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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갈등 (2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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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갈등

카니벨라가 향한 곳은 에이르 영지였다. 라이넨과 갔던 곳과는 반대쪽에 위치한 곳으로 다소 추운 날씨 때문에 온천이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탈출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전하, 저도 따라가면 안 될까요?”

“아니다, 거기 있는 시녀들의 시중을 들 터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에오라는 끝까지 그녀를 따라가고 싶어 하던 눈치였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인원이 늘어나면 탈출에 번거로울 뿐이다.

그리고 마차는 달리고 달려 영지에 도착했다. 수도와는 다른, 외국과도 같은 이국적인 풍경이 눈에 띄었지만 아무 상관 없었다. 그 대신 사람들의 옷차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혹여 사람들 틈에 숨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금발 머리에 벽안이 많군.’

혹시나 용모가 눈에 띌까 걱정했지만 그런 우려는 덜었다. 우선 그녀는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저택을 잠깐 둘러보고, 산책을 하는 척하며 저녁에 식사를 했다. 그리고 맛있다는 핑계로 간단한 간식들을 챙겨 미리 가지고 온 가방에 넣었다.

‘아무도 없군.’

그녀는 라이넨이 줬던 목걸이를 빼 화장대에 가지런히 놔두었다. 그리고 거울을 보자 이제는 다소 낯선 금발 머리와 푸른 눈이 드러났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두툼하게 입은 평상복에 허리에는 단검들을 차고 뒤로 가방을 멨다. 그리고 안의 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지도, 옷, 먹거리, 패물 등 있어야 할 것들은 다 갖추어졌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살금살금 밖으로 나온 그녀는 마구간에서 말 한 마리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조용하게 저택을 나와 기민하게 말에 올라탔다.

“이랴!”

그녀가 탄 말은 순식간에 옆 마을로 넘어갔다.

*   *   *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시스티아 왕국 건에 매달려야 했던 라이넨은 너무나도 피곤했다. 그렇지만 피곤함보다는 카니벨라가 더 보고 싶었다.

“전하, 쉬셔야 합니다.”

그는 빨리 그녀에게 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반드시 자야 한다는 황궁의의 강력한 의견에 하루 동안 죽은 듯이 잠만 자야 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방에 박혀 강제로 보양식을 먹으며 요양을 해야 했다.

그게 불만이기는 했으나, 역시 쉬고 나니 몸은 가벼워졌다.

“이제 좀 덜 피곤하군.”

굳은 몸을 풀며 라이넨은 카니벨라를 찾아 그녀의 궁을 찾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궁은 텅 비어 있었고, 시녀들만이 어수선하게 떠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표정이 굳었다. 어디로 간 거지?

“전하…….”

시녀들은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한편, 질책하고 있었다. 왜 카니벨라가 힘든 시기에 함께해 주지 못했냐고.

“…….”

그는 그녀의 유산 소식을 그때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루카민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황제 폐하께 간다.”

그는 황제에게 갔다. 그는 한 달 동안 너무나 고생하여 아내를 보고 싶으니 그녀가 있는 곳에 데려다달라고 했다. 그리고 안 가르쳐 주면 황태자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을 것이라 협박했다.

그런 아들의 억지 아닌 억지에 황제는 할 수 없이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황태자비가 요양을 핑계로 떠났다는 말을 차마 그에게 할 수는 없었기에 전혀 반대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카슈 영지라…….’

그렇게 그가 복도를 거닐고 있을 때 한 미성의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나라면 카슈 영지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

“……누구지?”

아무리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버젓이 앞에 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그는 최근 자기의 실력이 너무 형편없음을 체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에게 다가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을 지닌 소녀인지, 소년인지 알 수 없는 꼬마는 그의 표정에도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꼬마에게 말했다.

“내가 궁의 모든 사용인을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너같이 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특별한 기술이 있었다고 알아 두면 된단다. 그리고 그건 영업 비밀이지.”

“설마 마법은 아니겠지?”

그는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꼬마는 그런 그의 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넌 지금 내 정체를 궁금해할 때가 아니란다. 네 사라져 버린 아내를 찾아야 하지 않느냐?”

그는 꼬마가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어 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기묘한 생김새에 기묘한 말투를 가진 정체불명의 어린아이. 그의 목구멍에서 침이 불길하게 넘어갔다. 그런 그의 모습을 꼬마는 싱긋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

그는 오랜만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기색을 애써 누르고 말했다.

“……아까 본인이라면 카슈 영지로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나…….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란다. 네가 찾고 있는 아이는 에이르 영지로 갔다. 그리고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기 위해 열심히 가고 있고.”

