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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소문 (28/93)

27. 소문

아직은 찬바람과 함께 눈이 내려오는 날.

쾅!

문짝이 부서질 듯 열리고 복면을 쓴 한 남자가 뛰어오듯 들어왔다. 모노클을 쓰고 있던 금발 머리의 젊은 남성이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지? 큰일이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즉시 처분하겠다.”

남성은 읽고 있던 서류를 책상에 쾅 내리치며 말했다. 그 기세에 복면인이 움찔하며 품에 넣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박한 정보가 들어와서…….”

그는 무릎을 꿇고 있는 복면인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손에 있던 서류를 거칠게 빼앗았다. 그리고 안경 너머로 비치는 글자를 바라보다 걸리는 대목을 읽었다.

[현재 조직의 정보가 일부 새어 나가는 것으로 추측. 키워드는 7년 전 여왕 살해 사건]

[조사자: 라이넨 폰 루미니르]

[신분: 루미니르 제국의 황태자]

남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서류를 다시 보고 또 보았다. 그러나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남자는 종이를 구기며 마치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넨 폰 루미니르가 7년 전 라소니 왕국 여왕 살해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한다고? 도대체 왜?”

이미 7년이 지났다. 사람들의 머리에서 사라지고 있고,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사건을 왜 황태자라는 인간이 조사하고 있는 것인가? 그 당시 사건이 황태자와 관련이 조금이라도 있었나?

남자는 한참 동안 생각했으나 도저히 이 사건과 황태자와의 연관성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위기다. 무슨 이유 때문에 황태자가 이 사건을 파고드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이 까발려지면 끝이다.

식은땀이 났다. 그 자신은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사건이 전말이 알려지면 조직은 붕괴되고, 대장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안위가 어떻게 되는 것에는 별로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장이 위험해진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대장은 남자의 인생을 바꾼 은인이고, 대장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었다.

“간부 회의를 소집해라. 안건은 ‘조직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인간의 제거’다.”

남자의 말은 즉시 간부들에게 전해졌고, 간부들은 즉시 아지트로 모여들었다.

“회의를 시작한다.”

*   *   *

카니벨라는 심하게 앓았다. 약 일주일 동안 앓고 일어나자 시녀들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 느낌.

“무슨 일이지?”

다 갈라져 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말에 에오라가 울먹이며 말했다.

“저, 전하…… 흑흑.”

“말해.”

“그, 그게 전하께서…….”

“……황손을 잃으셨습니다.”

황궁의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그 말에 납작한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느꼈던 또 다른 생명은 어디로 갔으며 행복은 어디로 갔을까……. 그것은 참으로 그녀에게 있어서 어울리지 않았던 걸까…….

한참 동안 멍하게 앞을 바라보던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입을 애써 움직이며 말했다.

“모두…… 다 나가도록.”

그녀는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일어났던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생각이 났다. 왕비의 죽음과 루카민의 죽음과 그에 관여한 라이넨…….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고, 부정하고 싶었다. 루카민이 죽었다니……. 왜? 어째서? 어떻게?

<우리 둘 다 반드시 싸움에서 승리하여 다시 만나자.>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거짓말로 만들어 버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충성스러운 기사……. 정말 충격이었다.

그리고 라이넨이 그 일에 관여하였고, 그 사실을 숨겼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유일한 사랑, 휴식처, 미래인 그가 어떻게!

그녀는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감당하기 힘들었고, 지금 당장 다시 누워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행복은 손에 잡힌다 싶으면 다시 멀어졌다.

“흑…….”

그녀는 홀로 남은 텅 빈 방에서 울었다. 흐느끼고 싶었으나 오래전부터 그것을 막고 살았던 그녀에게는 그 작은 해소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이불에 눈물만 뚝뚝 떨어졌다.

그것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녀는 이윽고 손으로 눈물을 훔친 다음 일어났다.

‘난 끝까지 라이넨을 믿겠어. 본인이 직접 시인하기 전까지는 믿지 않을 거야.’

“전하, 레이입니다.”

“들어오도록.”

그녀는 눈물을 다 닦아 내고 레이를 맞이했다. 레이의 손에는 그녀가 주문하지도 않았던 차가 있었다.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지?”

“전하의 심신에 좋을 것 같아 준비해 보았습니다.”

