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녀의 정체
일단 카샨은 라이넨의 명을 받자마자 어마리 가문의 족보부터 찾고자 했다. 족보를 찾으면 그 가문의 모든 구성원들에 대해 알 수 있을 테니까.
“근데 아무리 봐도 본 적이 없는 가문인데…….”
그는 곱씹으며 가문의 비밀 서고에 들어가 어마리 가문에 대해 찾았다. 수천 개의 귀족 가문을 다 살펴보던 도중 그는 족보를 찾아냈다.
“있기는 있었네.”
책을 펼친 그는 꼼꼼하게 모든 정보를 새겼다. 어느 작위를 가지고 있는지, 어느 나라 가문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말도 안 돼…….”
어마리 가문은 상가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불황과 침몰 사고로 인해 가문이 파산을 당했고, 그 가문명은 다른 대륙의 한 돈 많은 상인이 사들였다. 그러나 곧 가문 자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게 바로 몇백 년 전이었다. 카샨은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났다. 족보를 들고 있는 손이 떨렸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가문이라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애초에 이 무도회는 초대장이 없으면 참가할 수 없었고, 사칭과 위조를 대비하기 위해 초대장에 마법을 걸어 두었다. 그리고 그 초대장을 회장에 들어가기 전에 철저하게 검사를 했다.
‘황제 폐하 말고 이 대륙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없어. 그런데 어떻게……?’
역대 황제들이 만든 마법 무구들을 감쪽같이 속일 수 있는 게 있다고? 만일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이 대륙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이 바로 레미아치 가문과 정보국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이것은 정보국을 맡은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련님, 집사입니다.”
“들어와.”
“여기 도련님께서 요구하신 자료들입니다.”
카샨은 또한 카니벨라가 떨어뜨렸던 구두를 만든 곳, 라이넨과 함께 그녀를 만났던 카샤와 직원들, 그리고 그녀와 조금이라도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의 증언을 수집하라고 명했었다.
“뭐야, 이거……?”
구두 장인은 그런 유리 구두는 만든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증언은 하나같이 일치했다. 그런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자료를 읽으면 읽을수록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소름과 함께 위험을 느꼈다.
몇백 년 전 사라진 가문의 이름을 가지고 나타난 여자. 그런데 아무도 알아차리지도, 존재를 알지도 못하고 있다!
“안 돼. 이건 꼭 알려야 해.”
그는 재빨리 제복으로 환복한 후 라이넨의 집무실로 무작정 쳐들어갔다. 다행히 라이넨은 혼자 있었다.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이 여자, 찾는 거 그만둬야 할 것 같아.”
“다짜고짜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몇백 년 전에 사라진 가문의 이름을 들고 나타났는데, 황제 폐하의 마법도 속일 수 있어. 이건 나라의 안보에 심히 위협이 될 거야!”
“설명해.”
그는 입술을 깨물며 어마리 가문에 대해 설명했다. 몇백 년 전에 사라진 가문이며, 그 이름을 가지고 나타난 여자가 황제의 마법도 깰 수 있다. 그러니 위험하다고.
“그만둬야 해. 이 여자가 누군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나타났는지 그것부터 알아야 한다고!”
“정체는 파악했어.”
“뭐?”
라이넨은 카샨에게 라소니 왕국에서 보낸 공문과 함께 초상화를 내밀었다. 뮤일라 여왕이 친필로 보낸 긴급 공문이었다.
[이름: 카니벨라 루 라소니
키: 163
나이: 18세
인상착의: 등의 절반을 덮는 구불거리는 금발 머리. 벽안. 실종 당시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그 드레스의 가슴 부분에 커다란 노란색 리본이 달려 있었음.
사건경위: 레미우스 왕국에 혼인을 하러 가던 도중 실종됨.
루미니르 제국에 정식으로 협조를 구합니다.
라소니 왕국 여왕 뮤일라 루 라소니]
“이게 무슨?”
