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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벗어나다 (31/93)

30. 벗어나다

“비전하, 레이입니다.”

“들어와.”

레이는 들어오자마자 계약서 하나와 쪽지를 하나 주었다. 쪽지에는 탈출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한 모든 것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또한 계약서에는 어떤 조직에 대한 각종 계약 조건이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일전에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하셨죠? 이 조직이 제가 들어가 있는 조직이에요. 전하께서도 들어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레마이…….”

“계약은 나중에 하면 되고 일단 받으십시오.”

계약서를 자세히 살피는 그녀에게 레이는 쪽지를 내밀었다. 펼치자 간단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새벽까지 하녀 복장을 한 채 식료품 창고 쪽으로 나올 것]

“일단 그럼 오늘은 계속 대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시간이 되면 저희 쪽에서 사람을 보내 전하를 데리고 이 궁 밖으로 나갈 것입니다.”

“그렇군.”

레이는 더 있을 생각은 없었는지 재빨리 사라졌다. 흩날리는 레이의 금발 머리를 보자 그녀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 굳이 저렇게 눈에 띄는 색깔로 염색을……?

그러나 이내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탈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될까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다 지나갔다.

밤이 되었다. 달빛이 어두웠다. 그림자가 진하게 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소리 없이 방문을 열고 나와 레이를 찾았다.

“레이?”

그러나 레이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식료품 창고에 먼저 있겠거니 싶어 그녀는 하녀의 복장을 한 채 그곳으로 향했다.

저벅저벅.

고요한 밤이었다. 또한 어두운 밤이었다. 무언가를 몰래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그늘로만 지나가니 기감이 뛰어난 축에 속한 기사들도 그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아무도 없습니까?”

그녀는 식료품 창고에 들어갔다. 적막함과 어두움에 짓눌리기 싫어 촛불을 켰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밖은 아직도 어두웠지만 벌써 새벽이었다. 이러다가 기회를 놓치게 되는 거 아닌가 싶어 그녀는 초조하였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불을 끄고 창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남자 3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여기에 있는 거 맞습니까?”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레이가 언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는가?”

주의를 경계하던 그녀는 레이의 이름이 나오자 저들이 레이가 보낸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저들이 창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왔다.

“레이가 보낸 사람들입니까?”

적막했던 창고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남자들은 한 손으로는 병장기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금발 머리와 푸른 눈, 그리고 자신들이 입으라고 주문했던 하녀복을 입은 여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황태자비?”

“그렇습니다.”

선두에 있던 남자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다른 일행들에게 검을 넣으라고 지시하였다. 그녀는 남자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레마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전 레신카입니다.”

“루시아입니다. 저희는 언제쯤 출발하나요?”

“이제 곧 출발합니다. 나갈 때 식료품 칸에 있어야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수도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괜찮아요.”

“그렇게 오래까지 그곳에 있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신참이시고, 저희는 조직원들을 그리 막 대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창고에서 나와 보니 하늘은 이전보다 더 밝아져 있었다. 그녀는 초조했지만 빈 상자들을 싣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서는 여유가 묻어 있었다.

“이 사이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성문을 통과할 때까지는 어떤 소리도 내지 말아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믿겠습니다. ……어이 일단 멈춰!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틈은 만들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준 틈에 그녀는 재빨리 들어갔다. 그녀가 들어간 것을 확인한 인부들이 위에 각종 물건을 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이곳은 어둡고, 좁았다. 움직이기 불편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옛날의 일이 떠올랐다. 14살 때였나, 뮤일라의 발길질을 피해 들어갔던 작은 창고가 떠올랐다. 참 음산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그 공포에 그녀는 순간적으로 잠이 들었다. 한편, 밖에서는 수많은 짐들을 실은 짐마차가 출발했다. 성문에 서서 졸던 한 병사가 그들을 반겼다.

“어이, 이제 가는가?”

“저희 상단과 거래한 채소의 신선도를 하나하나 확인한다고 늦었습니다.”

“쉬엄쉬엄하시게. 황제 폐하께서 상단에서 나온 채소가 신선하여 매우 만족스러워하신다고 소문이 자자하다네.”

“그렇기에 더 열심히 해야죠.”

“오오, 그렇군. 우리가 너무 오래 붙잡았군. 다음 날 보세.”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성문이 곧장 열렸다. 그녀가 잠들어 버린 사이, 마차는 달려 수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한편, 레이는 황태자비가 있던 방에 위치해서 있었다. 그녀가 가지런히 개어 둔 옷을 다시 입었다. 실내복을 입고 옷 사이에 낀 머리카락을 털었다. 그러자 거사를 위해 염색한 금발 머리가 찰랑거렸다.

