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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다시 시작하다 (24/93)

23. 다시 시작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라이넨은 따스한 햇살을 맞이하며 깨어났다. 눈을 뜨자 그는 어제의 일이 혹여나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무 황홀해서 마치 이게 그의 상상이 아닐까 불안감도 살짝 들었다. 그의 인생에서 이렇게 행복할 때가 있었나 싶어서.

“우웅…….”

그러나 그 생각은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는 카니벨라를 보자 날아갔다. 그녀는 평소처럼 이불을 둘둘 만 채 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제의 그 격렬한 밤에 보였던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어젯밤에는 농염한 여인처럼 보이던 그녀가 아침이 되자 순수한 소녀처럼 보였다. 그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볼에 뽀뽀를 했다. 그녀는 낯선 촉감에 몸을 돌렸으나 그는 그것마저도 사랑스러웠다.

‘너무 격렬했나.’

이불 사이로 보이는 빨간 흔적들과 거칠게 떨어져 있는 속옷들까지. 그는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부끄러워졌다.

“전하, 안에 계십니까.”

마침 시종이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아무 가운을 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기운을 북돋는데 좋은 음식 위주로 만들도록 해.”

“전하, 어디 아프십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렇다면…….”

혹시? 하는 표정이 시종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얼굴이 살짝 빨개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으니까 어서 준비해 줘.”

“아하, 그렇군요! 전하들을 위한 보양식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호들갑은 떨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반짝거리는 눈을 하며 시종은 재빨리 사라졌다. 안 그렇듯 하면서도 호들갑을 많이 떨고 입이 가벼운 시종이기에 그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둘의 동침이 모든 사용인들에게 알려질 거라고.

‘부디 너무 부끄러워하지는 않았으면 하는데.’

그는 곧 일어날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가 될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복귀해야 하겠군.’

휴가는 오늘로 끝이다. 이제는 돌아가서 황태자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그녀와의 약속을 지켜야 할 때였다.

*   *   *

황제의 사정으로 이번에는 마차를 타고 왔어야 했다. 그녀는 갈 때와 달리 창문 너머의 세상을 볼 수 있음에 좋아했다.

“상쾌하다. 숲이 이렇게 상쾌할 줄은 몰랐어.”

자연의 냄새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바람은 시원했다. 그는 푸른 숲과 그녀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 그때는 제대로 즐기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이 맛을 알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야.”

레미우스 왕국에 팔려 갈 그 당시, 그녀는 탈출에 신경 쓴다고 제대로 된 풍경을 보지 못했다.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복수, 추격에 온 신경이 집중되느라 감상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다 네 덕분이야.”

“응?”

“네 덕분에 정말 많은 걸 알게 되었어.”

“무엇을?”

“네 덕분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고, 사랑에 대해 알게 되었어.”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그녀는 라이넨에게 고마웠다. 그로 인해 누리게 된 것, 알게 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소중한 경험이기에 그녀는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나랑 같이 있으면 앞으로는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그는 자신과 같이 암울한 인생에서 허우적거린 그녀에게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그럼 난 앞으로 너한테 영원히 붙어 있어야 하겠네.”

그녀는 그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리고 그의 한쪽 손을 지긋이 잡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빛에 그는 아찔함을 느꼈다.

“그렇게 쳐다보면 나 정말 죽을지도 몰라.”

“그럼 자제해 볼까?”

“아니, 더 해 줘.”

“뭐?”

그녀는 그의 귀여운 투정에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 보여 주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기에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둘의 목소리는 마차 밖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들은 부부의 금슬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 냉엄한 황태자가 보이는 행동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힘들었다.

“내 귀가 이상한 건 아니겠지?”

“아니, 정상이야.”

“너도 그렇다는 거야?”

“나도 전하께서 투정 부리시는 거 다 들었다.”

“히익! 차라리 꿈이라고 해 줘라!”

“우웩.”

그러나 그들의 수군거림이 있든 말든 마차는 부지런히 나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둘은 황실로 복귀했다. 황제와 황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한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일을 위해 헤어졌다.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집무실 문을 연 순간, 보좌관들과 카샨이 그를 반겼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 가며 각종 안건들을 들었다.

“전하, 이번에 귀족파에서…….”

“이번에 다리를 만들기 위한 예산이…….”

“시스티아 왕국에서…….”

“찾고 있던 것이 조만간…….”

그는 자신이 돌아왔음을 실감하였다. 이제 휴식은 끝이 났고 그는 일을 해야 했다. 순식간에 쌓이는 서류를 보며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자리를 비운 지 시간이 되었기에 그는 적응하는 데 시간을 써야 했다. 산처럼 쌓이는 서류는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고, 휴식을 알아 버린 몸은 자꾸만 놀자고 아우성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사람이었다. 불평할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돌아온 삶에 크게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비가 좀 보고 싶기는 하네.’

