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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첫날 밤 (18/93)

17. 첫날 밤

“드디어 끝났네.”

혼인이 끝나자 카니벨라는 시녀들에게 이끌려 액세서리와 드레스를 벗고, 화장을 씻어 냈다. 자신을 덮고 있던 무언가가 씻겨 나가자 그녀는 홀가분했다. 거울을 보니 낯선 사람은 사라지고 ‘카니벨라’가 보였다.

‘그래, 이게 진짜 나지.’

그녀는 싱긋 웃었다. 옆에 있던 시녀가 말했다.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이때까지 손님방에 머물던 그녀는 곧 부부가 첫날밤을 보내는 궁으로 이동하였다. 방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분위기도 은은하였다.

‘이거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분위기가 마치 합방을 연상케 했던 것이었다. 둘은 거래 당시 합방은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합의를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마치 ‘우리가 준비했으니 너희는 하면 돼!’라고 외치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 전에 그녀가 혼인을 한 적도 없었으니 이런 것에 대해 알 리가 없었고, 시녀들이 그런 게 아니라고 우기면 그렇구나 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보실 시간입니다.”

문이 열리며 시녀들이 다음 일정을 알렸다. 그녀는 그들에 의해 빨간색의 우아한 실내용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안내를 받으며 궁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여러 시종들 및 시녀들과 나오는 라이넨을 발견했다.

“이제 우리끼리 가겠네.”

“네, 전하.”

라이넨의 말에 사람들은 물러갔다. 그리고 둘은 손을 잡고 황제가 있는 만찬장으로 갔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그들은 만찬장 안에 있는 시녀들의 안내를 받으며 착석했다. 그리고 상석에 앉아 있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어서 오너라.”

황제의 말에는 위엄이 있었고,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이 느낌을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다. 지금의 뮤일라에게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온몸으로 자신이 군주임을 알리는 기백이 황제에게서 느껴졌다. 그녀는 속으로 현재 황제가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다.

“인사드립니다, 오늘부로 황가의 일부가 된 루시아 폰 루미니르입니다.”

“인사드립니다, 라이넨 폰 루미니르입니다.”

둘은 황제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들의 인사를 무심하게 받은 황제는 곧장 그녀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다. 황족이 된 이상 몸가짐을 더욱 조심하고, 무엇을 하든지 황가에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때 다음 왕으로 지목되던 사람이었고, 또한 한평생을 공주로서 살았기에 이해하는 데 무리는 없었다. 그녀는 알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출신도 불분명한 아이가 어려운 황궁의 예법을 잘 알아들었는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내 식사가 시작되었다.

“…….”

“…….”

식사는 침묵 속에 진행되었다. 그녀는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먹으며 줄곧 접시만 쳐다보았다. 가끔 자신의 옆에 있는 라이넨을 흘끔 볼 뿐이었다. 왜냐하면 황후의 표정이 너무 거슬렸기 때문이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에서는 한없는 냉기가 느껴졌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하더라도 트집만 잡을 뿐이기에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때는 그냥 상대하지 않는 것이 최고였다.

그래서 그녀는 굳이 황후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행동이 또 거슬렸는지 황후가 우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비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는군요.”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제 재주가 부족하여 무엇을 말해야 폐하께서 만족하실지 몰라 아무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간단하지요. 황태자비의 이야기를 하면 된답니다.”

“제 이야기는 너무나 무색무취하여 황후 폐하를 만족시킬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가 딱히 없사옵니다.”

“괜찮답니다. 저 아이가 황태자비의 어떤 곳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저도 알고 싶답니다.”

“송구하오나 저도 아직 그 이유를 모르옵니다. 아무리 물어도 부끄럽다고 말해 주지 않으시는군요.”

“호호호, 그렇군요.”

그녀는 황후의 입을 봉했고, 그런 그녀의 의도를 느꼈는지 황후는 그냥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가뜩이나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할 판국에 이런 유치한 견제까지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앞으로가 귀찮아질 것이라고 감히 예언할 수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모든 것이 끝나 범인을 잡고, 뮤일라 일가를 박살 낸 후에야 완벽하게 ‘카니벨라’를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그렇게 되어야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이 황실에 완벽하게 녹아들 수 있을 것이다. 라이넨이 말하는 ‘절대’ 그를 떠나지 않을 정상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겠지.

그때, 황후가 그녀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그래도 전 황태자비의 여러 이야기를 듣고 싶답니다. 예를 들면 가문에 대해서.”

그녀는 티가 나지 않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대외적으로 몰락한 가문의 여식. 꼬마가 줬던 정보들이 있었으나 지금 그녀는 ‘마리야 어마리’가 아닌 데다가 그런 것을 지어낼 말재주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신경전을 가만히 듣고 있던 라이넨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제 아내를 데리고 오는 것에 대해 기준도 없이 아무나 데리고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황태자. 그저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고 싶었답니다.”

