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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균열의 시작 (26/93)

25. 균열의 시작

이후, 라이넨은 카니벨라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먼저, 카샨을 불러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어떻게 생각해?”

그의 말에 카샨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솔직히 포기하라고 말해 주고 싶어.”

“왜?”

“왜 지금까지 범인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을까?”

상대는 거물이었다. 레마아치 가문의 정보망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라면 정보를 능숙하게 잘 숨긴다는 뜻이고, 그만큼 규모가 있으면서도 은밀한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만약 이런 자들이 대륙 전체로 퍼져 있다면…….’

이미 왕족을 습격했다는 점에서 저들의 무서움은 증명된 것이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점은 그들이 드러나지 않은 적이라는 점.

그랬기에 카샨은 혹여나 라이넨이 이들을 파고들었다가 화를 당할까 무서웠다. 그에게는 라이넨이 중요했지, 카니벨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부탁을 하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

어차피 그녀는 신변을 위해서라도 그를 떠날 수 없는 처지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냥 거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놈은 그럴 놈이 아니지.’

캬산은 한숨을 쉬었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미쳐 있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지?”

“……그렇다면?”

“그럼 ‘에리칼’을 써.”

라이넨 산하 비밀 정보 조직 ‘에리칼’.

에리칼은 라이넨에 대한 충성심과 정보 수집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 비밀 정보기관이었다. 이 기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라이넨과 카샨을 제외한 아주 소수의 사람들 뿐이었다.

심지어 황제도 존재는 알아도 이들이 뭘 하는 집단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라이넨에게 양팔이 있다면 오른팔이 카샨이고, 왼팔이 에리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에리칼은 그를 단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에리칼은 현재 수장인 뷰이트를 제외하고 모두 출타 중인 상황. 라이넨은 카산이 그걸 알면서도 굳이 그들을 소집하라 권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넌 너를 드러내고 싶지 않을 거 아냐. 그런데 나는 네 측근이잖아. 내가 드러나면 너도 같이 드러날 수밖에 없어.”

레미아치 가문의 정보 수집 능력은 어마어마하지만 결국 그들도 하나의 큰 덩어리이기에 움직이면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라소나 왕국 전 여왕 살해 사건은 미궁에 빠진 사건이고, 이와 관련한 큰 음모가 있는 이상 들키면 위험했다.

라이넨은 안 그런 척하면서도 자신의 사람들을 아꼈고, 카샨은 그의 최측근이었다. 잃으면 뼈아프게 후회할 것이다.

게다가 라이넨은 황태자다. 그가 죽으면 끝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존재하는 자가 라이부스지만 황제가 원하는 마법 계승자는 바로 라이넨이었다.

“좋은 생각이군.”

“조직 만들어서 어디다 써 먹겠어. 다 이런 데다 써먹는 거지. 그리고 에리칼이 이런 성질의 일을 잘하잖아.”

“알고 있으니까 그만하도록.”

“그럼 일단 뷰이트를 불러올게.”

그렇게 말한 카샨은 곧장 한 사내를 데리고 왔다. 남자는 전체적으로 인상이 평범했다. 입을 가린 복면을 벗은 그가 공손한 자세로 라이넨에게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그래, 뷰이트.”

뷰이트는 에리칼의 수장이었다. 카샨이 공식적으로 라이넨을 보필한다면 그는 음지에서 필요한 정보들을 제공하였다. 어둠의 루트를 이용해야 할 때 부르기 좋은 인물이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하명하시옵소서.”

“넌 지금부터 6년 전에 일어난 라소니 왕국 화재 사건에 대한 정보를 찾도록 하여라.”

라소니 왕국 화재 사건. 6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인해 라소니 왕국의 여왕이 죽고 공주가 중태에 빠졌었다. 분명히 사인이 방화인 만큼 범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특정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레미아치 가문에서 수집한 정보로는 부족한 것입니까?”

“아무래도 우리 가문에서 수집할 수 있는 정보는 양지의 정보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우리 사정상 뒷골목이나 이런 곳에서 정보를 구할 수도 없잖아?”

“……맞는 말이군요.”

뷰이트는 한참 동안 생각을 하더니 라이넨에게 말했다.

“기한은 언제까지입니까?”

“정해진 기한은 없다. 하지만, 조그마한 단서라도 생기면 즉시 내게 보고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뷰이트는 라이넨에게 부복하고 퇴장했다. 라이넨은 자신의 곁에 있던 카샨을 보며 말했다.

“마침 잘되었어. 네게 시키고 싶은 게 있었거든.”

“시키고 싶은 거?”

“넌 지금부터 루카민이라는 기사에 대한 행방을 찾아라.”

“라소니 왕국 1 기사단장 루카민 타키라이? 그 사람 살아 있었어?”

“그래. 비가 내게 직접 이야기하였다.”

<루카민은 라소니 왕국에 돌아가서 조사하기로 했어. 그리고 그 내용을 공유하기로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연락이 끊겼어. 미안한데 찾아 줄 수 있을까? 부탁할게.>

카샨은 놀랐다. 이미 죽은 사람인 자가 살아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가문의 정보망까지 뚫다니. 그러나 라이넨이 살아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루카민의 생존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도.