카샨은 한참 동안 그 공문을 바라보다 소리쳤다.
“그럼 그 마리야 어마리라는 여자가 카니벨라 공주?”
“그래.”
라이넨은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카니벨라의 초상화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초상화 속 영애는 어림잡아 10대 초반의 아이였지만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아이는 그가 사랑하게 된 마리야 어마리, 즉 카니벨라 공주가 맞다.
“그럼 무슨 꿍꿍이로 여기에 온 거야?”
카샨은 여전히 의심을 놓지 못했다. 아니, 왜 뜬금없이 타국의 공주가 제국으로 와? 그것도 신분을 위장해서?
“혼인하러 갔다가 실종되었다고 했으니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로 흘러들어왔겠지.”
라이넨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검문소를 통과했으며 초대장을 가지고 황궁으로 왔을까 하는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그녀에게 검은 속내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와 키스를 했을 때 짓던 그 표정이 연기라는 건데, 그건 말도 되지 않았다. 그는 신분상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만큼 그들의 표정을 보고 진실과 거짓을 얼추 구분할 수 있었다.
“아마 모종의 도움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도움을 준 사람을 잡아내야 해. 그 여자를 족치면 뭐라도 나올 거야!”
“내 신부를 왜 족쳐.”
“야, 이 상황에서 신부라는 말이 나와? 이 여자는 안보에 큰 위협이 되었다고!”
“그렇다면 그걸 우리가 덮으면 된다. 게다가 그 정도의 위협이라면 우리가 데리고 있는 것이 이 제국에 이득이 아닌가?”
카샨은 반박하고 싶었다. 이놈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여자에 미쳐서 장차 제국에 위협이 될 사람을 신부로 삼고, 자신의 곁에 두고자 하고 있었다. 그는 미쳤냐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 여자가 진짜 어떤 방법을 이용해서 황제의 마법을 피해 냈더라면, 그런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상대라면, 곁에 두고 감시하고 이용하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여자를 찾는 게 우선이네.”
“그렇지.”
라이넨은 피식 웃었다. 공문에는 반드시 카니벨라를 찾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이 공문에 협조할 생각이 없었다. 감히 왕국 따위가 제국에게 협조를 요청하나 하는 그런 오만한 생각이 깔려 있었으니까.
게다가 무엇보다 그녀는 그의 신부였다. 그러니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그의 옆이었다. 다른 곳은 그가 허락지 않았다.
감히 자신이 있는데 다른 곳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니! 그럴 수 없다!
“문제라면 어떻게 찾아내는 것이겠군.”
“뭘 고민해. 이 여자 황제 폐하의 마법에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잖아. 그렇다면 신전이랑 짜고 신녀 한 명 찾아야 한다고 제국에 뿌려.”
마법이 통하지 않는 자. 그걸 이용해 그녀를 신녀로 만들어 데리고 온다. 라이넨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데리고 온 다음에는 어떻게 할 건데? 진짜 네 말대로 혼인이라도 하게?”
“당연하지.”
“참나, 억지로 데리고 왔는데 잘도 좋다고 하겠다. 어떻게 할 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예예, 알겠습니다.”
라이넨은 그 뒤로 신전에 신녀 선포 협조 공문을 썼다. 카니벨라가 어떻게 그와 만났으며, 황제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빠짐없이 썼다. 단, 그 자신이 그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그녀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는 알리지 않았다.
교황은 라이넨의 공문을 보며 다소 황당하기는 했지만 협조하기로 했다. 그 여자가 ‘마법’에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절대 다른 곳으로 가게 할 수는 없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 반드시 데리고 오긴 해야겠어.’
그렇지만 신탁을 통해서 사람을 신녀로 둔갑시켜 달라는 말은 웃겼다. 교황은 공문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참 재미난 일들을 하시는군.”
이것이 신의 뜻인지는 교황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라이넨의 부탁이라면 들어주고 싶었다. 그는 교황에게 있어 언제나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고, 아들과도 같았다.