“불상사……? 너무 멀리 가시는군요, 황후 폐하.”

그녀는 둘의 대화를 통해 한 가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라이넨이 자신에 대한 정보를 어디까지 황제와 황후에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황상 그녀가 ‘마리야 어마리’ 행세를 했다는 것은 모르는 것 같았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어마리’ 가문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가문 이야기를 하며 물고 늘어지지 않았을까?

그녀는 라이넨의 눈치를 보는 황후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정말 황가의 사랑받는 남자였다.

황후의 심정은 이해가 갔다. 웬 출신도 모르는 영애가 자신이 곱게 키운 아들의 신부로 왔으니 못마땅한 것이다. 게다가 비공개 혼인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대한 불만까지 더해졌으니 고함이라도 지르지 않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라이넨을 제지했다. 여기서 사이가 더 나빠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만하세요, 전하. 황후 폐하께서는 단지 저와 친해지고 싶어 하실 뿐입니다. 게다가 궁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맙군요.”

황후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황후에게 짧게 묵념하고는 남아 있는 디저트를 먹었다. 최상급의 재료로 만든 아이스크림이었지만 불편함 때문에 목구멍에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지.”

그때, 이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황제는 그렇게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가 황제의 뒤를 따랐다. 식사 시간 내내 의뭉스러운 표정만 짓던 라이부스는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앞으로 와 손을 내밀었다.

“…….”

그녀가 멀뚱히 쳐다보자 그가 해명했다.

“제 형님의 아내가 되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래서 잘 지내고 싶은 것뿐이랍니다.”

경계 어린 그녀의 시선에 그는 해명했다. 옆에서 라이넨이 불꽃 어린 표정으로 라이부스를 바라보았다. 라이부스는 그 시선에 그냥 해맑게 웃기만 하였다.

아이다우면서도 아이답지 않게 웃는 라이부스를 보며 그녀는 되도록 그와 엮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때, 그가 그녀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열두 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힘이 셌다. 손아귀가 장난이 아니었다.

“형님을 괴롭히지 마.”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라이넨을 괴롭히지 말라고.

무슨 뜻이냐고 물으려 했으나 라이넨은 손을 놓고 웃으며 황제와 황후가 나간 방향으로 퇴장했다. 그녀는 다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뒤돌아선 라이부스를 바라보았다.

*   *   *

방에 들어오니 그녀가 생각했던 이상한 분위기는 현실이 되어 있었다. 커튼은 죄다 쳐져 있어 어두웠고, 촛불이 곳곳에 놓여 있어 은은하게 빛이 났다. 그리고 어디서 나는지 모르는 향긋한 향기가 났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언제 이런 준비를 다 한 거지? 나는 하고 싶다고 한 적도 없는데!

게다가 어디서 구했는지 장미 꽃잎들이 온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침대 옆의 서랍 위에는 쟁반이 있었다. 쟁반 위에는 합방 전통주와 와인 잔 두 개가 있었다.

“…….”

게다가 하필이면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옷은 잘 찢어지는 재질의 잠옷이었다.

다른 옷이 없나 뒤져 보았지만 방 안에 있는 옷은 이 잠옷밖에 없었다. 실내복을 입고 자야 하나 싶었지만 이 드레스가 아무리 실내에서 입는 옷이라지만 입고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편한 옷은 아니었다.

“이거 참…….”

아마 이건 라이넨도 몰랐을 것이다. 그 증거로 방에 들어오는 그의 표정도 홍시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는 가운 하나만 걸친 상태였다. 그의 그런 모습은 뇌쇄적이었다. 마치 그 안에 유혹의 신이라도 빙의한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의 얼굴도 덩달아 더 빨개졌다.

“이, 이건 오해…….”

그는 분명히 합방을 할 생각이 없다고 의사를 전했다. 둘은 그런 여유가 없었다. 카니벨라는 자신의 숙원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라이넨은 황제로부터 황권을 물려받느라 바빴다.

그래서 그는 황제에게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역대 황실 합방 역사(?) 중 가장 잘 찢어지는 재질의 야한 옷을 입고 있는 아내였다.

황제가 그의 부탁을 무시했을 리는 없고 역시 라이넨의 직속 시녀들이 과잉 충성을 한 것 같았다. 속으로 한숨을 쉰 그는 은은한 촛불 가운데로 그녀의 몸매가 보이자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풋!”

“나, 난 못 봤……!”

당황하여 온 얼굴이 붉게 물든 채 변명하는 라이넨의 말투는 퍽 귀여웠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카리스마나 그녀를 보면서 웃던 온화한 얼굴과는 다르다고 해야 할까. 그런 그의 귀여운 변명에 그녀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으니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아.”

“고, 고맙…….”

그녀는 붉어져 있는 그의 얼굴을 자신에게 돌리며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닌 걸 알기에 괜찮다, 이제 부부니까 서로 편하게 말하자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는 안 나?”

