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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녀의 슬픈 날 (25/93)

24. 그녀의 슬픈 날

과거를 꺼내는 카니벨라의 목소리는 낮게 떨렸다. 라이넨은 그녀의 눈을 마주하였다. 그의 눈빛에서 위로를 느낀 그녀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라소니 왕국은 모계 왕국이야. 그건 알지?”

“알고 있어.”

“그래서 위에 오라버니가 있었음에도 내가 후계자가 될 수 있었지.”

라소니 왕국은 대부분 여자가 차기 여왕이 된다. 남자가 왕이 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건 극히 소수. 그래서 그녀는 날 때부터 후계자가 되었고, 그 때문에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삶.

그녀는 무엇을 해도 사랑받았다. 공부를 잘한다고 사랑을 받았고, 장난을 쳐도 아이라서 괜찮다고 사랑받았다. 무언가를 베푼다면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배려심이 넘친다고 사랑받았다.

그녀의 입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언제나 행복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행복이 깨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어.”

“…….”

왜인지 귀족들이 들고일어나 후계 시험을 치게 되었다.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증명했다. 옆에서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오라버니가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못했다.

그저 기분이 좋았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흥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자신의 꿈을 펼쳐갈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때, 그자들이 습격했어.”

*   *   *

후계 시험이 끝났다. 그녀는 자신이 느꼈던 이 기쁨을 어머니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래서 여왕궁에 갔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즐거운 하루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었다.

“폐, 폐하 도망치십시오!”

갑자기 한 시종이 문을 벌컥 열었다. 등 뒤에 칼이 꽂힌 시종은 힘없이 쓰러졌다. 대략 스무 명의 사람들이 문 앞을 가로막으며 들어왔다. 한 남자가 껄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쿠, 여기들 다 계셨네.”

“누구지?”

“습격하러 온 사람이 이름 말해 주는 거 봤냐? 그냥 얌전히 죽어라.”

그렇게 말하며 침입자들은 검을 휘둘렀다. 주변의 기사들이 재빨리 대항했다.

“여왕 폐하와 공주마마를 지켜라!”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는 여왕에게 안겨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기사들은 열심히 싸웠지만 밀려났다.

“안타깝게도 지원군은 없어. 우리가 다 죽였거든.”

그 말은 상황을 더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저들의 습격과 공격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 지원군까지 없다.

“그냥 여기서 죽어.”

그들은 비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설상가상으로 저자들은 그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궁에 불을 붙여 버렸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때, 여왕은 왕족만을 위한 비밀 통로를 열었다. 어떻게든 탈출하기 위해 도망쳤지만 연기는 빠른 속도로 그들을 따라붙었다. 그들은 얼마 가지도 못한 채 연기 안에 갇혀 버렸다.

앞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절망이 그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미로와 같은 통로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디로 도망가든 우리 손안에 있다고!”

게다가 뒤에서는 추적자들의 목소리에 발소리까지 들렸다. 시종들은 겁에 질렸고, 부단장 이라스를 비롯해 간신히 생존한 기사들은 혹시 모를 추적자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결국 얼마 더 가지 못한 채 그들은 추적자들과 다시 마주했다. 다시 한번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챙챙챙!

검과 검이 맞부딪혔다.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가며 싸웠고, 시종들은 기사들이 만들어 준 틈을 이용해 모녀를 탈출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 안에는 배신자가 있었다.

“아아악!”

“왜, 왜 부단장님께서……!”

갑자기 이라스를 포함해 세 명이 아군을 베어 버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기사들은 당황하여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여왕과 카니벨라 대신 칼을 맞은 시종들이 쓰러졌다. 상황은 최악의 최악을 향해 흘러갔고, 그런 상황을 모두 지켜보던 여왕은 결단한 듯 카니벨라의 손을 놓았다.

“에이라, 너는 지금 당장 카벨을 데리고 통로를 빠져나가 지금의 상황을 알려라.”

“하, 하지만 폐하!”

“미적거릴 시간 없다! 지금 우리 둘 중 하나는 살아야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여왕은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여왕의 시종은 여왕을 말리려 했으나 여왕은 소리쳤다.

“어서 가거라!”

여왕의 기백에 밀린 시종은 떨리는 손으로 카니벨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마마마!”

카니벨라는 울부짖었다. 그녀의 비명 어린 목소리를 들은 여왕이 말했다.

“꼭 살아남아야 한다!”

그녀는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곧 검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그녀는 끊임없이 팔을 뒤로 뻗으며 어머니를 부르짖었다. 울부짖는 그녀의 몸을 애써 이끌며 시종은 마지막 명을 수행하였다.

“어마마마!”

그녀는 온몸을 비틀었으나 시종의 힘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여왕과 같이 살거나 같이 죽고 싶었다. 혼자서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헤어질 때부터 어머니의 마지막을 예감하였다.

‘싫어!’

