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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오해 (27/93)

26. 오해

라이넨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사탕을 먹는 것 같았고,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이런 행복이 자신에게 왔다는 것이 좋으면서도 불안했으나 1년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그래서 믿었다. 이제는 행복해질 것이라고. 어마마마와 형님께서 자신의 행복을 허락해 주셔서 다행이라고.

“무슨 일이지?”

그러나 그 행복의 작은 불안을 느낀 것은 카샨이 가지고 온 한 급보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달리기는커녕 걸어 다니는 것도 싫어하는 카샨이 급하게 달려온 것을 보며 그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급보?”

“그 루카민이라는 기사, 죽었다.”

“……뭐?”

그는 밀려오는 감정의 풍랑을 맞아야 했다. 손이 떨렸다. 이걸 카니벨라에게 어떻게 알려야 하지라는 생각보다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게 말해.”

그는 일단 그녀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녀에게 있어 루카민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그 죽음에 그녀가 충격을 받을 것은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예민한 상황에 그런 슬픈 소식을 전했다가 그녀가 어떻게 될지 두려웠다.

그러나 후에 그는 그것을 후회했다. 만약 내가 진즉에 그 사실을 이야기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균열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   *

무슨 꿈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내용이 끔찍한 것이라는 것이다.

“헉!”

카니벨라는 발작하듯 눈을 떴다. 옆에 누워 있던 라이넨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마치 모든 것을 포용해 주는 듯.

“괜찮아.”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그녀를 안심시켜 주었다.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녀는 살짝 한숨을 쉬며 배를 쓰다듬었다.

“내가 갑자기 깨서 아이가 놀란 건 아니겠지?”

“우리 아이라면 그 정도는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뭔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지만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겼다. 그저 지금 자신을 감싸고 있는 이 불쾌한 기분을 없애는 것이 더 급했다.

‘잠이 안 오네.’

그녀는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잠을 자고 있는 자신의 남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그녀의 전용 도서관으로 향했다. 서책의 냄새가 그녀를 안정시켰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본래 이런 상황이 생긴다면 냅다 검을 차고 나가 마구 휘둘렀을 텐데. 그러나 지금은 그럴 상황도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라이넨은 그녀가 검을 쓸 줄 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은연중에 비밀이 되어 버렸다. 그러했기에 그녀는 검을 쓰지 못하게 된 이후로 책을 보며 번뇌를 풀었다.

팔랑거리며 넘어가는 책을 보며 안정감이 들었다. 시종들이 지속해서 차를 따라 주고, 쿠키를 가져왔다. 결국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이제 돌아가자.”

“네.”

그녀가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던 에오라와 레이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에오라는 묘하게 표정이 좋은 레이의 얼굴을 갸웃거리며 쳐다보았다. 레이는 그런 에오라의 시선을 능글맞은 표정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황태자비궁은 묘하게 어수선했다. 시끄러웠고, 복잡했다. 그런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 카니벨라로서는 묘하게 짜증도 나면서 어리둥절했다.

“그게 진짜야?”

“내가 사실 아닌 이야기하는 거 들어 봤어?”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왕족이라도 경비는 단단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 기사가 괴물인 거지.”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 그녀는 소문을 물어주는 시녀인 에이코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왜 자신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전하, 소문 들으셨어요? 라소니 왕국의 왕비가 살해당했대요!”

“……뭐라고?”

자신을 지옥에서 방치해 놓고 자기 혼자 회피만 했던 아비. 그녀의 오랜 아픔의 방관자. 비겁하게 뮤일라 일가의 옆에 붙어 현실을 외면하던 자. 여기 온 이후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자.

그런데, 그런 아비가 죽었다고? 그녀는 허탈해졌다. 그 인간이 그렇게 허무하게 갈 사람이었다면 그녀가 진즉에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조소하며 갈 곳을 잃은 아비에 대한 증오를 감정 깊숙이 가라앉혔다.

