네가 궁금해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마마께서는 제게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제가 도와줄 수 있으니까요.”
그러더니 갑자기 마부의 온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모습이 변했다. 마부의 모습은 수염이 얼굴의 반을 덮던 산적 같던 모습에서 한순간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을 지닌 꼬마의 모습이 되었다.
“이, 이게 무슨…….”
그녀의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에 꼬마가 발랄하게 말했다.
“이게 바로 마법이니라. 놀랐느냐?”
“사람이 눈앞에서 순식간에 모습이 변하니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만…….”
“인간의 앞에서 마법을 쓸 일이 없으니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이거 되게 미안한데.”
꼬마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 그게 뭐지? 그러나 꼬마는 그녀의 눈에 서려 있는 의문을 해결해 주지는 않은 채 말했다.
“혹시 루미니르 제국 무도회에 갈 생각은 없느냐?”
“내 목적은 루미니르 제국의 귀족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합법적으로는 될 방법도 없고. 결국 불법적인 방법을 이용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녀의 심드렁한 말에 꼬마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마치 손주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와 같은 어조로 말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마법이란다. 혹시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준다면 무도회에 갈 생각이 있느냐?”
“아니, 없어. 내 목적은 루미니르 제국에 정착하는 것이지 무도회에 가서 쓸데없는 친분을 쌓는 것이 아니야.”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구나. 사실은 네가 저 검문소에 들어가기 위한 가짜 신분증을 만들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단다.”
그녀는 놀라서 꼬마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꼬마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말해 줄 것이 있다면 그건 아무런 효과가 없단다.”
“뭐라고?”
가짜 신분증 이야기는 그녀와 루카민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꼬마는 마치 모든 것을 다 본 것처럼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단순히 이상한 말투를 쓰는 괴짜 꼬맹이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무서워졌다.
“겁먹을 것이 없단다. 그저 넌 나와 약속을 하면 되느니라.”
“무슨 약속?”
“내가 널 저 검문소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겠다. 대신 무도회에 참여해다오.”
그녀는 꼬마가 왜 저렇게 무도회에 집착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이용하면 되고, 검문소를 통과시켜 준다고 하는데 이 정도 등가 교환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정한다면 해 주지. 대신, 너 역시 내 요구 사항을 들어줘야겠어.”
꼬마는 누가 봐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상황에서 이런 역제안을 하는 그녀가 너무 신기했다.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을 베풀었고, 도움을 준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그래, 무슨 제안을 하고 싶은 것이냐?”
“네 말대로 무도회에 참여하지. 그렇지만 아까도 말했듯 난 쓸데없는 친분을 쌓는 것에는 하등 관심이 없어. 그러니 내가 제국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
“정착?”
“그래. 난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 무도회가 끝나면 나를 그곳으로 인도해.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에게야말로 그럴 의무는 없단다.”
“아니, 원래 거래는 등가 교환이 원칙이야. 나에겐 원치 않는 것을 들어줘야 할 의무 따윈 없어. 그리고…… 난 네가 돕지 않아도 상관없어. 검문소 통과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머리를 짜내면 돼.”
“…….”
꼬마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자신을 발견했다. 마법으로 철통같이 지켜지고 있는 검문소를 단신으로 통과하겠다는 패기도 그러했고, 말투에서 느껴지는 확신도 입을 다물게 했다.
꼬마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갖고 있던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래, 그러마. 그럼 이제 변신을 해 볼까?”
그러자 그녀가 입고 있던 평상복이 빛이 나더니 순식간에 파란색 드레스로 변했다. 상체는 딱 붙어 라인을 여실히 드러낸다면 밑단은 풍성하게 퍼져 한 떨기 꽃을 연상시켰다. 드레스는 입고 있는 그녀까지 빛나게 만들었다.
꼬마는 자신의 결과물에 만족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적당하게 화려한 가면을 쥐여 주었다.
“이번 무도회의 콘셉트는 가면무도회란다. 그러니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하는 너와 같은 사람이 참여하기에는 안성맞춤이겠지.”
그녀는 가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얼굴에 썼다. 그러자 꼬마는 그녀를 마차에 다시 태운 후 마부로 변신해서 루미니르 제국의 검문소로 향했다.
“무슨 이유로 오셨습니까?”
“이번에 황태자 전하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어마리 가문입니다.”
경비병은 마부가 내민 초대장과 가문의 인장을 보더니 손에 잡힐 만한 하얀색 돌을 잡고는 그 위에 댔다. 그러자 삑 소리가 나며 초록색 빛이 났다. 경비병은 마부에게 초대장과 인장을 돌려주며 말했다.
“통과입니다. 부디 루미니르 제국에서 좋은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꼬마가 말하는 ‘어마리’라는 가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일단 통과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그 모든 것이 새로웠다. 웅장하지만 활기찬 곳.