“그렇다면 그 부탁을 들어 드리죠.”
교황은 그다음 날 곧장 신탁을 받았다고 백성들에게 선포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의 색을 가진 기묘한 여인이 신의 그릇을 타고났다. 그 여인이 이 대륙을 점령하리라!
백성들은 저 말에 수군거렸다. 그사이 황실에서는 그 여자를 찾아오면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주겠다고 제시했다. 그 금액이 워낙 대단하여 백성들의 눈이 뒤집힐 정도였다.
“저 정도의 돈이면 우리 가족이 평생 먹고살 수 있어!”
“저 여자만 찾으면……!”
왜 신전에서 말하고 있는 신녀를 황실에서 찾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그 여자를 찾으면 이제 모든 고생이 끝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백성들은 조를 짜서 금발 머리 여자를 찾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비슷한 머리색과 눈 색을 가지고 있는 여자는 닥치는 대로 신고했다. 그렇게 사람이 잡혀 들어오면 라이넨은 직접 그들을 확인하고 안심시킨 후 사례금을 주었다.
그러나 일이 커지자 금발 머리와 푸른 눈의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었다. 또한 이렇게 제국 전체가 시끄러워지자 그 일은 황제의 귀에도 들어갔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
“이 신탁이 거짓이라는 것도 안다. 아마 교황은 너를 어여삐 여겨 이런 일을 아무 불평 없이 해 주었겠지.”
“무슨 이야기를 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네가 무슨 노림수로 이 일을 벌였는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쯤해서 그만둬라. 금발 머리에 해당되는 다른 백성들이 전부 불안에 떨고 있다.”
“아바마마께서는 제가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사람과 함께 혼인을 해도 개의치 않는다고 하셨지요.”
“그랬다.”
“그렇다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황제가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은 없었다. 일찍이 카샨을 시켜 ‘마리야 어마리’라는 영애에 대해 조사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개입하지 않았다. 카샨이 수상하게 여겼던 것처럼 찾으려고 해도 마법이 통하지 않았다.
마치 누가 숨겨 주고 있는 것처럼.
황제는 이 미지의 힘을 가진 여자가 내심 꺼림칙했으나, 그래도 라이넨의 선택이기도 하고 자신의 판단 또한 비슷했기에 아무 말 않고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다면 네게 기회를 주겠다.”
황제의 말에 처음으로 라이넨이 고개를 들어 눈을 쳐다보았다.
“그 여자를 찾는 것은 허락해 주지. 단! 더 이상 짐의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하지 말거라.”
“네, 알겠습니다.”
라이넨은 직접 움직여서 카니벨라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신부를 찾으러 간다.”
정보국장 사무실에 앉아 서류를 결재하던 카샨은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만년필을 부러뜨렸다.
“뭐, 뭐라고? 황제 폐하께서 허락해 주셨어?”
“그래. 지금부터 출발할 것이니 짐을 싸도록. 그리고 최대한 규모가 작게.”
그렇게 해야 나중에 그녀를 찾았을 때 수습이 편하다. 공식적으로 수색하기 시작하면 수습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카샨은 그런 그의 계산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곧장 밀려오는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황제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이윽고 황후가 들어왔다. 황후는 차를 가지고 왔다.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한참 동안 차를 마시던 황제는 문득 찬바람만 휘날리며 나가 버린 아들이 떠올라 투덜거렸다.
“에잉, 저 못난 놈. 오랜만에 아비를 봤는데 어찌 저리 차가울꼬.”
“폐하의 팔불출 기질을 잘 알고 있으니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소?”
“태자가 저리 봐도 수줍음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 폐하의 은근한 애정 표현이 당황스러울 법도 하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저놈의 그 차가운 표정을 보면 그런 생각, 싹 달아날 것이오.”
황제는 그렇게 황후와 만담을 즐겼고, 그 시각 라이넨과 카샨, 그리고 에리칼 소속의 3명의 최측근을 태운 말은 은밀하게 궁 밖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