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포용 혹은 복종
그렇게 서로를 향한 고백 이후 둘은 다시금 바빠졌다. 카니벨라는 비로소 자신이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훗날 라이넨의 옆에 ‘진짜 모습’으로 서게 되었을 때 그를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황후로부터 황태자비 관련 업무를 배우고 인수인계 받기로 했다. 이때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진지하게 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녀는 황후를 찾아갔다.
그 이후로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이때까지 형식적으로 하던 공부는 사라지고 본격적인 현장 실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라이넨 역시도 황제 탄신 기념 무도회의 총책임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낼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황후의 집무실에서 업무를 배웠다. 그러나 거기서 느끼는 정신적 피로감은 어마어마했다.
‘설마 사람이 이렇게 유치해질 줄은 몰랐는데…….’
사용인들이 황후에게 충성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황후는 황궁의 어른이고 또한 황족이니까. 그렇지만 차기 황후가 되려면 그녀는 그들의 충성을 이끌어 내야 했다. 그리고 그들 또한 그녀의 손발이 되어 줘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황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황족. 그래서 은연중에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코웃음 치며 무시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 황태자비라는 신분은 위장이 아닌 진심이 되었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은 똑같군.’
그녀는 시니컬하게 생각했다. 제국이라고 해서 다른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은연중에 깔린 시녀들의 무시가 그녀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물론 라소니 왕국에 있을 때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기는 했지만 일개 시녀에게까지 무시당할 정도로 황태자비가 보잘것없는 존재는 아니었다.
“이봐, 너.”
“네?”
“내가 처리해야 하는 서류가 이것인가?”
황제는 제국 전체를 총괄하고, 황후는 궁 안의 모든 것을 총괄한다. 물론 라이넨은 황후와 만나고 싶지 않아 궁 안의 일을 진행할 때도 황제를 찾아갔지만.
라이넨의 경우가 예외일 뿐, 본래는 그러했기 때문에 차후 황후의 업무를 물려받아야 할 황태자비 또한 그 업무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올라오는 안건들이 다 허접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다.
[낸시의 강아지를 찾는 방법]
[빌드네 집에 있는 신발을 고치는 방법]
[정원사가 가로수를 손질하는 방법]
이런 업무들은 담당 부서가 따로 있을 뿐만 아니라 황족이 다루기에는 너무나도 한심한 것이었다. 노골적인 무시였고, 동시에 명백하게 엿 좀 먹어 보라는 뜻이었다.
“…….”
그녀는 황후의 의도가 너무 명백하게 느껴져 속으로 혀를 찼다. 라이넨은 신경도 쓰지 않는데 혼자서 자애로운 어머니인 척하는 것도 가증스럽고, 이런 덜떨어진 방법으로 엿을 먹여 보려는 심보도 짜증이 났다.
“넌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지?”
“황태자비이십니다.”
“그런데 너는 마치 내가 이런 잡다한 일이나 처리하는 처리반으로 보였구나.”
“아닙, 푸훗, 니다.”
깔보는 눈빛과 비웃음. 황족에게 하는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방진 시녀의 태도에 그녀는 줄곧 갈고닦아 왔던 살기를 서서히 방출했다.
“입 닥쳐. 어디서 시녀 따위가 황족이 말하는데 그런 불량한 태도로 듣고 있는 것이지?”
“네, 네?”
평소와는 다른 낮은 목소리, 날카로운 눈빛, 차가운 말투.
이때까지는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무시하던 재미없을 정도로 일절 반응하지 않던 황태자비가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에 시녀는 마치 자신이 한 마리의 맹수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다시 묻겠다. 내가 처리반으로 보이는가?”
“아닙…… 니다.”
“똑바로 대답해.”
그녀의 행복을 깨뜨렸던 복면인들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뮤일라 일가를 향한 증오는 매우 짙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고스란히 살기로 진화했다. 또한 검술을 연마하면서 발달한 기운이 더해지자 그 기세는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그녀의 원한과 기운이 더해진 농도 짙은 살기를 한낱 시녀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시녀는 겁에 질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당장 가지고 가서 이따위 서류를 내게 갖고 온 사람을 데리고 와라. 그 사람을 문책해야겠다.”
