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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상사병 (11/93)

10. 상사병

황태자 라이넨이 연회에 참여한 그 어떤 누구도 신부로 맞이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다.

자신이 황태자비가 될 수도 있다고 들떴던 영애들은 앓아누웠고, 귀족들은 파벌에 따라 입방아를 찧었다. 황제의 집무실에는 연신 상소가 들이차서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고, 황제는 그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형과 어머니가 죽은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 라이넨, 그 아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이번 일을 기획했다.

황제 역시도 아직 슬픔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지금의 황후를 만나서 간신히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라이넨은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그는 13년 전에 살고 있었다.

<형님과 어마마마가 죽은 것은 제 탓입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형님의 뒤를 이을 수 있단 말입니까!>

고작 아홉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울부짖듯 하던 그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까맣게 죽어 버린 눈으로, 온몸으로 자신이 황태자가 될 수 없다고 부정하며 처절하게 말하던 그때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황제는 그에게 그것이 사고였다고 수도 없이 말했다. 그리고 그의 탓이 아니라고 수도 없이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사실을 지금까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더 이상 자신의 아들이 홀로 슬퍼하며 그것을 속으로 억누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세상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계속 슬퍼하는 것을 바라만 보고 싶을까?

황제는 아들이 사랑하고, 그런 아들을 사랑해 주는 여자를 만나 그때의 모든 것을 털어 버렸으면 했다.

그래서 황제는 자신의 생각을 현재의 황후에게 말했고, 다행히 황후도 그 생각에 동조해 주었다. 그렇게 황제는 그를 도발했고, 자신의 생각대로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혼인할 것을 약속해 달라고 말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휴…….”

그런데, 이 아들놈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분명히 그의 아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이건 아버지의 감 같은 것이 아니라 13년 동안 매일 그늘진 표정만 짓던 놈이 일주일 사이 입이 귀에 걸려 있으니 누구라도 당연히 뭐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마지막 날에 그런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모름지기 황족의 발언은 언제 어디서든 공적인 것이다. 그걸 라이넨 그 아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이미 대륙의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던 사실이고, 그는 그 말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황제는 괘씸했다. 왜 사고는 아들놈이 쳤는데 수습은 다 늙은 아비가 해야 하냐 이 말이다!

황제는 옆에 있던 종으로 자신의 전속 시종을 불렀다.

“예, 폐하.”

“라이넨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전하께서는 지금 집무실에 계십니다.”

“안내하라.”

한편, 라이넨은 시끄러운 바깥세상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는 요새 새로운 고민에 직면해 있었다.

왜 마리야 영애는 자기 앞에서 사라진 것인가? 분명히 그날에 우리는 서로 통했었는데. 왜 자신이 마음을 쏟기만 하면 그 사람은 사라져 버리는 걸까.

“보고 싶어…….”

그는 자신이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계속 그녀가 생각이 나고, 그리웠다. 고작 일주일을 봤던 사람이지만 마치 평생의 반려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자신의 일부가 뜯겨 나간 것처럼 쓰라렸다.

자꾸만 그녀가 생각났다. 사파이어를 박아 놓은 듯 빛나던 눈동자, 탐스러운 머리카락,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는 모습, 드레스를 입었을 때 피어나오던 그 아우라…….

게다가 그는 카니벨라가 사라진 이후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자꾸만 열이 나고, 목이 말랐다. 몸이 솜을 먹은 듯 무거웠다. 그는 자신의 이런 갑작스러운 증상에 당황했다.

게다가 본래도 심했던 불면증은 더욱 악화되어 그는 그 이후 한 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결국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그러자 집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저러다 죽는 거 아니냐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느 것도 신경 쓸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을 꿰차고 있는 사람은 바로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녀가 자꾸 그의 앞에서 아른거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간신히 찾아낸 단 하나의 빛이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뭐 하는 거지?’

일주일의 인연에 불과했다. 그녀 없이 13년 동안 잘 살아왔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잘 살 수 있다.

‘한여름 밤의 꿈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리자.’

그러나 그는 꽃이 지고, 푸른 녹음이 드리어 온 지금도 그녀를 잊지 못했다. 여전히 부유하는 생각의 끝은 그녀를 향했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하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그는 아파 오는 미간에 얼굴을 찡그리며 서류를 내려놓았다. 머리도 아프고 집중도 되지 않았다. 측근들은 그런 그를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전담 시종이 들어왔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라이넨은 한숨을 쉬었다. 몇 달간 황제는 지속적으로 그의 집무실을 들락날락하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오늘도 그는 황제에게 상석을 내주고 잔소리를 듣다가 자신의 방으로 왔다. 그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믿을 만한 측근인 카샨을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궁의를 불러오거라. 은밀하게.”

황태자는 건재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이때까지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최대한 감췄고, 그건 황제도 몰랐다. 그러나 일상에까지 영향이 가자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함부로 아무에게나 아프다는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특히 이복동생에게는.

‘귀족파한테 알려졌다가는 곤란하지.’

라이부스 그 아이는 절대 깨지지 않는 그 빌어먹을 능글맞은 표정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귀족파는 건강하지 않은 황태자는 황위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을 해댈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 말이 틀린 건 아니겠지만…….’

“다녀오겠습니다.”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그에게 카샨은 가만히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젠장. 너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그는 그녀와의 이별에 이제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그리워 매일 밤 궁을 헤매고 다녔다. 사람들 몰래 그녀와 함께했던 궁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다음에는 그의 가슴을 관통한 공허함이 너무나 커 거기서 비롯된 슬픔에 허덕였다. 추억에 슬퍼하고, 지워지지 않는 그녀의 잔상에 슬퍼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애써 잊으려고 했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은 다 꿈이라고,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을 더 많이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능률만 떨어졌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녀에게 분노했다. 우리는 분명히 똑같은 감정을 공유하지 않았나? 우리의 감정이 속도는 달랐을지언정, 나를 싫어하지는 않았잖아.