그러나 놀라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범인이 누구더라…… 그…… 아, 되게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평소라면 에이코의 그런 행동을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들으면…… 뭔가가 무너질 것 같은 이유.

“내가 누군지 알아. 그 루 머시기 기사였어.”

수다쟁이 에이코를 중심으로 갑자기 시녀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현재 대륙을 강타한 사건에 대해 흥미롭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그녀는 ‘루’라는 이름이 나오자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안 돼. 말하지 마. 말하지 말라고!

그녀는 귀를 막고 싶었다. 제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해 줘. 그러나 하늘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아! 루카민! 루카민이라는 기사가 범인이래요!”

“근데 그 기사 사형당했다며?”

“……!”

루카민! 1년 전에 헤어진 이후로 소식을 알 수 없었다. 행방을 조사하였으나 알지 못했었는데, 그런 그가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소식을 전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만큼은 부정하고 싶었다.

루카민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왜? 어째서! 살아서 나와 만나기로 했잖아!

“……그게 사실인가?”

그녀는 마음속에서부터 불어닥치는 울분과 절규를 애써 누른 채 시녀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떠들기 바쁜 시녀들이 그걸 눈치챌 리가 없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그렇게 시끄러운 곳의 중심에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

루카민은 어머니가 죽고, 자신을 방치한 아버지와 폭력을 가하는 다른 가족들 틈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는 단순한 부하 이상이었다. 어떨 때는 스승의 역할을, 어떨 때는 기사의 역할을, 어떨 때는 아버지의 역할을 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그녀가 기대했던 일은 이게 아니었다. 당당하게 함께 범인을 처단하고 함께 사는 것.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시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게 사실이냐고!”

황태자비로서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는 대체로 친절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녀를 따르게 되었고, 그녀가 보여 주었던 위압감을 잊었다. 그런 그들은 오랜만에 그녀의 기세를 느끼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 그게 저도 라소니 왕국에 시녀로 있는 제 친구한테 들은 것인데…….”

시녀의 말은 이랬다. 7년 만에 루카민 타키라이가 라소니 왕국에 나타났다. 그러나 왜인지 모르지만 왕비를 시해했다. 그리고 바로 붙잡혀 여러 가지 죄목으로 사형을 당했다. 그런데 이 사형에…… 라이넨이 개입을 했다는 것이다.

하루빨리 카니벨라가 모든 것을 잊고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 뮤일라 여왕과 합의해 루카민을 죽였다고.

그럴 리가 없다. 말도 안 된다. 라이넨은 자신과 이것을 가지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아는 한 가장 신용이 있는 사람이었다. 황태자라는 직책 때문에 억지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약속을 지키는 그런 올곧은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며칠 전부터 그가 자신의 비밀 조직을 통해 그 사건의 진실을 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믿을 수 없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루카민이 이미 죽었더라면 그가 말을 해 주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한꺼번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버린 그녀의 머리는 더 이상 정보를 수용할 수 없었다.

“아…….”

눈이 캄캄해지고 몸이 꺾였다. 모든 것이 일시에 흐려졌다. 누군가가 그녀를 부르는 것 같았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

그렇게 그녀는 무너져 내렸다.

라이넨은 매우 바빴다. 평소처럼 열심히 서류를 결재하던 중, 긴급회의가 생겼다.

“무슨 일이지?”

“살인범이 잡혔습니다.”

어느 날부터 수도에서 연쇄 살인이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평민 여성들이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점점 넓어졌다. 여성, 아이, 노인과 같은 약자를 넘어서 남성, 심지어 귀족들까지 희생자가 되었다.

흉흉함이 수도를 감돌았다. 활기찼던 밤은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기 바빴다. 거리에서는 생기가 사라지고 싸늘함만이 감돌았다. 백성들은 불안에 떨며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으나, 희생자의 단위가 두 자리를 넘어서자 궁에서도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황제의 명에 따라 대대적으로 수색 작업을 감행하였으나 범인의 행적은 묘연했다.