평소, 에오라보다 시종일관 차분한 레이에게 좀 더 호감이 있었던 그녀이기에 생각지도 못한 호의에 기분이 좋아졌다. 차의 색깔은 누리끼리해서 다소 이상했지만, 원래 약이라는 건 다 맛이 없기에 아무 의심 없이 마셨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살짝 초점을 벗어났던 눈동자는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곧장 가벼운 실내용 드레스로 치장한 그녀는 방으로 나갔다. 궁은 아직도 어수선했다. 그녀의 유산 소식이 워낙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전하…….”

“괜찮으세요? 흑흑.”

자신의 일도 아니 건만, 시녀들의 눈빛에서 연민이 느껴졌다. 그리고 일부 시녀들은 울먹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괜찮다.”

그녀는 그들의 걱정 어린 표정에 애써 웃어 주었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유산된 아이 역시 충격적이었지만, 그것보다는 루카민의 죽음과 그 죽음에 라이넨이 관여했다는 것이 더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루카민의 동생인 ‘루시아’로 위장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그래도 이제는 어느 정도 드러낼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녀가 이 사실을 알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 수상하게 여길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그 즉시 궁의 사용인들을 통해 소문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루카민의 사형 소식과 거기에 관여한 사람, 그리고 라소니 왕국과 라이넨의 관계까지. 처음에는 잘 모르겠다고 하던 사람들은 그녀의 유도 질문에 걸려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토해 냈다.

“글쎄요, 그 기사 죄목은 반역이라고 했어요.”

“누구 명령으로 그 왕국 왕비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되게 잔인하고 잔악해서 치밀하게 이번 암살을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황태자 전하께서 연관되어 있다고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득이 없으면 실행하지 않으십니다. 타국의 일에 신경 쓰실 만큼 아량이 넓으신 분이 아닙니다.”

“전하께 그럴 시간이 있으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종종 전하를 독점하고 싶어 여기 붙잡아 놓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어디서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전하, 전 진짜로 잘 모르겠습니다.”

“…….”

사람들의 증언은 가지각색이었다. 직접 움직였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에 잠긴 사이 레이가 다가왔다.

“전하,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믿고 싶지 않은 일이 있어.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려고 했지.”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진실이 됩니다.”

레이는 그녀에게 무엇을 믿고 싶지 않냐 묻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하고 싶은 것이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하께서 입증하고 싶은 진실이 진실임을 바랍니다.”

레이는 그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왠지 레이에게 이유 모를 믿음이 생겼다. 입을 열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군…… 혹시 레이 자네가 이 일을 대신 해 줄 수 없겠는가?”

그녀는 그리고 자신이 사실은 이번에 사형당한 라소니 왕국의 기사 루카민의 여동생 루시아라고 하며 루카민의 죽음과 그리고 라소니 왕국과 라이넨의 사이에 대해 알아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카샨에게 부탁하는 것이 제일 좋기는 하지만 그는 라이넨의 최측근이면서 동시에 라이넨이 시스티아 외교권으로 인해 자리를 비우게 되자 라이넨이 기존에 하던 일을 맡아 진두지휘했기 때문에 매우 바빴다.

게다가 늘 그녀를 못마땅하게 쳐다봤기에 부탁하기 망설여졌다. 아마 이런 부탁을 한다면 옳다구나 하면서 정보를 조작해서 줄 가능성이 높았다. 카샨 정도면 그런 위치에 있는 인물이기도 하고, 줄곧 그녀가 그의 곁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눈치를 보였으니까.

결정적으로 시스티아 왕국 건 때문에 황태자궁 모두가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라이넨을 찾으러 가도 피곤한 얼굴의 카샨이 나타나서 지금은 바쁘니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그녀는 한숨이 나왔다.

“…….”

계속되는 문전박대. 결국 여러 가지 일이 맞물려 그녀는 요즈음 라이넨의 옷자락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오해를 풀 수 있던 타이밍은 어긋나 그녀의 의심과 불신은 커져 갔다. 그리고 설상가상 레이가 알아 온 정보들은 그녀의 의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게 사실인가.”

“네. 정보 상점에서 알아 온 정보입니다.”

종이를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레이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티 나지 않게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루카민 타키라이 라소니 왕국 왕비 암살. 그 뒤에 특산물 교역권을 가지고 루미니르 제국과의 거래가 있었음. 추진자는 라이넨 폰 루미니르]

“……이건 어느 정보 상점에서 나온 이야기지?”

그녀는 짓씹듯 입을 열었다. 정말로, 이 모든 것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최근에 떠오르고 있는 신흥 상점입니다. 아무래도 레미아치 가문은 황실에 누가 되는 자료를 공개할 것 같지는 않아서 일부러 다른 곳을 노렸습니다.”

“……그렇군.”

