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결합
황제 탄신 연회 이후 라이넨은 한 달이라는 다소 긴 휴가를 받았다. 그가 연회를 총괄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다소 지쳐 있었다. 자신의 업무와 함께 카니벨라의 춤 선생까지 도맡아 하려니 몸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걸 그녀의 앞에서 티 낼 수는 없어 난감하던 찰나, 황제의 배려에 그는 기분 좋게 그녀에게 제안할 수 있었다.
“우리 짧은 여행이나 갈까?”
“여행?”
카니벨라는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었다. 라이넨과 헤어졌던 그때 잠시 돌아다닌 적은 있었으나 그건 여행보다는 도주에 가까웠다.
“황족들이 쉬기 위한 요양지가 많이 있어. 그래서 이번에 그중 가장 가까운 곳에 가면 어떨까 싶은데.”
“좋아. 그런데 혹시 뭐 또 준비해야 할 게 있을까?”
“딱히. 그냥 거기서 놀고, 먹고, 구경만 할까 싶어.”
“재미있겠다. 너랑 있으면 뭐든 즐겁단 말이야.”
그녀는 그와 함께했던 여러 데이트를 생각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호호호,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기대감에 그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그녀와의 완벽한 여행을 위해 언제나 그렇듯 카샨을 들들 볶았다.
“황족 휴양지 중에서 나랑 비가 갈 만한 곳 좀 탐색해 봐.”
“에잇! 나는 정보국장이야! 내 업무도 바빠 죽겠는데 뭐 이런 걸 찾아 달라고 하는 거야? 네가 알아서 해!”
그 말에 카샨이 길길이 날뛰었다. 카니벨라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그와 함께 처리하다 보니 생겨 버린 부작용이었다. 라이넨은 하극상 부리지 마라, 명령이라고 밀어붙일까 하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관뒀다.
얼굴은 반쪽이 되어 거의 광대뼈가 다 드러나다시피 하였고, 다크서클이 짙었다. 그리고 목소리에서도 피곤함이 묻어나왔다. 최근에 카샨이 동시에 여러 일을 처리하면서 고생했던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라이넨은 꽤 관대한 상사였다. 물론 그건 본인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내가 휴가를 받았으니 너도 한 달 동안 휴가다.”
“전하…… 번복하면 안 됩니다?”
카샨은 눈을 가자미같이 뜨며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하지.”
평소 얼마나 굴렸기에 휴가를 준다는 말에 저렇게 기뻐하는 건지. 라이넨은 카샨의 얼굴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충전하고 오면 다시 굴릴 수 있겠지.’
카샨이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라이넨은 카니벨라와 함께 휴가를 갈 장소를 직접 찾아보기 시작했다.
* * *
라이넨은 휴가를 얻었지만 카니벨라는 연회 이후에 황후로부터 다시 호출받아 인수인계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휴가 직전까지 서류를 처리해야 했다. 게다가 온전한 황태자비가 되기 위한 여러 수업들이 다시 시작되었다.
수업을 들으며 그녀는 예전에 받던 후계 수업을 다시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때와 달리 제왕학, 지리학, 외교학 등을 수업하지는 않았지만.
‘황후는 궁 안에서는 황제나 다름없군.’
황후가 궁 안의 모든 것을 총괄하기 때문에, 그녀는 황궁 안의 모든 것을 익혀야 했다. 그래도 공부 머리에는 나름 자신 있었기에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예전처럼 이상한 것으로 골탕 먹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정은 다소 알차게 진행되었다.
“오늘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제국 귀족 가문의 역사 수업을 담당하는 교사의 인사를 끝으로 모든 일정이 끝났다. 그녀는 기지개를 켜고는 궁에서 나와 정원을 걸었다. 에오라와 레이가 따라오려 하였으나 그녀는 그들을 물렸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휴가를 갔다 오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해야겠어. 그리고 루카민의 행적도 추적해야겠고.’
이때까지는 궁과 바뀌어 가는 환경 속에 적응하느라 바빴지만, 휴가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파헤칠 작정이었다. 게다가 루카민이 아직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상했다.