그런데 그렇게 그들의 속을 썩이던 범인이 시스티아 왕국 국경에서 붙잡힌 것이다.

그 말에 그는 결재하고 있던 서류를 접고 시종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재빨리 시종은 회의장으로 그를 안내했다. 회의장에는 여러 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곧 황제도 등장했다.

“회의를 시작하겠다.”

“시스티아 왕국 근처에서 잡힌 만큼 그쪽에서 철저하게 견제하고 있습니다.”

“사정을 설명하였으나 저들이 너무 막무가내로 나오고 있습니다.”

하필이면 범인이 잡힌 장소가 시스티아 왕국의 국경선에서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한쪽 발이 이미 국경선을 넘었기에 처벌하기가 애매해진 것이다. 루미니르 제국에서 사형시킬지, 시스티아 왕국에서 처리해야 할 것인지.

황제는 이런 외교적인 문제가 너무나도 골치가 아팠다. 이때다 싶어 왕국에서는 제국이 살인범을 풀어놨고, 그 살인범이 넘어올 뻔했으니 처벌도 자신들이 하고 보상금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었다. 그런 식으로 빚을 지고 우위에 서겠다는 건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넘어갈 정도로 제국이 허술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때, 라이넨이 한 가지 묘수를 냈다.

“그냥 저들이 원하는 대로 들어줍시다.”

그리고 살인범의 신원을 조작해서 시스티아 왕국 출신으로 만들어 버리자고.

“그건 너무나도 위험한 발상입니다!”

“왕국 측에서 알아차릴 것입니다.”

귀족들은 너무 위험한 방법이 아니냐고 반대했지만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에서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정보 조작쯤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모든 정보가 모여드는 레미아치 가문이 있다.

“좋은 생각입니다.”

“저들을 궁지에 몰기 참으로 좋은 수단인 것에 틀림이 없습니다.”

4대 공신 가문이 저리 이야기하자 다른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시스티아 왕국을 궁지에 몰아넣겠다고 하는 건지 기대가 되었다.

‘어디 망신이나 당해 봐라!’

귀족파들은 가만히 동의하면서 라이넨의 표정을 살폈다. 저 자신감 있는 표정이 언제쯤 떨어질까 궁금했다. 그들은 하루빨리 라이부스를 저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욕망을 가만히 응시하며 라이넨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들의 적나라함이 너무나도 지겨웠고, 그를 지치게 만들었다.

‘정말 지긋지긋하군.’

빨리 그를 안정되게 하여 주는 여자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달이 떠 있는 것을 보며 그는 혼자서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생각하며 미안했다. 하루 만에 너무 많은 일들이 터져 정신이 없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후속처리 및 시스티아 왕국과의 협상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살인범의 거취 결정 및 형량, 그리고 외교 문제 해결을 위해 밤낮없이 회의를 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가 부린 수작은 통했었지만 왕국의 의심은 피할 도리가 없어 그 사실을 입증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 수많은 서류가 오갔고, 그가 그 생각을 떠올린 당사자였기에 모든 것을 총괄 및 지휘해야 했다.

일이 너무 많아 카니벨라를 보기는커녕 생각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 잠은 집무실에서 쪽잠을 자며 버텨야 했고, 밥도 앉아서 해치우듯 먹어야 했다. 눈을 뜨면 산을 이루는 서류 때문에 졸음을 참아가며 결재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눈가가 거뭇해져 가는 그를 보며 측근들은 어떻게든 인력을 짜내 빠른 처리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와중에 에리칼에서 찾아온 자료들도 쌓여 갔다. 그는 어떻게든 초인적인 힘으로 일을 했고, 해결에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생명이 움트고 얼어붙은 밭이 촉촉해지는 봄이 되었다.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 그러나 그사이 그녀는 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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