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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거래 (16/93)

15. 거래

마차는 부지런히 달렸다. 카니벨라는 점점 보이는 검문소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신분증을 내밀었고, 간단하게 통과되었다.

‘자, 이제 어찌한다?’

일단 수도로 달려왔으나 그녀로서는 합법적으로 궁에 들어갈 방법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 많은 사람들을 피해서 은밀하게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번 연회 때처럼 정식 신분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난감하기만 한 상황이었다.

‘우연히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본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 정말,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인데 이렇게 바로 나타날 수가?

라이넨이었다! 비록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차림새를 바꾼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녀는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

그녀는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윤기를 잃고 푸석해진 것과 황금색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없어진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야위어 버린 모습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당신…….”

그녀에게 ‘처음’을 가르쳐 준 사람은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따지려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도대체 이때까지 무엇을 했기에 이렇게 말라 버렸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그가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를 안아 버렸다. 그녀는 당황해 굳어 버렸다.

“꿈이 아니야, 정말로…….”

“…….”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만지는 듯 조심스럽고 경건하게 자신을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모습에 한참 동안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라이넨은 마음이 심란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녀가 완전히 떠나 버리면 어떡하나.

그는 그녀와의 추억을 곱씹었다. 그녀와 함께 갔던 곳을 열심히 돌고 돌았다. 노점상, 길거리 음식점들, 극장 등을 돌아보며 행복했던 순간을 계속 떠올렸다.

카샨의 주도하에 다시 그녀를 추적하기 위한 인원이 뽑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 경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한없이 불안하기만 했다.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의 옷을 처음 맞춰 주었던 부티크였다.

딸랑!

그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수많은 드레스가 있었고, 분위기는 화사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인가가 비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것이 무슨 느낌인지 알고 있었다. 이곳 역시도 그녀와 함께 왔기에 느끼는 공허함일 뿐이었다.

‘이러지 말자. 이제 곧 다시 찾으러 간다. 그때 반드시 찾아내면 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와 다시 정처 없이 걸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때 정말 재미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시간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에 고개를 거두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눈에 단 한 번도 잊지 못했던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전에 봤을 때보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 봤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여행자의 행색에 분위기도 달랐다. 그러나 그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그게 꿈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이 순간이, 그저 꿈이 아닌가 무서웠다. 그때, 그를 본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

그 모습을 보며 그는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라고. 그는 그대로 다가와 그녀를 껴안으며 속삭였다.

“꿈이 아니야, 정말로…….”

라이넨은 일단 카니벨라를 카샨의 저택으로 이끌었다. 계속 밖에 있기는 그랬고, 궁으로 데려가자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취하는 단잠에 빠져 있던 카샨은 갑자기 느껴지는 침대의 꿀렁거림에 눈을 떴다.

“음……?”

“일어나라.”

“좀 더 잘 거야…….”

피곤함에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카샨의 등짝을 라이넨은 세게 내려쳤다.

“악!”

“정신 차려라.”

“무슨 일이기에 나한테 이러는 거야, 갑자기!”

갑자기 느닷없이 등짝을 맞은 카샨은 화를 냈다. 갑자기 상사가 집까지 찾아온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난데없는 폭력까지 당하자 짜증이 급상승하였다. 그런 카샨의 거친 반응에 라이넨은 살짝 멋쩍게 웃었다.

“2차 추격대 안 꾸려도 된다고.”

“무슨 소리야?”

어제까지만 해도 언제 준비되냐고 들들 볶던 라이넨이었기에 카샨은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거 아니냐는 걱정에 휩싸였다. 그러나 곧 그의 눈에 웬 낯선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

“내 신부.”

“뭐라고?”

“내 신부라고.”

“아, 그래……?”

카샨은 카니벨라를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도대체 저 여자한테 무슨 매력이 있기에 저 벽창호가 그렇게 찾아다닌다고 이 난리를 쳤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서 딱히 무언가를 느끼지 못했다.

카니벨라는 자신을 쳐다보는 카샨에게서 미묘한 적대감을 느끼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때까지 만났던 인간들이 죄다 이랬기에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워 주실래요?”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서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매우 많았고, 이왕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거 도움이나 받자고 생각했다. 라이넨과 같은 권력자라면 그녀가 원하는 진실에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나가 있어.”

“참나, 저기요, 여기 우리 집이거든요?”

카샨은 뻔뻔하게 말하는 라이넨이 어이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죽상이던 놈이 아주 얼굴에 꽃이 폈다. 그는 눈에 띄게 해맑아진 라이넨의 표정을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거칠게 문을 닫아 버렸다.

쾅!

“자, 우리 할 말이 아주 많죠?”

그녀는 그를 다시 만나 반가웠다. 시간이 지나 조금 식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감정은 그와 재회하자마자 다시 불타올랐다. 이대로 그와 계속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그렇지만 따져야 할 것은 따져야 했다. 그녀는 표정을 굳히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요. 제가 납득할 수 있게.”

그는 이때까지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그녀가 떠나고 난 후, 상사병에 걸렸다는 것부터 신전과 결탁하여 신탁을 조작한 일까지. 그리고 이 모든 것에 황제의 허락이 있었다고.