이미 오래전에 자신이 찾은 정보에 대해 보냈다. 그렇다면 이미 답장이 오고도 한참은 남을 시점이었다. 그런데 수일이 지났으나 그에게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그녀는 그 사실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루미니르 제국의 황태자비 이름이 ‘루시아’라는 것을 들었다면 그 자신이 먼저 그녀에게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 ‘루시아’라는 이름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테니까.
그녀는 애초에 자신의 생존을 알리기 위해서 이 이름을 빌렸을 뿐이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루카민은 라소니 왕국의 기사단장 출신이다. 그의 무력은 왕국의 어떤 기사도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만약 그때 6년 전 그 사건 때 그가 자리에 있었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런데, 그런 그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이곳은 대륙의 모든 정보가 모이는 제국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애초에 라이넨이 다 알려 줬을 테니까.
<우리 둘 다 반드시 싸움에서 승리하여 다시 만나자.>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루카민도 기억하고 지켜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니 제발…….’
그녀는 계속 묵묵히 바닥을 보며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그사이, 해가 점점 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도 점점 차가워졌다. 그때 웬 담요가 그녀의 어깨에 걸쳐졌다.
“뭐 하고 있어?”
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라이넨이었다. 그녀는 하던 생각을 접고 그에게 안겼다.
“그냥 산책 좀 하고 있었어. 당신은 이제까지 뭐 하고 있었어?”
“같이 휴가 갈 곳을 좀 찾고 있었어.”
“호오, 기대되는걸?”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그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그녀는 정말로 기대가 되었다. 그는 이때까지 어떤 사소한 것이더라도 그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일 당장 가는 건가?”
“아니, 짐은 챙겨야지. 황제 폐하께 말씀도 드려야 하고.”
“이번에 동행하는 사람은?”
“없어. 이번에는 어떤 시중인도 없이 오직 우리 둘이서 가는 거야.”
황족들이 움직이는데 호위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루미니르 제국에는 마법이라는 편리한 것이 있고, 그는 마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황제는 흔쾌히 허락을 해 주었다.
그리고 둘은 일주일 후, 휴가지인 에스모 섬에 도착하였다.
“우와!”
철썩 소리가 나며 바닷물이 연신 바위들을 때렸다. 바닷물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빛을 받아 빛이 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보다 그냥 문을 열었을 뿐인데 바닷가가 나온 것이 더 놀라웠다.
“어떻게 된 거야?”
“비밀.”
그는 황태자인 만큼 마법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아직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녀에게 마법의 비밀에 대해 알려 주는 것은 곤란했다.
그녀는 난처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서 이 ‘기적’에 대해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것에 대해 눈치채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 새하얀 모래사장, 맑은 바다, 날아다니는 갈매기들 그리고 조용한 풍경을 눈에 담았다. 마음에 들었다. 왠지 이번 휴가는 정말 황홀할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어때?”
“최고일 것 같아.”
그녀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원피스 단을 들었다. 하얀 원피스는 매우 가볍고, 잠옷에 가까울 정도로 심플했다. 그리고 종아리를 간신히 덮을 뿐인 휴가에 완벽한 원피스였다.
그녀는 그 옷을 쥐고는 바닷물을 맞았다. 철썩거리며 다가온 파도가 발에 부딪혔다. 그것이 매우 마음에 든 그녀는 발장구를 치며 걸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그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미 그녀의 인생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이 일정이 그녀에게 있어 휴식이 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배가 고픈데.”
그렇게 한참 동안 바닷물을 가지고 놀던 그녀가 그가 있던 곳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 그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발을 씻겨 주고 신발을 신겼다.
“그럼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까?”
바로 앞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살짝 아찔해졌다. 그녀는 이게 배고픔 때문인지, 그가 그만큼 치명적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기분이 좋아 그의 목을 껴안았다.
“빨리 들어가요.”
가끔 해 주는 그녀의 존댓말은 그를 설레게 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미리 시켜 두었던 저녁을 빨리 먹이기 위해 저택으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오랜만이군.”
“네, 그동안 훌륭하게 자라셨습니다.”
“어디로 가면 되지?”
시종은 그가 빨리 그녀에게 저녁을 먹이고 싶다는 것을 알고 재빨리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그녀가 자주 먹어 보지 못한 해산물 요리가 잔뜩 있었다.