“당신이 명한 일도 아닌데 괜찮아.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그녀는 맑게 웃었다. 그리고 온 방을 밝히고 있던 촛불들을 껐다. 그러나 어두워지자 둘은 서로의 움직임이 더 잘 느껴져 미칠 노릇이었다.

‘아니, 이게 아닌데?’

그녀는 어두워진다면 보이지 않을 테니 좀 더 행동이나 말에 자유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해 불을 껐다. 그런데 어두워지자 서로의 움직임이 더 잘 느껴졌다. 옷이 침대와 접촉하는 소리나, 상대의 목울대 소리가 다 들린 것이다.

“…….”

“…….”

결국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참 동안 손만 꼼지락대던 그녀가 뻣뻣하게 말했다.

“우, 우리 술 마실까?”

“그, 그래.”

그는 어둠 속을 더듬어 자신의 옆에 있던 전통주를 가지고 와 와인 잔에 따랐다. 맑은소리가 들리며 술이 잔에 착지했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던 그들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거, 건배.”

와인 잔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둘은 침묵 속에 술을 마셨다. 아무리 어둠 속이라고는 하지만 도저히 부끄러워 서로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는 자꾸만 느껴지는 더위에 가운을 벗고는 옷을 펄럭이며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후, 덥다.”

“더워?”

“아니, 괜찮아.”

뻣뻣하게 대답하는 그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처음 마셔본 술은 매우 달게 느껴졌다.

쪼르륵. 술이 컵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매우 맑았다.

“술은 처음 마셔 봐. 쓰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맛있네.”

그녀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황실의 전통주이기에 절대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을 압박하는 긴장감에 입만 대충 축이고 말았다. 반면에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보는 술이 너무나도 맛있어 계속 마셨다.

‘저래도 괜찮을까……?’

그는 도수가 약하지만은 않은 술을 쭉쭉 마시기 시작하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지만, 맛있다고 웃으면서 마시는 걸 말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술이 약한지 그의 몸을 비비며 안아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새로운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다.

“아앙, 안아 줘어.”

술에 취한 그녀는 말부터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꾸 그의 몸을 안아대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몸은 뜨거워졌다. 자꾸 자신에게 기대오는 그녀를 안고 싶다는 욕망이 치솟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취하고 싶었다.

“크흠……!”

그는 자신에게 안겨 오는 그녀의 몸을 보며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온몸이 빨개지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쿵쿵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몸이 터지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능을 외면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함부로 취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동하면 넌 쓰레기다.’

역사적인 첫날밤은 둘 모두가 원할 때(?) 하고 싶었다. 그녀의 첫 경험을 지켜 주고 싶다는 이유 역시 존재했지만 그는 완벽한 환경(?)이 갖추어졌을 때 완벽하게(?) 일을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술에 취해 자신에게 자꾸만 기대오는 그녀가 불편해졌다.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저질러 버릴 것 같아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는 악착같이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게 팔로 그를 붙들었다.

늘 궁에서 혼자였던 그녀는 이렇게 그의 품에 안기며 잠결로 위로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녀의 사정을 다 알지 못하는 그는 미칠 것 같았다. 자꾸 밑이 부풀어 오르는 게 욕망의 도화선에 불이 붙어가고 있었다.

“안 된다…….”

결국 미친 듯이 술을 퍼먹던 그녀는 잠이 들고 말았다. 잠들면 조금 편해지겠나 싶었는데 아니, 이게 웬걸. 그녀는 그에게 그야말로 매달려서 잠들었다. 아무리 떨어뜨리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왜 넓은 침대 놔두고 내 품에서 자는 거야? 미쳐 버릴 것 같다고!

“가지 마……. 나 혼자 두지…… 마…….”

그녀가 잠결에 중얼거리는 외로움의 소리에 그의 모든 움직임이 굳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고, 욕망이 가라앉았다.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같이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그런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을 상대로 욕정이라니, 미쳤냐?

그는 그런 자신을 질책하고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안 떠나. 그러니 꿈에서도 즐거워하길.”

그는 자신을 있는 힘껏 껴안은 그녀의 팔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는 그녀를 제대로 눕혀 주고 이불까지 덮어 준 후 촛불을 켰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궁에 가 시녀들이 장식용으로 놔둔 커다란 인형을 안겨 주었다.

“잘 자.”

그는 그녀의 이마에 짧게 키스하며 중얼거렸다. 즐거운 꿈을 꾸는지 그녀의 입에서 작은 흥얼거림이 나왔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한참 보던 그는 이윽고 가운을 벗고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후 검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단꿈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 계속 있기에는 언제 욕정이 다시 올라올지 몰랐다.

‘내 팔자야…….’

배우자의 순결을 지켜 주기 위한 눈물겨운 달밤 체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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