그런데, 너는, 왜, 사라진 거지?

그렇게 한참 동안 분노하던 그는 그녀가 왜 사라졌는지 반문했다. 그리고 그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어렸을 때 일어난 몇 가지 일과 이름뿐이라는 것을.

“전하, 부르셨사옵니까?”

그녀를 향해 끝없이 흘러가는 생각은 의사의 등장을 끝으로 멈추었다. 그는 간단하게 자신의 증상에 대해 말해 주고는 의사가 진료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현재 전하께서 앓고 있는 병은…… 그게…….”

우물거리는 의사의 모습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빨리 고하라.”

“……상사병이십니다.”

“뭐라고……?”

순간 그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만큼 병명이 너무나 황당했으니까. 뭐라고? 상사병?

한동안 황당함에 씩씩거리던 그는 이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녀에게 빠져 버렸기 때문에.

이때까지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었다. 어마어마한 상실감이 그를 덮친 이후, 그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그 연회 날에 그녀의 눈에서 그는 정말 많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을 그는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찾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 일주일의 행복에 취해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환상을 현실로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빨리 와. 난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

그는 그녀를 되찾기로 맹세했다. 온 대륙을 뒤져서라도.

그는 그녀를 되찾아 오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은밀하게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수족이 될 인원이 필요했다.

‘카샨만 있으면 되겠지.’

카샨 레미아치. 그는 레미아치 백작가의 장남이었다. 라이넨의 가장 믿을 만한 수족이자, 제국의 최연소 정보국장이었다.

레미아치 가문은 루미니르 제국 건국 초기부터 존재한 공신 가문이며 정보 상점을 기반으로 커온 가문이었다. 그래서 대대로 정보를 다루는데 능했고, 대륙의 모든 정보가 다 그들의 손안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레미아치 가문은 제국이 건국되자, 그 즉시 황실에서 만들어 낸 정보기관에 소속되어 대대로 황실을 위해서 봉사하였다.

카샨은 정보 귀신이라고 불리는 그런 가문의 장남이자, 후계자이자, 황실의 정보까지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무엇보다 라이넨과 어렸을 적부터 막역한 사이였기에 비밀리에 뭔가를 맡기는 것에 제격이었다.

카샨은 제국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인재다. 그는 천재였고, 또한 가주가 되는 순간 가문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라이넨은 그런 어마어마한 스펙을 가지고 있는 인재를 사적인 것에 사용하려는 것이다.

그것도 여자를 찾는 것에!

“엥……?”

카샨은 명을 받으며 주군에 대한 한심함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그 여자가 매력적이라고 해도, 이 세상에 여자는 많다. 이 세상의 절반은 다 여자다. 그런데 그런 여자 한 명 때문에 나 같은 이런 고급 인력을 남용해?

계급이 깡패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미쳤냐고 말하며 라이넨과 주먹싸움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는 매우 바쁜 존재다. 정보국은 그가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런 카샨에게 라이넨은 직접 카니벨라에 대한 조사를 명했다. 카샨은 짜증이 났다.

“굳이 이걸 내가 해야 하는 거야?”

그들은 막역한 지기였기에 사석에서는 반말을 썼다. 그는 카샨의 말에 고개를 간단하게만 끄덕였다.

“카샨. 너 말고는 믿을 자가 없으니까.”

카샨은 짜증을 삼키는 한편, 라이넨의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어’라는 말에 충성심이 확 올라오는 자신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놈, 이거 사람을 너무 잘 움직인다니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모시고 있는 주군은 사람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움직인단 말이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명령인 이상 자신은 그 여자를 찾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주군의 명을 온전하게 수행하기 위해 바른 자세로 라이넨의 말에 경청하였다.

그러나 걸리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근데 진짜 이런 가문의 영애가 있어? 처음 들어 보는데?”

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어마리 가문’이 어느 나라의 어떤 작위를 가지고 있는 가문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 그것도 그가 난생처음 들어 본 가문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카샨이 이번 무도회에서 초대 명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어마리’라는 가문이 있다면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반문했으나 그런 그의 말을 들은 라이넨은 얼굴을 찌푸렸다.

“무도회 기간 내내 옆에 있던 사람이었어. 존재하지 않은 사람일 리가 없어.”

카샨은 어깨를 으쓱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이넨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존재하기는 한다는 건데…….

그런데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별 거지 같은 짓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든 납득을 하겠는데 그 여자와 무슨 사이냐는 거지.

“그나저나 네가 말하는 이 ‘어마리’ 영애가 누구기에 이렇게 애타게 찾는 거야?”

“내 신부.”

신부라고? 저 달콤한 단어가 저 냉혹한 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맞나?

‘어마리 가문이라…….’

자신을 진지하게 쳐다보고 있는 라이넨의 눈빛을 보며 그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말했다.

“뭐, 일단 조사는 해 보지. 그렇지만 내 기억에 없는 사람이니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레미아치 가문은 정보에 관해서 만큼은 그 어느 가문보다 월등함을 자랑하는 가문. 일정한 나이가 차면 곧장 대륙의 모든 귀족 가문부터 외우는 그런 곳에서 태어난 카샨이 모르는 가문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만 치부하기에는 어떻게 검문소를 통과했으며, 어떻게 무도회장에 들어와서 라이넨을 만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었다.

‘설마 황제 폐하의 마법이……?’

그럴 리가 없다. 아직 황제는 정정하다. 결계를 유지하기 위한 마력을 생산하는 것에 있어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카샨은 라이넨의 명으로 ‘어마리’ 가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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