“우와.”
“일부러 먹어 보지 못했을 것 같은 거 위주로 준비했으니 많이 먹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는 그녀의 옆에 꼭 붙어 앉아 음식을 하나하나 먹여 주었다. 시종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고, 그녀는 맛있고 편했지만 자신 때문에 그가 저녁을 허하게 먹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넌 안 먹어도 괜찮아?”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니 괜찮아.”
“무슨 소리야. 자, 먹어.”
그 뒤로 둘은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용인들은 처음에는 놀랐으나, 이내 라이넨의 변화에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그가 예전에 어떤 상황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픔을 품은 아이, 홀로 살아남은 아이.
사고 이후의 그는 언제나 음울하고 차가웠지만 지금 함께 앉아 있는 황태자비와 있으니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사용인들은 저런 그의 저런 모습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랐다.
‘부디 전하와 영원히 함께해 주세요.’
“이제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어.”
그녀의 그 말에 그는 시종들에게 식탁을 치우라고 명하고는 그녀와 함께 2층에 있는 침실에 들어가 한참 동안 대화를 했다. 그리고 둘은 손을 잡으며 잠에 빠졌다.
휴식은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었다. 이때까지는 주로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했다면 이번에는 철저하게 쉬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둘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구경하며 시종들이 만들어 준 그늘에 누워 있었다.
카니벨라는 라이넨의 팔에 머리를 대고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읽는 각종 공부용 서적이 아닌, 철저하게 시간을 죽일 수 있는 소설이었다. 평소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전 황후가 즐겨 읽었다고 하니 흥미가 갔다.
“책에는 정말 운명적인 만남이 많네.”
그녀는 그중에서 손때가 가장 많이 탄 책을 펼치며 중얼거렸다. 그때, 옆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났다. 그가 잠을 자는 소리였다.
‘피곤할 만하지.’
그는 이전에는 각종 여러 공부들과 동시에 황제의 일을 물려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연회 총괄에 그녀의 춤까지 가르쳐 주었다. 피곤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책을 덮고는 그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지런한 검은색 머리카락, 날카로운 옆선에 하얀 얼굴과 키스를 부르는 입술까지 눈에 담았다. 그녀는 후후후 웃었다.
잠을 자는 그는 마치 아기 같았다. 눈을 떴을 때와 달리 눈매가 쳐졌다. 늘 자신이 먼저 잠들고 늦게 일어나 이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새롭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늘 내 자는 모습만 봤겠네. 미안해서 어쩌지.”
난감하게 웃던 그녀는 더욱 그에게 밀착해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살랑거리며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태양 빛이 좋아 이곳에 계속 누워 있고 싶었다.
“으음…….”
그때, 그가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뜨여지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잤어?”
“응…….”
그는 잠에서 덜 깼는지 눈을 비볐다.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까지도 사랑스러워 그의 입술에 뽀뽀를 하며 말했다.
“일어나. 나 심심하단 말이야.”
“미안해.”
그녀의 투정에 그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괜찮았다. 그녀는 그를 일으켜 세워 함께 바닷길을 걸었다.
그러던 그는 문득 그녀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주고 싶어 방향을 틀어 산 위로 향했다. 위에서 밑을 보자 아름다웠다, 바다는 밑이 비쳐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이 다 보일 정도였고 옆에 보이는 마을은 아기자기했다.
둘은 바위 위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서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시장을 좀 걷고 싶어.”
그 말에 둘은 번화가를 걸었다. 그곳에서 음유시인들의 연주 소리를 들었다. 보이는 바깥의 먹거리도 먹었다. 상인들의 호객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광장 분수에 앉아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바라보았다.
“즐거워 보인다.”
“저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백성들이야.”
“그래, 좋다. 난 꼭 제국을 부흥하는 나라로 만들고 싶어.”
“네 소원대로 될 거야.”
그는 이 활기찬 마을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늘 행복하기를. 그리고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때 확신했다.
이렇게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고.
저녁이 되고 둘은 저택으로 귀환하였다. 어제처럼 서로에게 음식을 먹여 준 그들은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갈아입을 옷을 쥐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라이넨.”