작은 희망 사항이 있었지만 그것은 일이 끝난 후에 주어지는 달콤한 보상. 그래서 그는 참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샨은 레미우스 왕국 쪽에서 날아온 공문을 바라보다 라이넨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누구지?”

“카샨입니다.”

“들어와.”

카샨은 서류가 잔뜩 쌓여 있는 책상에 받은 공문을 올려놓았다. 라이넨이 이게 뭐냐는 눈초리로 쳐다보자, 카샨은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네가 만약에 타국에서 카니벨라 공주 추적 낌새가 보이면 알려 달라며. 네가 잊어버리면 어떡해?”

“……아.”

라이넨은 얼빠진 목소리를 내고는 공문을 읽었다. 라소니 왕국의 4 기사단장이 레미우스 왕국에서 카니벨라를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웃기는군. 어차피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할 것인데.”

“그러게. 우리 가문이 정보를 조작한다면 그 조작도 진실이 되지.”

‘카니벨라 루 라소니’를 죽은 사람으로 처리해 달라던 카니벨라의 약속. 그 약속을 라이넨은 지켜낸 것이다.

“이제는 그만 쑤셔댔으면 좋겠군.”

그는 정보를 조작해 카니벨라를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랬기에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녀를 찾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의 짜증 어린 말투를 듣던 카샨은 무엇인가가 퍼뜩 떠오른 듯 손바닥을 탁 치면서 말했다.

“아 맞다. 최근에 라소니 왕국에서 그 기사에게 송환을 요구했어. 그러니 이제 그만 걱정해도 좋을 거야.”

“잘된 일이군…….”

라이넨은 손가락으로 탁탁 바닥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표정은 지극히 무표정했다. 그러나 카샨은 그게 무엇인가가 거슬렸을 때 라이넨이 보이는 모습이라는 걸 알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늘한 눈빛으로 공문을 바라보던 라이넨은 촛불에 그것을 태웠다.

화악!

불길은 종이를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이윽고, 공문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걸 바닥에 털어 버리며 치워 버린 라이넨은 책상을 짚고 일어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 어떤 것이든 용서하지 않을 거야.’

어떻게 갖게 된 평범한 하루인가. 남들은 쉽게 가지는 소중한 사람과의 하루하루가 드디어 그에게 찾아왔다. 그만큼 카니벨라는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다시 데리고 가겠다고? 그는 절대 그것을 방관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수를 써서라도 막을 생각이었다.

‘이제 웬만한 것들이 다 해결되었으니 약속을 지켜야지.’

그는 그녀와의 혼인을 전제로 세 가지 약속을 했다.

그녀를 죽은 사람으로 처리하는 것, 혼인을 비공개로 처리하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약속.

바로 라소니 왕국의 전 여왕을 죽인 자들을 찾는 것이었다. 유명한 사건이긴 했지만 라소니 왕국 측에서 빠르게 덮어 버린 바람에 제대로 된 경위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희대의 사건이었다.

그는 이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의 얼굴에서 보이던 복수심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그녀에게는 퍽 잔인한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정말 그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정보를 수집하기에 앞서 그녀의 증언이 필요했다. 그래야 그걸 토대로 조사를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가 있을 보금자리로 향했다.

“왔어?”

그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웃으며 반겨 주었다. 저 웃음이 얼마나 예쁜가. 그래서 그는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채 한참 동안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

그녀는 그의 허리를 안아 주었다. 그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그녀의 볼에 짧게 키스하고 말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어.”

“뭔데?”

“둘 중 무엇을 먼저 말해 주는 게 좋을 거 같아?”

“좋은 쪽이 좋지.”

“이제 공식적으로 넌 죽은 사람이야. 더 이상 널 찾을 사람은 없을 거야.”

그녀는 그의 말에 뛸 듯이 기뻤다. 이제 더 이상 라소니 왕국의 추적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맞아. 이제 네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을 수 있게 되었어.”

그녀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 이 길고 긴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런데 그가 말한 나쁜 소식이란 뭘까? 그녀의 표정에 그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사건에 대한 너의 증언이 필요해.”

“…….”

“끔찍한 기억이라는 건 알고 있어. 그렇지만 관련자도 없고, 자료도 없는 지금 네 증언이 있어야 조사의 방향을 잡을 수가 있어.”

“…….”

그의 표정은 조심스러웠다. 그런 그를 보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말, 해야지.”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언제나 그때의 참상은 떠올릴 때마다 그녀를 떨리게 만들었다.

“그때는 내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있었던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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