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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드러나지 않은 적 (10/93)

9. 드러나지 않은 적

“카시르 왕국에 기상을, 다른 왕국에게는 피의 지배를!”

“앉아라.”

라소니 왕국의 한 밀실.

기다란 책상에 여러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중 상석에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여자는 다리를 꼰 채 비스듬히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불려온 이들 모두가 긴장한 채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의를 시작하지.”

여자의 말에 각자 일어나 보고를 시작했다. 그들 모두 전신을 덮는 검은색의 옷에 입까지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부하들의 말을 나른하게 듣던 여자는 낮은 목소리로 그들을 제지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딱 하나다.”

“…….”

“카니벨라 공주에 대한 것은?”

모노클을 낀 남성이 일어나 공손하게 그녀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설명을 시작했다.

“대장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쪽 가능성을 두고 조사를 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그리고 추락 사고 당시 카니벨라를 진료했던 의사의 소견서를 내밀었다. 여자는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카니벨라 공주는 확실하게 어린아이의 연령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자는 거칠게 서류를 테이블에 던졌다. 초록색 눈이 섬뜩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 생각이 틀리는 날도 있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군.”

“죄송합니다.”

“아니다. 의사의 소견서라는데 우리가 무얼 어떻게 의심할 수 있단 말이냐.”

그렇게 말했지만 여자는 의심스러웠다. 그날 봤던 카니벨라의 그 민첩한 움직임은 이때까지의 행동이 연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다시 일으킬 정도로 깔끔하고 완벽했다.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소견서가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의사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때 한 여자가 회의장에 뛰어 들어왔다.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쓸데없는 이야기라면 죽여 버리겠다는 초록색 눈동자에 겁을 먹은 여자는 바짝 엎드려 벌벌 떨며 말했다.

“방금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카니벨라 공주가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감시를 보냈던 에킬이 죽어 있었습니다.”

“뭐?”

회의장이 웅성거렸다. 에킬은 실력만큼은 S급인 A+급 조직원이었다. 절대 비명횡사 당할 정도로 하찮은 실력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죽었다고?

여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A+급을 잃게 될 줄은 몰랐다. A+급은 매우 귀하고, 흔하지 않은 존재다. S급 다음으로 조직에서 큰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S급이 없을 시 그 역할을 대신할 수도 있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이상한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에킬이 칼에 찔린 모습을 보니 두 사람에게 당한 것 같다는 소견이 있었습니다.”

여자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카니벨라 공주의 왕국 행에 따라간 사람 중에 검을 쓸 만한 사람은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그 기사들 중에는 에킬을 죽일 수 있을 만한 실력자가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회의장이 웅성거렸다. 수많은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카니벨라가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알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여자는 회의장이 과열되기 전, 손뼉을 치며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반드시 공주를 찾아낼 것을 명했다.

“네!”

그리고 그때, 또 다른 자가 들어왔다.

“대장, 이제 가셔야 하는 시간입니다.”

“쳇……. 알았다. 어머니께 곧 간다고 전해라.”

“네.”

여자는 미간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랜만에 나이에 맞게 소녀다운 표정을 지었다. 멍청한 어미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오늘 회의는 해산이다.”

“카시르 왕국에 기상을, 다른 왕국에게는 피의 지배를!”

이제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   *   *

라이넨은 자신의 말에 표정이 굳었던 카니벨라가 떠오르자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파티의 진행을 잠시 황제에게 맡겼다. 그리고 연회장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연회장 밖으로 나와 궁을 마구잡이로 누볐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여기서 멈춰 버리면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나 형처럼 떠나가 버릴까 봐 무서웠다.

‘제발, 가지 마!’

그런데 웬 호박 마차가 연회장에서 이탈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웬 실루엣이 그의 눈에 보였다. 그런데 뭔가 낯이 익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마리야 영애였다!

그녀는 창문으로 떠 있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음악으로 소란스러운 회장은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그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절망의 파도가 그를 덮쳐왔다. 그는 이때까지 뚫려 있던 구멍보다 더 큰 구멍이 뚫리는 것을 느꼈다.

안 돼, 너만은 잃을 수 없어. 제발, 제발, 나를 떠나지 말아 줘!

그는 재빨리 아무 말이나 붙잡아 탔다. 그리고 마차를 향해 달렸다. 그녀에게 닿고자 하는 간절함을 담았기 때문인지 말은 빠르게 달려 주었다. 그는 순식간에 마차를 따라잡았다.

“어디,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그의 외침에 그녀가 깜짝 놀라 옆을 보았다. 그리고 애달프게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하였다.

안 돼. 나는 당신과 함께할 수 없어.

왜 어째서 할 수 없냐고 묻고 싶었다. 분명히 일주일 동안 서로 행복했었는데 자신 혼자만 그랬는지 그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의 마음을 담았다.

‘제발 가지 마. 나를 잡아 줘…….’

그러나 그녀는 그를 잡아 주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리고 듣기 싫다는 듯 창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한 그녀의 행동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도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다.

“성문을 닫아라!”