“……!”

라이넨은 꼬마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뭐? 카슈 영지가 아니라 에이르 영지? 그리고 왜 다른 대륙으로 간다는 거지?

머릿속이 꼬였다. 꼬마의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한참 동안 그 눈을 쳐다보았으나 일말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의문이 들었다. 왜 황제는 자신에게 거짓을 고하였으며 그녀는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것일까?

“그건 네가 그 아이를 만나 직접 물어보거라.”

그리고 꼬마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의 몸이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빛에 휩쓸려 사라졌다.

카니벨라는 말을 타고 달리고 달려 항구 도시에 도착하였다. 시간이 부족하여 일단 다른 왕국으로 넘어간 후, 타 대륙으로 가는 배를 탈 생각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표를 사고, 먹거리를 보충하였으며, 거리를 구경했다.

“잠시 표를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배에 순조롭게 올라탔다. 그녀는 내심 불안했으나, 다행히 아무도 들이닥치지 않았다.

“출발합니다!”

선원들의 재빠른 준비로 배는 예상 시간보다 빨리 출발했다. 카니벨라는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배가 바다를 가르는 모습을 갑판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좋군.”

날씨는 맑았고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도착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제발 이대로만 흘러갔으면.’

그러나 그때, 바람이 불었고, 누군가 그녀를 붙잡았다. 놀라서 돌아보자 라이넨이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뿌리치려 하였지만 그가 너무 꽉 붙잡고 있는 데다 이미 바람으로 인해 몸이 떠오른 상태였다.

“이것 놔!”

그러나 순식간에 그녀는 그와 함께 어두운 통로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바람이 멎었다. 눈을 뜨자 웬 낯선 곳이었다.

“……도대체 왜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야.”

“무슨 소리야.”

“절대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도대체 왜! 나한테서 왜 모두가…….”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동시에 무너졌다. 그녀는 문득 라이넨이 혼인 계약서를 쓸 때 ‘절대 떠나지 말 것’을 조건으로 걸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낼 수 없다. 애초에 자격이 없다. 애초에 계약을 먼저 어긴 것은 그다. 그녀의 신변을 위험에 빠뜨렸고,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아낸 게 아니라 그녀가 아끼던 사람을 죽였으니까.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말을 하는 그런 사소한 행위조차 에너지 낭비였다. 그런 그녀의 침묵에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종을 흔들었다. 그 소리에 시녀가 들어왔다.

“황태자 전하.”

“오늘부로 황태자비를 징벌의 궁에 가두어라. 사유는 ‘황족에게 거짓말을 고한 죄’이다.”

“예?”

시녀는 당황했다. 요양을 갔던 황태자비가 갑자기 돌아온 것도 모자라서 징벌의 궁에 가두라고? 징벌의 궁은 죄를 지은 황족들을 유배시키는 궁이었다. 그러나 웬만해서는 잘 시행되지 않았다. 그 방에 가는 것 자체로도 그 황족의 자존심에 흠집이 나기 때문이었다.

그런 데다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이미 잉꼬부부라고 온 궁에 소문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황태자가 황태자비를 직접 징벌의 궁에 보내라고 명을 내렸다고? 이것은 온 궁이 뒤집힐 수도 있는 상황이다!

“뭐 하나? 내 명을 시행하지 않고.”

“네…… 알겠습니다.”

시녀는 할 수 없이 황태자비를 징벌의 궁으로 안내했다. 감옥과도 비슷한 구조를 가졌으나 황태자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녀는 황태자비를 힐끔 쳐다보았다. 굳게 다문 입과 살벌한 분위기. 매우 무서웠다.

“여, 여기입니다.”

시녀는 방문을 열었다. 방에는 푹신한 침대, 책상, 등불, 옷가지 몇 개가 다였다. 무심한 표정으로 방을 살펴보던 카니벨라는 이내 시녀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하고는 침대에 누웠다. 푹신한 감촉이었지만 그것도 그녀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라이넨은 라소니 왕국과 어디까지 약속을 했을까. 루카민의 죽음에 대한 침묵의 대가로 무엇을 받기로 한 것이지?

그녀는 라이넨이 하루빨리 라소니 왕국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들기 위해 뮤일라와 합의했다는 소문은 믿지 않았다. 애초에 단순히 감정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된다면 정치 외교는 왜 있는 것인가.

게다가 국가 간의 문제가 그리 간단할 리도 없다. 그리고 머리를 식히고 나서 생각해 보니 레이가 준 서류 또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특산물 교역을 조건으로 했다고? 라소니 왕국은 관광업으로 사는 국가다.