“네? 네!”
그녀의 음산한 목소리에 겁에 질린 시녀가 도망을 갔다. 그러자 그녀의 상석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황후가 나지막이 말했다.
“황태자비, 너무 혼내지 말아요. 그 아이는 궁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이고, 그 정도 실수는 용납될 수 있는 법이랍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너무나도 너그러우신 분이시군요. 제가 한 수 배워야 할 정도로 감탄스럽습니다.”
그녀의 말에 돋친 비아냥거림에도 황후는 호호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그 표정에 황후 역시 이 일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묵인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짜증이 났다. 정말이지 가증스러웠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업무에 투입된 지 한 달이나 되었으니 익숙해질 때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저게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명백한 의도죠.”
“명백한 의도라…… 그 말에 확신하고 계신가요?”
“이 정도 실수도 실수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이곳의 수장으로 있다면 시녀들의 질이 낮다는 것이고, 만약 이것이 의도라면 이것은 명백한 저를 향한 모욕입니다.”
“그 말은…… 저를 모욕하는 것인가요?”
그녀는 돌려서 이 시녀들을 최종적으로 관리하는 황후가 이렇게 수준 낮고 질 낮은 장난질이나 하는 존재냐고 비꼬았다. 그리고 황후는 이러한 간단한 도발에 말려들었다. 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진짜 정말이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전 황후 폐하를 모욕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황후 폐하께서 이 모든 것을 총괄하시기는 하지만 시녀들을 관리하는 것은 엄연한 시녀장의 임무. 시녀장이 시녀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제가 황태자비 업무를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 것이기에 시녀장만 혹독하게 교육시킨다면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녀장이 아무리 시녀들을 관리하는 총괄이라고 하지만 그 많은 시녀를 한 명 한 명 다 일일이 관리할 수는 없습니다. 황태자비께서 궁의 생리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물론 시녀장 한 사람이 모든 시녀들을 관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황족의 업무를 도와주는 시녀가 있는 만큼, 업무 시녀들을 관리하는 시녀장이 또 있을 것입니다. 이건 바로 그자의 잘못입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업무 시녀장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역시 표정과 자세가 묘하게 삐딱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어디서 눈을 그렇게 치켜뜨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시녀에게 다가가 발로 정강이를 찼다. 이에 시녀가 고통스러워하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어린 시녀가 나가자마자 거둬들였던 살기를 다시 개방했다. 시녀장은 다리 전신을 관통하는 고통과 함께 오금이 저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일어나. 지금 황족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것이냐?”
그 말에 시녀장은 재빨리 다시 일어났다. 차인 정강이가 너무 아팠지만 황태자비가 짓고 있는 표정이 더 무서웠다. 카니벨라는 시녀장의 눈을 보며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표정이 그따위냐고 물었다. 지금 네가 누굴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인지 아느냐?”
“…….”
“대답하라.”
“황태자비…… 이십니다.”
시녀장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애써 가누며, 두려움을 억누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런 시녀장의 대답에 비웃음을 날렸다.
“그런데 그런 황태자비를 이런 식으로 취급한다…… 너희는 기본 위아래를 구분하지 못하나?”
“아,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출신이 불분명한 이방인이지만 정식으로 황태자 전하와 결혼한 황태자비다. 그리고 그걸 하늘에 대고 맹세했다. 너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너희 따위가 나에게 이런 장난질을 해?”
시녀장은 그녀의 흉흉한 기세에 몸이 짜부라질 것만 같았다. 그사이 그녀의 살기 어린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루라면 재미있게 봐주려 하였으나, 자그마치 한 달이다. 너희는 그동안 나를 모욕했으니, 내가 너희를 용서할 이유는 하등 없다.”