그녀는 자신의 개인사 때문에 휘말려 버린 수많은 백성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또한 어이가 없었다.

아니, 무슨 사람 하나 찾자고 신탁을 조작해? 이거 완전 미친 거 아니야?

“…….”

“그리고 난 이미 당신이 라소니 왕국의 카니벨라 공주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소니 왕국에서 당신을 찾는 것에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고, 그녀의 놀란 표정을 본 그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그녀는 그 상황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난 당신이 무슨 연유로 그 왕국에서 탈출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이유가 가장 크지만 저런 사정으로 인해 당신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절 찾으려고 한 와중에 그 공문을 보게 된 것이겠군요…… 일단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드려요.”

이때까지 미처 의문을 가지지 못했던 것, 그것은 바로 라소니 왕국의 추적이었다. 뮤일라 일가가 바보도 아니고 그녀가 사라졌다면 분명히 온 대륙을 뒤져서라도 찾을 것이다. 아무리 흔적을 조작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니까.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전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놀라웠다. 그리고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이때까지 그녀의 인생에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매우 행복했다. 사람이 항상 가득하였고, 어머니는 사랑을 주었으며 아버지는 온화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으로 인해 어머니가 죽고, 자신도 죽을 뻔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경을 헤매던 사이 왕좌를 찬탈한 뮤일라 일가는 도리어 그녀를 괴롭혔고, 아버지란 인간은 그녀를 방관했다. 친절하던 사용인들은 그녀를 깔보기 시작했고 든든한 지지기반이었던 귀족들은 모두 등을 돌렸다.

그렇게 그녀는 철저하게 혼자 고립되었고, 옆에는 스승이자 아버지 역할을 해 주던 루카민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리고 그 루카민 마저 지금은 옆에 없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기로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홀로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차가운 미남이 그녀를 기어이 찾아냈다. 신벌을 받을 각오를 하면서 일을 벌였다.

“아하하하.”

뜨겁지만 한순간이라고 생각했던 그 감정은 여전했다. 꺼졌다고 생각했던 그녀와 달리 그는 계속해서 타올랐을 뿐이다. 그녀는 그리고 거기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아직 서로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는 것과 그가 가진 사랑이 너무 와닿아서.

그녀는 이런 노골적인 사랑 표현은 처음이었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집착이 아닌가. 보통 사람들이라면 집착을 싫어했겠지만 그녀는 그 집착이 좋았다. 아무도 그녀를 이렇게까지 사랑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감정은 매우 생소했으니까.

그녀는 그로 인해 무엇인가가 차오르는 충만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로서는 자신을 한 존재로 생각해 주고 있는 그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그의 무데뽀적인(@막무가내인) 행동 때문에 위험에 처할 뻔했지만.

“그럼 절 찾았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내가 저번에 했던 말에 대해 들었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녀는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신부가 되어 달라는 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는 당신을 황궁에 데리고 가 보호할 구실은 혼인밖에 없습니다.”

확실히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꼬마가 만들어 준 신분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가짜 신분. 이때까지는 잘 속여 넘겼지만 이렇게 자꾸 정체를 아는 사람이 생긴다면 언젠가는 들통날 게 뻔했다.

“그럼 저랑 거래를 해요.”

“말해 보십시오.”

다행히 그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고,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정말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어요. 당신이 얼마나 저를 원하는지와 제 상황이 생각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녀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그러니 전 혼인을 전제로 세 가지 거래 조건을 제시하고 싶어요.”

“거래?”

“네, 전 반드시 이뤄야 하는 것이 있어요. 당신이 거기에 대해서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말해 보십시오.”

“일단 첫 번째는 신탁을 처리하시고 ‘카니벨라’와 ‘마리야’라는 존재 자체를 없애 주세요. 제 이름은 오늘부터 ‘루시아’예요.”

루시아는 루카민의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아마 이 이름을 듣는다면 그는 카니벨라가 어디에 있는지, 살아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여동생은 이미 6년 전에 죽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로서는 ‘카니벨라 루 라소니’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제일 이상적이었다. 현재 라소니 왕국에서 그녀를 찾기 위해 협조 공문까지 보낸 상황이라면 루카민과 만들어 낸 가짜 흔적이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혼인을 비공개로 처리해 주세요. 첫 번째 조건대로 된다면 전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존재잖아요.”

그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쉽군. 그는 그녀와의 혼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조건은?”

“마지막은 제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아 주세요. 이게 바로 제 목표에요.”

그는 순간 얼굴이 찌푸려졌다.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아 달라고? 6년 전 그 화재 사건은 대륙 전체에서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른 왕국에서 유명한 이유는 여왕이 비참하게 죽은 일이 아니었다.

바로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대규모 사건이었으나 아무도 범인들을 목격하지 못하고, 그 범인들의 정체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그 희대의 사건.

라이넨은 다소 골치가 아파질 것이라는 예상이 들었다. 그러나 에리칼이 있다면 찾아내는 것은 문제없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당신 역시 내 말을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알았어요. 그게 뭐죠?”

“내 옆을 ‘절대로’ 떠나지 않기로 약속하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시릴 정도로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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