만약 특산품이 있었다면 그녀가 제일 잘 알았을 것이다.

맹렬히 머리를 회전해 봤으나 딱히 짚이는 것이 없었다. 눈이 너무 아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사이에 잠들어 버린 그녀는 밝은 햇살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따갑군.’

태양 빛이 따갑고 뜨겁기는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냥 라이넨에게 직설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루카민의 죽음을 침묵하는 대신 라소니 왕국에게 무엇을 받게 되었냐고.

‘아마 잘 털어놓으려 하지 않을 거야. 유도신문을 하는 게 좋겠어.’

그녀는 몸을 풀며 좁은 방을 가만히 걸어 다녔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레이가 들어왔다.

“레이?”

“전하…….”

“무슨 일이지?”

“혹시나 이곳의 환경이 전하를 힘들게 할까 염려되어 늘 드시던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녀는 레이가 준 차를 마셨다. 역시 씁쓸한 맛이 좋았다.

“고마워.”

“아닙니다. 전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계시다뇨. 빨리 황태자 전하께서 화를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전하를 궁에서 보필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그 말에 속으로 황궁에 있는 것 자체가 싫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애써 삼켜냈다. 그냥 쓴웃음을 흘렸다. 레이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으나 그녀의 축객령에 하는 수 없이 물러갔다.

‘그래, 라이넨을 만날 필요성은 있어. 빨리 모든 것을 알아내고 위험 요소를 제거한다.’

그녀의 검술 실력은 딱히 뛰어나지는 않았으나(기준이 루카민 기준이라 눈높이가 높은 편이다.), 라이넨 정도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이지는 못해도 제압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게다가 황족으로 생활하면서 비밀 통로도 익히게 되었다. 그쪽으로 도망가면 될 거다.

“황태자 전하를 보고 싶은데.”

시녀는 갑자기 방문을 열고 나와 황태자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황태자비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던 기사를 불러 라이넨에게 소식을 알렸다.

“무슨 일이야?”

그녀가 만나자는 소리에 산처럼 쌓여 있던 서류를 모조리 처리하고 달려온 라이넨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미약하게 기쁨의 표정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야기나 하자고.”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징벌의 궁 밖으로 나갔다. 밖을 지키던 기사들이 제지했으나 라이넨의 손짓에 물러갔다. 그녀는 끝도 없이 걸었다. 그는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이렇게 둘이 있는 것도 오랜만이야.”

“그러게.”

그녀의 말에 그는 다소 감격스러웠다. 그는 계속해서 생각해 보았다. 왜 그녀가 자신을 두고 떠나려 했는지. 그런 그가 내린 결론은 갑작스러운 유산으로 인해 심신의 충격을 받아 충동적으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많이 힘들었지?”

“힘들었지. 나의 소중한 사람을 잃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는 그녀가 말하는 소중한 사람을 유산된 자신들의 아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가볍게 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네가 슬퍼했던 순간에 함께하지 못해서.”

“아니야,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괜찮아.”

그래. 아버지와도 같은 루카민을 잃은 이 슬픔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다.

“이제 함께 극복해 나가자.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잖아.”

“아니, 없어. 앞으로 그건 영원히 극복하지 못해. 네가 나와 함께 있으니까.”

그녀는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는 입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그를 몰아붙였다.

“이건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애초에 우리는 만나서는 안 되었어. 그랬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뭐? 만나서는 안 되었다니. 절대로 안 돼! 내가 어떻게……!”

둘은 흥분했다. 라이넨은 위로하려는 마음을 잊어버렸고, 카니벨라는 진실을 위한 질문을 잊어버렸다. 그저 뜨겁다 못해 서로를 향해 따갑고 아픈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됐어. 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말해. 그냥 나중에 말해.”

“무슨 소리야? 지금 말해야 해. 말해 봐, 내 소중한 사람을…….”

그때, 한 기사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저, 전하! 큰일 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귓속말을 했다. 북부의 한 마을에 큰 규모의 산사태가 나서 현재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다음 기회는 없을 거야.”

“당신……!”

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카니벨라는 그런 기사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라이넨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표정에 다음 기회를 잡지 못할 것 같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다.

“비…….”

“전하!”

그러나 그의 부름은 기사의 재촉에 허공에 흩어졌고, 그녀는 그런 그의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틀어 징벌의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전부 본 레이가 중얼거렸다.

“성공.”

『신데렐라의 눈물』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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