“지금 당장 가문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기사의 행방을 찾겠어.”

“그래, 수고했으면 좋겠군.”

“우리 가문의 정보력을 얕보지 마.”

카샨은 피식 웃었다. 라이넨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대꾸하였다.

“부탁하지. 기대하겠어.”

한편, 뷰이트는 그 즉시 에리칼 단원들에게 가서 화재 사건의 전말에 대해 조사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카샨으로부터 레미아치 가문이 수집한 그 당시 자료를 받았다.

“흠…….”

그는 직감적으로 이번 조사가 길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게다가 어떤 경로로든 란시엔 공주와 아스트로 백작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한참 동안 자료를 읽던 뷰이트는 현재 남아 있는 소수의 인원들에게 명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이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들에 대해 조사하도록. 뒷골목과 가까울수록 좋다.”

라소니 왕국 전체를 조사할 수 있으면 그게 가장 좋은 일이지만 그렇게 하게 되면 은밀하게 한다고 해도 눈에 띌 수도 있다. 아무리 제국이 대륙의 패자(霸者)라고 하지만 이것은 라이넨 개인의 일이었다. 외교 분쟁으로 번지면 곤란했다.

그랬기에 더 조심해야 했다. 그리고 작은 것부터 타고 올라가다 보면 반드시 큰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전하께서 왜 6년 전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니벨라의 출신에 대해 아는 사람은 라이넨과 카샨 단둘뿐이었다. 그랬기에 뷰이트는 어째서 라이넨이 예전에는 관심조차도 가지지 않던 라소니 왕국의 사건을 캐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주군이 원하는 것이라면 해야 한다. 그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리고 조사가 시작되었다.

*   *   *

‘어머니를 죽인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한 발자국 나아갔구나.’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카니벨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사는 길어져 결국 한 해를 넘기게 되었다. 그녀는 열아홉 살이 되었다.

예전의 그녀는 과연 자신이 이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물론 지금은 너무 안전해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사실조차도 희미했지만.

그녀에게는 그 어느 것보다도 소중한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될 예정이었다.

떨렸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던 것. 그래도, 그래도, 그는 이 사실을 기뻐해 줄까?

“라이넨.”

그녀는 잘 준비를 하고 있던 라이넨에게 다가왔다. 사랑이 깊어짐에 따라 둘은 새벽까지 달밤 체조를 하곤 했다.

그렇지만 어느 날부터 그녀는 부쩍 피로감을 많이 호소했고, 시도 때도 없이 잠들었다. 그래서 그는 부쩍 그녀의 잠이 많아졌다는 소식에 밤마다 괴롭히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상태였다.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풋! 아니야. 난 건강하다고.”

“그럼 무슨 일인데?”

라이넨에게 있어 카니벨라는 전부였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의 사소한 몸 상태 변화에도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그게…….”

이내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우물쭈물하며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혹시라도 진짜 몸이 좋지 않은 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무슨 일이…….”

“나 회임했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던 그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의 폭탄선언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시, 싫어?”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너무 놀라서 그런 것이다. 너무 놀라서. 사랑하는 그녀의 몸에 우리의 결실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그리고 그녀를 만난 후 자꾸만 밀려오는 행복에 기분이 아찔해서.

그래서 그런 것이다.

그는 너무나도 기뻤다. 만족감, 행복감이 온 전신에 가득 찼다. 그는 그녀를 안고 한참을 빙빙 돌다가 침대 위에 누웠다. 너무 돌아 어지러웠지만 그것보다 행복함으로 심장이 쿵쿵 뛰었다.

“행복해.”

“앞으로 우린 더 행복해질 거야.”

라이넨은 속삭였다. 그녀는 그 말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의 달콤한 말에 그녀는 정말 앞으로는 행복만이 가득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라이넨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그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그걸 깨달은 것은 카샨이 가져온 공문 하나 때문이었다.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카샨은 빨리 라이넨에게 급보를 전하기 위해 국장으로서의 체면 따위 집어치웠다. 지금은 이걸 알리는 것이 더 급하다.

“전하를 알현하러 왔다.”

그때, 라이넨은 한창 집무실에서 서류를 결재하던 도중이었다. 그는 헉헉거리는 카샨을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평소 지독하게 뛰기 싫어하는 카샨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지?”

“급보야.”

“급보?”

“그 루카민이라는 기사, 죽었다.”

“……뭐?”

그는 카샨이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카샨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리 내.”

그리고 그는 서류의 내용을 꼼꼼하게 읽었다.

“왕비 암살?”

“죄목은 그러한데 느낌이 이상해서 찾아보니 왕비는 독살당했어. 그리고 그 당시 그 기사는 검 말고는 소지한 것이 아예 없었지.”

“누명이군. 누가 의도적으로 죽인 거야.”

“맞아.”

“도대체 누가…….”

*   *   *

어둠 속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그리고 한 사람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그 사람은 화가 나서 속삭였다.

“이놈이 감히 우리의 정체를 캐내려고 들어? 반드시 파멸시켜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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