일주일 동안 당신이 뿜어내는 달콤한 향에 취해서, 당신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이 좋아서, 함께 있음으로 느껴지는 충족감이 너무 좋아서, 나는 그것에 중독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당신 없이 살 수가 없어.

그는 강제로라도 그녀를 잡아 두고 싶었다. 그래서 성문을 닫으라고 명했다. 성문은 빠른 속도로 닫히고 있었다. 그러나 마차는 다리를 미처 다 건너지도 못하였다.

이제 우리는 함께할 수가 있을까?

그때, 달리는 말들의 등에서 하얀 날개가 생겼다. 그러더니 그녀가 탄 마차가 순식간에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안 돼!”

그는 소리쳤다. 절망감이 그를 갉아먹었고, 허망함이 가슴을 채웠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그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걷던 중 떨어진 유리 구두 하나를 보았다.

그는 그것을 품은 채 연회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나는 여기서 아무도 내 신부로 맞이하지 않는다. 이상이다.”

그리고 그는 그 어떤 이견도 받지 않은 채 퇴장했다. 그의 선언에 연회장은 순식간에 침묵으로 점철되었다. 그 누구도 입도 하나 벙끗하지 않았다.

뚜벅뚜벅.

“……이 건에 대해서는 차후에 이야기하도록 하지.”

황제는 라이넨의 이야기가 절대 황실의 공식적인 뜻이 아님을 못 박았다. 그러고는 황후와 함께 연회장에서 퇴장했다. 그제야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

“도대체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찌하실 생각이신지!”

“지금이 황권을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어야 할 것인데…….”

“도대체 황태자 전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혼인을 안 하신다는 거지?”

황태자파는 반려를 맞이해야 황권이 더 단단해진다고 말했으며 귀족파들은 지금이라도 황태자를 라이부스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며 격하게 소리쳤다. 저들의 싸움에 연회는 순식간에 정치판으로 변질되었다.

“개판이군.”

마치 시장통이나 다름없는 현장을 위에서 구경하던 한 소년이 중얼거렸다. 그는 비웃음이 어린 표정으로 저 재미없는 정치 싸움을 관망하였다.

그리고 저들의 쓸데없는 움직임에 다시 한번 궁이 시끄러워질 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인지…….”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절대 라이넨을 대적할 생각이 없고, 대적해서도 안 된다.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며, 제발 저런 소모적인 싸움을 그만두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사라진 라이넨을 생각하며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형님……. 그러시면 저들이 쓸데없는 희망만 가지게 됩니다.’

*   *   *

그렇게 혼란과 아수라장의 회장에서 한 은빛 머리의 여자가 조용히 빠져나왔다. 아까 잠깐 가면을 벗었다는 이유로 수많은 시선을 받은 여자는 수수한 가면을 쓰고 테라스로 향했다.

“여기는 샴페인이 참 맛있어.”

여자는 아무도 없는 테라스에서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여자의 앞에 웬 남성이 복면을 쓴 채 나타났다. 남자는 여자의 손등에 키스를 한 후 말했다.

“라이넨 황태자의 실력은 생각보다 더 쓸모가 없었습니다. 황가의 검술을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형편없는 정도입니다.”

“그래? 내 명령대로 하였느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넨의 싸움 패턴에 대해 말했다. 여자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루미니르 제국 공략이 쉬울 수도 있겠는데.

그러나 그것을 내뱉는 실수를 하지는 않았다. 샴페인을 마시려던 여자는 걸리적거리는 가면이 짜증 나 그것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드러난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 치장을 하지 않아도 빛이 났다.

“그런 얼간이를 상대한다고 고생이 많았다.”

여자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 남자는 바로 골목길에서 라이넨을 습격한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위험한 남자를 부하로 데리고 있는 아름다운 그녀는 테라스 난간에 걸터앉아 말했다.

“보아하니 여기도 이제 본격적으로 황위 계승이 있을 모양이야. 그래서 우리 쪽의 사람을 심었으면 좋겠어. 이왕이면 황태자비로 심으면 좋겠는데…….”

“황족들의 경계심이 너무 심해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궁에 들어올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한 절차가 필요했다. 그런데 루미니르 제국은 어떤 방법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철저하게 그것을 파악했고, 바로 처단했다. 한마디로 첩자가 침입할 틈을 주지 않았다.

만약 이번에 심을 첩자가 들통이 나기라도 하면 더욱 철통으로 보안해서 훗날에는 더 침입하기 힘들어지겠지.

남자의 걱정에 여자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단기간에 이 제국을 점령할 것도 아닌데 너무 빠르게 진행할 필요는 없다. 그저 지금은 몇몇을 루미니르 제국으로 들여오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제국 출신자도 몇 명 있지 않은가?”

“예, 레이, 레신카 남매가 있습니다.”

“그럼 그 둘에게 맡기도록.”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에게도 말해 놓겠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속을 재빨리 파악하고는 부복하며 사라졌고, 여자는 고요하고 새까만 밤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루미니르 제국은 아레마이의 것이다.”

한 여자의 위험한 야망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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