외국어를 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그때서야 지금 자신이 라소니 왕국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곳에서 탈출했어! 드디어!
그녀는 즐거웠다. 그러나 동시에 루카민과의 헤어짐에 우울함이 몰려왔다. 그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라소니 왕국으로 잘 돌아갔을까?
그런 그녀의 상념을 깬 것은 다시금 아까 보았던 꼬마의 모습으로 돌아간 마부였다. 꼬마는 어떻게 했는지 마차 안으로 들어와서 말했다.
“이것을 보거라.”
종이를 펼치니 ‘어마리’라는 가문의 모든 것이 적혀 있었다. 신분, 영지, 경제 및 사병의 수준, 특산물, 영주 일가의 가족의 수 및 취향, 하물며 그 자녀들의 아카데미 성적까지도 나와 있었다.
“이게 뭐지?”
“어마리 가문은 실제로는 없는 가문이란다. 예전에는 있었으나 멸문당한 가문이지.”
“그런데 그런 가문의 영애가 바로 나다? 어떻게 통과한 거지?”
“그래서 말했지 않았니? 이게 바로 마법의 힘이라고.”
그녀는 아직 마법이라는 게 뭔지 감이 잡히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기적을 만드는 힘이라는 것은 얼추 이해했다. 그녀는 영주 일가의 초상화 중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한 소녀의 얼굴을 짚으며 말했다.
“난 이 여자 행세를 하면 되는 것인가?”
“그래. 이제부터 네 이름은 마리야 어마리란다.”
“마리야 어마리…….”
그녀는 다시 한번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리야 어마리라는 여자의 성격, 옷 스타일, 취미, 좋아하는 음식, 책, 남자 취향 등을 보았다. 그중 ‘남자 취향’은 왜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꼼꼼히 정독했다.
“정말 무색무취한 여자군. 그래서 이 여자를 고른 것인가?”
“그렇단다. 이 정도면 연기하기에 쉽지 않겠느냐.”
“어린애 연기만 3년을 했는데 쉽겠지.”
그녀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꼬마는 그런 그녀의 자신감에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좀 적극성을 보이는구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녀는 다소 냉소적으로 웃었다. 꼬마는 그런 그녀의 표정에 말을 더 붙이지 않고 말했다.
“‘마리야 어마리’라는 여자는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러나 지금 내 마법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단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느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마법’이라는 기적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였다. 만약 저걸 나도 쓸 수 있다면 어머니를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 속을 알 수 없는 꼬마가 강조했던 건 루미니르 제국 무도회에 참여하는 것이고, 자신은 이미 그에 상응하는 조건을 덧붙였다. 과한 욕심은 해가 될 뿐이다.
“그렇지만 이 마법은 영원한 것이 아니란다. 그렇기 때문에 일주일, 그 일주일 후에는 마법이 풀리게 된다. ‘마리야 어마리’는 사라지고 ‘카니벨라 루 라소니’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지.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너도 곤란해지겠지?”
“그렇다면 그 일주일이 지난 후에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는 거군. 그렇게 되면 네가 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준다는 거고.”
“그래. 제대로 이해하였구나.”
그럼 안심이었다. 그녀는 계속 설명해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꼬마가 입을 열었다.
“일단 일주일 동안은 존재감이 희미할 거란다. 너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거나 깊은 관계를 가진다면 그 후에도 널 기억하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너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렇기에 아무하고도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단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 ‘접촉’이라는 게 뭐지? 그렇다면 나랑 부딪히기만 해도 내 존재를 알게 되는 거 아닌가?”
“그건 아니다. 그 ‘접촉’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 그 사람과 네가 서로 의지를 가지고 몸을 접촉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억지로 가는 무도회인 데다가 정체를 들키면 왕국에 다시 잡혀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의 의지로 타인과 접촉하거나 대화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결론은 일주일 동안은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말라는 말이었다. 관계가 생기는 순간부터 그녀는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어 버리고 그렇게 되면 앞으로 할 일을 달성하는 것에 있어 불편해질 테니까.
꼬마는 마법으로 그녀의 신분을 잠깐 바꿔 준 거지, 모습을 바꿔 준 것이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는, 이제 갓 성인이 된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조심해야 했다.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고 루카민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절대 아무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었다. ‘카니벨라’는 대외적으로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데다가 이제는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주의사항은 그게 다인가?”
“그래, 이게 다란다. 나는 네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에 침묵했다. 그러자 꼬마는 허허 웃으며 밖으로 나가 그녀를 궁 앞으로 데려다주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끼이익!
마차 안에서 아름다움을 가득 품은 그녀가 나왔다. 그녀는 어느새 다시 마부로 변한 꼬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땅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초대장을 받아 들고는 귀족들이 잔뜩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인생의 새로운 막이 열릴, 그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