그녀는 정말로 믿고 싶지 않았다. 다 헛소문이라고, 라이넨이 직접 와서 해명해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따끔하게 말해 주기를 바랐다. 자신이 이런 짓을 할 일이 전혀 없다고.

그러나 그런 믿음에 크게 뒤통수를 치는 결과이지 않는가.

“허…….”

분노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끔찍한 기분이 온몸을 잠식하며 살기가 감돌았다. 아직 다 회복되지 못한 몸이 비명을 질러댔으나 그런 것은 배신감에 의해 갈가리 찢긴 그녀의 마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네가 그럴 수가 있어.

그녀의 마음에 순식간에 사랑의 꽃이 꺾였다. 그리고 증오의 꽃이 뿌리를 깊게 내리고 피어올랐다.

레이는 자신을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살기에 몸이 짓눌리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황태자비한테서 이런 힘이?

“진정하십시오, 전하.”

레이는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녀를 진정시키며 다시 한번 그 예의 차를 끓여 주었다. 그녀는 쌉싸름한 맛이 나는 차를 오랫동안 마셨다. 마치 차가 그녀의 기분을 알아주는 것 같아 마음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눈이 일시 동안 흐려졌다 다시 돌아왔다. 레이는 그런 그녀의 눈을 잠시 쳐다보다 이내 다시 말을 걸었다.

“진정이 되셨습니까?”

“그래.”

다소 진정이 되자 그녀는 자신의 거취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라이넨과의 혼인은 그녀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라소니 왕국과 라이넨 사이에 어떤 모종의 관계가 있다면 정체가 들통날 위험이 있었다.

‘……몸을 숨기자.’

결국 그녀의 선택은 탈출하는 것이었다. 루미니르 제국에 몸을 의탁하기로 결정한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어 봤자 위험해질 뿐이다.

그 길로 결정을 마친 그녀는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는 평소 황태자비가 식사 시간 이외에는 자신과 마주치려 하지도 않는데 왜 굳이 지금 같은 늦은 시간에, 그것도 갑작스럽게 찾아왔는지 의문이 들었다.

“무슨 일이냐.”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습니다. 황제 폐하, 제게 요양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황제 또한 그녀가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유명한 소식이었기도 하고 황태자비궁의 시녀들이 궁 주인과 같이 시름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황후도 그 소식을 듣고 은연중에 걱정하고 있었고,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요양인 데다가 라이넨이랑 같이 가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그것도 보지도 않고 간다고? 황제는 찝찝함을 느꼈다.

게다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뭔가 달랐다. 예전보다 좀 더 어둡고 습한…….

그러나 황제는 애써 묻지 않았다. 그리고 왠지 모를 실망감이 들었다. 결국 이 아이는 라이넨의 곁에서 버티지 못한 것이다.

‘네가 데리고 온 아이는 이것밖에 되지 못한 것이다.’

황제는 라이넨을 사랑했다. 라이넨은 황제와 전 황후 사이에서 난 유일한 흔적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줄곧 황태자비라고 데리고 온 그녀가 못마땅하기는 하였으나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라서 괜찮았다.

그러나 이 아이는 떠나려고 하였다. 이 황실에서, 라이넨을 버리고. 황제는 그게 못내 화가 났으나, 자질이 없는 아이를 황실의 차기 안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황제에게 있어서 하나의 명분이 되었다. 그녀를 쫓아낼 만한 명분. 아무리 라이넨이 입실롯 후작을 통해 그녀의 정통성을 만들어 줬다 하더라도 그녀는 그에게 정치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아이였다.

그렇기에 황제는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귀족파와 황태자파는 지속적으로 대립해 오고 있었다. 아무리 라이부스를 황태자 자리로 넣지 않겠다고 지속적으로 강조해도 저들은 들으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런 그녀의 제안은 황제에게 매우 안성맞춤이었다.

‘역시 모두가 다 똑같군.’

그녀는 그런 황제의 속셈을 꿰뚫어 봤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비웃을 여력도 없는 데다가 어차피 곧 다른 대륙으로 넘어갈 속셈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착해 새롭게 다시 어머니를 죽인 범인에 대해 추적할 것이다.

‘루카민을 잃었어. 이제 남은 사람은 나밖에 없어…… 진실을 찾을 사람이…….’

“언제 갈 생각이냐?”

“지금 당장 갈 것입니다.”

“허락하마.”

“폐하의 은덕에 감사합니다.”

그렇게 그녀는 요양 전에 간단히 챙겨야 할 것들을 챙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추진 아래 요양지로 떠났다.

라이넨이 돌아오기 이틀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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