“무슨 일이야?”
그는 다소 긴장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지금이 아니면 못 말할 것 같아서…….”
“응?”
“나, 너와 함께 가정을 꾸려 나가고 싶어.”
“……뭐?”
“널 닮은 아들 하나, 날 닮은 딸 하나 이렇게 아이들을 가지고 싶어.”
“…….”
처음에 둘은 암묵적으로 아직은 자녀를 낳을 때가 아니니, 합방을 하되 그냥 잠만 자자고 거래를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자신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밤마다 힘들어한다는 것도.
우연찮게 새벽에 깼던 어느 날, 그가 맹렬히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잠이 오지 않아서 그러는가 싶었으나, 평소에는 낮잠은커녕 졸지도 않던 사람이 자꾸 낮잠을 자서 걱정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고 알아차렸다.
그는 그녀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그리고 저렇게 새벽에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것은 자신을 지켜 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처음에는 애써 무시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와의 미래를 꿈꿨고, 행복해지고 싶었다.
“난 행복해지고 싶어. 네가 원하는 걸 해 주고 싶어. 그래서 결정하게 된 거야.”
“…….”
그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그는 완벽한 환경(?)이 갖추어졌을 때 일을 해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이 바로 그 완벽한 환경(?)인 것 같았다.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이때가 완벽한 환경(?)이 아니면 뭐지?
“그럼 같이 씻는 것부터 시작해 볼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번쩍 안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욕조 안은 꽃잎으로 가득했다. 둘은 그곳에 앉아 거칠게 서로의 숨을 탐했다. 몸을 씻는 것보다 서로를 탐하는 것에 더 정신이 없었다. 물이 욕실 밖으로 튀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고, 그녀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넓은 욕실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그들의 거친 애욕의 소리밖에 없었다.
“우리, 잠깐…….”
“조금만 더…….”
그녀는 그와의 시간이 너무 좋았지만 씻고 싶어 그의 입술을 억지로 떼어 냈다.
“침대에서 더 하면 되지, 뭘 벌써 진을 다 빼려고 그래.”
그 말에 그는 열성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겨 주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일부 드러났다. 그는 그곳에 진하게 키스하고 싶었으나 빨리 침대에 들어가고 싶어 애써 참아 냈다.
“자, 다 되었다.”
서로를 씻겨 준 그들은 재빨리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저 말이 방아쇠가 되어 그는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아앗!”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에 침대 시트가 젖어 들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손가락을 타고 올라오는 차가움이 짜릿했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짧게 키스했다. 그녀는 그의 그런 모습이 너무 뇌쇄적이었다.
“정말이지, 이때까지 어떻게 참았어?”
“오늘을 간절히 꿈꾸며 참았지.”
“참, 귀여운 남자라니까.”
그녀는 그의 목을 거칠게 껴안았다. 그는 아까까지 키스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간지러웠다. 그와 동시에 너무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의 품에 깊이 파고들었다.
둘은 하나가 되었다. 침대 시트가 바스락 소리를 내었다. 그들의 움직임에 침대가 거칠게 삐걱거렸다.
움직임은 절정에 치달았다. 그들은 서로의 깊은 곳, 알고 싶었던 곳으로 들어갔다. 그 세계가 주는 아찔함, 짜릿함, 황홀함에 빠져들었다. 이때까지 그들이 했던 스킨십은 어린아이 소꿉놀이 수준이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치 씹으면 터지는 사탕을 가득 넣은 것처럼 입 안에서 별이 터졌다. 지금 이 시간이 너무나도 좋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 밑에서 황홀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다시 한번 입술을 지분거렸다.
서로의 땀방울이 침대 시트를 더럽히고, 온 방에서 서로를 향해 사랑을 나누는 소리로 가득 찼다. 폭발적이고 동시에 아름다운 서로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그녀는 자신과 하나가 된 그를 보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이때까지 어떻게 참았던 거야.
그 생각이 저절로 날 만큼 그는 온몸으로 그녀를 향한 사랑을 표현했다. 그녀는 이 행복에 정신이 점점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아름다운 보름달이 뜬 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진정한 결합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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