저 말에 시녀장은 혹시나 그녀가 자신과 다른 시녀들을 죽여 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살려 달라고 매달렸다. 그녀는 후훗 웃으며 시녀장과 시야를 맞추고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내가 너희를 죽일 리가 없지 않느냐.”
“그, 그렇다면…….”
“그렇지만 나는 무능한 사람을 내 밑에 두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 오늘 안으로 네 휘하 시녀들과 짐을 가지고 궁에서 썩 꺼져라. 내일부로 내 눈에 보인다면 진짜로 너희를 죽일 것이다.”
“네, 네! 알겠습니다!”
시녀장은 재빨리 집무실에서 나갔다. 소란스러운 퇴장 이후 집무실은 충격의 침묵으로 가득 찼다.
“…….”
황후는 그녀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예전에 있었던 만찬 때도 보통은 아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상대하기 어려운 아이였다.
이것은 교묘한 장난이고 따돌림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위였다. 우리는 당신을 황태자비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비웃고는 도리어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눌러 버린 것이었다.
왜 이때까지 따돌림에 반응하지 않았는지 그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그럼 저는 이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난 후부터 업무를 다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황후궁에서 나왔다.
‘이제는 황후도 나를 만만하게 보지 않겠지.’
대놓고 시녀장과 그 휘하 시녀들을 그 앞에서 해고했다. 그리고 살기를 퍼부었다. 아마 그것들은 지금쯤이면 부리나케 짐을 싸 들고 있겠지.
이미 끝난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이 일로 인해 앞으로 궁 안의 어떠한 사용인도 그녀를 만만하게 보지는 못할 것이다. 시녀들의 입을 타고 오늘의 일이 퍼지고 퍼질 테니까.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하루 사이 소문은 날개 돋친 듯 퍼져 나갔다. 시녀들의 표정에는 무시 대신 두려움이 떠올랐다. 은연중에 그녀를 무시하고 이방인 취급하던 그들은 혹시나 눈에 띄어 쫓겨나는 것이 아닌가 노심초사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떡해, 에오라. 너 오늘 잘못했다가는 쫓겨나는 거 아니야?”
“야, 자꾸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도 무섭단 말이야.”
“레이, 너는 안 무서워?”
“성질을 건들지만 않으면 안 무섭지 않을까……?”
황후의 지시 아닌 지시 때문에 이때까지 전용 시녀도 없었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전용 시녀가 배치되었다. 에오라와 레이, 그들은 이번에 처음으로 시녀 업무를 해 보는 신참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남들의 앞에서 자신을 뭉개 버렸던 그녀를 향한 황후의 소심한 복수였다.
업무에 어설픈 시녀들을 보내서 스스로 악명을 쌓게끔.
똑똑.
“누구지?”
“이번에 새, 새롭게 배치된 전용 시녀들입니다.”
“들어와.”
방은 단출했다. 큰 침대가 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작은 드레스 룸과 화장실, 티타임 테이블, 그리고 책을 읽을 수 있게끔 큰 책상이 있었다. 그들은 명색이 황태자비의 방인데 이렇게 썰렁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
‘이번에 잠정적으로 황태자비 업무에서 손 뗀다더니 정말이구나.’
이 시간에 수업을 받지 않고 책을 보고 있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레이는 한가하게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사이 황태자비는 입을 열었다.
“자기소개.”
“저, 저는 이번에 처음 시녀로 배치된 에일스 남작 가문의 에오라입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 시녀로 배치된 레이입니다. 가문명은 상단에 팔아 버려서 없습니다.”
“그래, 보다시피 할 일은 딱히 없어. 그냥 내가 시키는 거 조금 해 주면 돼.”
그리고 그녀는 그들을 내보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를 테니까 놀고 있으라는 말과 함께.
에오라는 그 말에 황태자비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이제 어떡하냐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자 레이가 말했다.
“진짜로 우리 보고 놀라고 하시는 거잖아. 보니까 별 의도도 없으신데?”
“그, 그런가……?”