그렇지만 감상적일 시간은 없었다. 어떻게든 저들이 시간을 벌고 있을 때 밖으로 나가 구조요청을 해야 했다.

‘어떻게든!’

그녀는 어떻게든 발을 놀렸다. 그러나 매캐한 연기는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자욱하였다. 그리고 사방에서 환청처럼 비명 소리가 들렸다. 매캐한 냄새가 비릿한 피 냄새와 섞여 그녀의 코를 거칠게 찔러댔다.

“으욱!”

그녀는 그 자리에서 구토를 하고 싶을 만큼 역겨움을 느꼈다. 속 안에서 모든 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이 우선이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 유언은 그녀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녀는 눈물을 흩뿌리며 계속 달렸다.

‘어마마마……!’

그녀의 곁에서 달리는 시종은 이미 70대의 노인이었다. 자신의 체력 그 이상의 한계치에 도달한 지 오래였기에 그녀가 자꾸만 일으켜 줘야 했다.

“에이라, 우리 계속 달려야 해. 빨리!”

그녀 역시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달려야 했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주변이 한없이 적막하였다. 그것이 불안감을 더 증폭시켰다.

“먼저 가십시오, 마마!”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같이 가야지!”

“제 상태로는 마마께 방해만 될 뿐입니다. 둘 중에서 더 중요한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마마시지 않습니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

“꼭…… 살아서 돌아와, 꼭!”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떼며 달렸다. 12년이라는 이 짧고 짧은 인생 중에서 가장 절박하고 처절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문이 보였다. 문에 손을 대는 순간, 섬뜩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마마, 어디 가십니까?”

“헉!”

어느새 따라붙은 이라스가 그녀의 뒤로 검을 내질렀다. 그녀는 난생처음 느껴 본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신사처럼 인사를 하며 그녀의 몸에서 검을 빼냈다. 그녀는 그 끔찍한 감각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   *   *

길고 긴 이야기가 끝났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눈을 떠보니 모든 상황은 끝나 있었어.”

그녀가 잠들어 있던 사이, 란시엔 일가는 궁을 장악했다. 뮤일라는 이미 왕이 되어 있었고, 왕비 역시 그것을 찬성했다.

“그때부터 왕국은 개판이 되었고, 지금까지 그건 현재 진행형이지.”

“…….”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지만 카니벨라의 목소리는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라이넨은 말없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너의 상실은 이것이었구나. 참으로 아팠겠구나.

그는 그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버티며 힘들었을 어린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것이 닿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더 이상 그녀가 외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건을 해결해야 할 때였다. 라이넨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말해 준 이야기에서 최대한 단서를 짚어 보았다.

“혹시 란시엔 공주는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어? 아무리 봐도 그 공주가 의심스러운데.”

“우리라고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 그런데 무리가 있어.”

“어떤?”

“그 당시 란시엔은 내 시녀였어. 게다가 멸망한 나라의 공주였지.”

“멸망? 어디?”

“카시르 왕국.”

카시르 왕국은 라소니 왕국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멸망한 나라였다. 그 당시 란시엔은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달라 간청해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 후, 그녀의 시녀가 되었던 란시엔은 그 사건 뒤 갑작스럽게 공주가 되었다.

“어마마마께서 카시르 왕국의 잔당을 다 없애 버렸어. 그런데 란시엔이 어떻게 세력을 모아서 그 큰 습격을 이루어낼 수 있겠어?”

“그건…….”

그 또한 단순한 의혹을 가지고 한 말이었기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었다. 여왕이 어째서 란시엔을 살려 줬는지 그 내막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나라가 멸망당했다. 반란을 할 만한 세력은 이미 다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운이 좋아 그들이 살아 있다고 한들, 움직임이 있다면 그 즉시 왕국의 정보망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역으로 완전히 제거 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카니벨라 또한 바보가 아니었다. 당연히 그쪽을 먼저 파고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증거가 없어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거겠지.

“그래서 의심으로만 남겨 놓고 있어. 이건 이 사건의 진범이 밝혀지면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구나.”

그녀는 그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떠올렸다. 불타는 궁, 매캐한 연기,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겨웠던 피비린내, 섬뜩한 검의 소리까지.

현재의 그녀를 만들어 버린 잔인한 사건. 그녀는 비가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서 그녀의 증언을 열심히 기록하던 그는 입을 열었다.

“고생했어.”

“응?”

“고생했어.”

그저 한마디. 그의 말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버텨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내게 와 줘서 고마워.”

그 이후도 그녀에게는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눈을 뜨니 위치는 바뀌어 있었고, 두려움에 몸부림쳤다. 사람들은 그녀를 냉대했고, 뮤일라 일가의 폭력은 너무나도 아팠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버티는 것밖에 없었다.

그녀는 점점 말라갔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처럼 점점 죽어 갔다. 그런 그녀를 라이넨은 위로했다. 있는 힘껏 안은 품에서 따뜻함이 느껴졌고, 목소리에서는 위로가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펑펑 울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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