에오라는 레이의 그런 말에 다소 불안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딱히 황태자비가 그들을 부를 일은 없었다. 도서관에서 찾고 싶은 책을 갖다 달라는 일이나 가끔 찾아오는 황태자와 마실 차와 다과를 가져오는 게 다였던 것이다.
정말 몸이 편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그런데 봉급은 또 많았다. 이 정도면 금화로 수영을 해도 될 정도였다.
그래서 다른 시녀들이 황태자비가 무슨 패악을 부렸냐고 물으면 그들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일 적지, 돈은 많이 주지, 그리고 황태자비가 그들을 때리거나, 막말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어떨 때는 없는 취급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황태자비는 그들을 나름 잘 챙겨 주었다. 부당한 대우가 있으면 나름 중재해 줬고, 황태자와의 데이트를 하고 나면 그들에게 먹으라고 디저트도 사 주곤 했다.
그래서 그들은 열렬한 황태자비 추종자가 되었다. 황태자비가 어디에 가면 늘 졸졸 따라붙었고, 가끔 황태자비가 그들에게 주는 물건들을 시녀들에게 자랑하기도 하였다.
‘진짜 시녀들을 막 때리거나 그렇지는 않구나.’
‘걔들이 진짜 잘못해서 쫓겨난 거였구나!’
그리고 황태자비를 두려워하기만 했던 시녀들 또한 그녀의 한결같은 태도에 매료되었다. 황태자비는 무뚝뚝하고 무심했지만 자기 사람은 한없이 아낀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황후는 이건 아닌데 싶었지만 이미 일은 일어난 후였다.
괜히 신참들을 붙였다가 추종자만 만들어 준 꼴이었다. 물론 여전히 황후를 따르며 황태자비를 배척하는 시녀들도 많이 존재하긴 했지만 황후는 황태자비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정작 본인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에오라와 레이야 내 전속 시녀니까 내 편으로 만들어 놓으면 좋겠지만…….’
이 와중에 다른 시녀들까지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건 의외였다. 그녀는 상대를 복종시키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포용할 자신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네.’
아무래도 그녀는 자신의 생각보다 더 통치력이 있는 것 같았다.
* * *
그녀는 오랜만에 라이넨이 만들어 준 자신의 전용 도서관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난 사이, 도서관은 완공이 되었고, 책은 꾸준히 차오르고 있었다. 종류도 다양해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정도로 양이 많았다.
그럼에도 라이넨은 혹시나 부족할까 싶어 아직도 책을 주문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책장이 없어 바닥에 책을 놔둘 지경이 되었다.
“황태자비를 뵙습니다!”
그곳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이 그녀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다. 시녀들의 세력 싸움(?)은 궁 안의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기사들 역시도 그녀를 좋게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정작 본인은 잘 몰라서 그저 저들의 기강에 감탄할 뿐이었지만.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 책을 읽던 그녀는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달빛에 정신을 차렸다.
‘오늘 하루 좀 안고 있어야겠어.’
그녀는 라이넨과의 포옹이 그리웠다. 요즘 그가 바빠 볼 참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가 오자마자 안겼다.
“오늘 하루 이 품이 너무 그리웠어.”
그는 자신도 마찬가지였다고 말하며 함께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서로 대화를 하며 서로에게 있었던 일들을 풀어내는 시간을 가졌다.
“나 먼저 잘게.”
그리고 그녀는 몰려오는 피곤함에 금세 잠들었다. 그는 자고 있는 그녀가 너무 귀여워 볼을 쿡 찔렀다. 그녀는 잠결에 아팠는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게 또 너무 귀여워 웃었다.
그러나 그녀가 잠이 들면 그는 항상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애정의 박탈 경험 때문인지 그녀는 항상 잘 때마다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그는 항상 일어나는 욕정 때문에 달밤 체조를 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늘 피곤했고, 자지 않던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카샨이나 다른 측근들이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어떻게 욕망 때문에 늘 밤을 새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말 의도치 않게 검술 실력만 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힘들어하고 있을 때 즈음, 공식적으로(?) 그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황궁 일정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