“준비는 다 끝났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다시 살펴보았다. 1층부터 꼭대기까지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완벽했다. 사람들은 전부 잠들어 있었고, 바닥에는 기름이 흥건하였다.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아무리 각오한 일이지만 무섭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레마이를 위하여’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그 말은 그녀에게 있어 부적과도 같았다.

화르륵!

마음이 한결 진정된 그녀는 1층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황태자비의 방으로 돌아갔다. 열기가 느껴졌다. 창문으로 연기가 치솟았다. 매캐한 냄새가 났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고 싶지 않아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것은 다 조직을 위한 일이다. 나의 희생이 조직을 빛나게 만들 것이고, 또한 대장이 만들어갈 세상의 초석이 될 것이다.

그녀는 마음을 다졌다. 그러자 한결 편안해졌다. 실시간으로 불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아레마이를 위하여.”

*   *   *

새벽에 영문 모를 화재가 징벌의 궁에 일어났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불은 거칠게 타올랐다. 아무리 물을 퍼부어도 꺼지지 않던 불길은 결국 황제가 나섬으로 진화되었다.

황제는 몰래 마법을 시전하였고, 그의 마법과 함께 계속된 진화 작업으로 불길은 곧장 진화되었다.

“헉!”

수색을 위해 투입된 사람들은 끔찍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문이 죄다 못질이 되어 있었고, 그 누구도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 죽어 있었다.

“누가 고의로 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고의로 불을 지른 흔적이 있었다. 그러자 모두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남았다. 누가 도대체 왜 불을 질렀을까?

모두들 의아했다. 누가 도대체 어떤 목적으로 불을 질렀는지도 미스터리였다. 그리고 어떻게 징벌의 궁에서 불이 났는지, 또한 궁이 다 타 버릴 때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었는지 알 수 없었다.

“으아악! 셀린느, 어째서 당신이!”

“흑흑흑…….”

“형! 우리 형은 어디에 있습니까!”

황실에서는 화재 사건의 피해자들의 시신을 과거 카니벨라와 라이넨이 혼인을 했던 그 홀에 놔두었다. 유가족들이 수습할 수 있게 조치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홀에서는 매일매일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

그 와중에 황제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 신원불명의 시신이라고는 하지만 시신의 특징은 모두 아들이 끔찍하게도 사랑하는 황태자비의 특징과 일치했다. 몇 번을 확인했지만 황태자비가 맞았다.

황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아이에게 원한을 가진 누군가의 소행인가? 정말이지 말년에 자꾸만 이런 일이 터지니 머리가 아팠다. 그리고 이를 알게 된다면 라이넨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무작정 이 상황을 계속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즉시 라이넨을 호출했다. 그곳이, 그날이 라이넨에게 어떤 의미인 줄 알고 있으나 지금은 이 사건을 수습하는 것이 더 급했다.

그리고 황제는 즉시 회의를 소집했다. 정체 모를 사람이 황실의 경계망을 뚫고 들어와 황태자비를 비롯한 수많은 사용인을 죽였다. 이것은 심각한 안보의 문제이며 동시에 제국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외람된 말씀이지만 시스티아 왕국에서는 자신들은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들이 국경을 넘었다는 보고가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회의장에서는 범인을 추측하는 수많은 목소리들이 흘러나왔지만 범인은 그 누구도 밝혀내지 못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한없이 시끄러운 회의장은 한 목소리로 인해 조용해졌다. 바로 전 황후와 전 황태자의 무덤에 가서 추모식을 가졌던 라이넨이었다. 황제는 라이넨의 얼굴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회의를 파했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친다.”

황제는 라이넨에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는 갑작스러운 귀환 명령에 짜증이 난 상태였다. 제대로 추모할 시간도 없이 왜 오라고 하는 건지.

아바마마께서는 어마마마와 형님을 잊어버리신 건가?

따지고 싶었으나 오늘따라 황제의 분위기가 심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였다.

“따라오너라.”

그는 황제를 따라 한참을 걸어 유가족들이 있는 홀로 갔다. 그곳에서 유독 큰 관 앞에 멈춰 섰다.

“보거라.”

황제의 말에 그는 관에 있는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에 홀라당 타 버린 시체였다. 그는 한참을 쳐다보다 이내 경악하고는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주먹을 파고든 손톱에 피가 났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딴 주먹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진짜 가슴이 찢어진 것 같았고,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못했다.

“…….”

믿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이것이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아아…… 아!”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그 앞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으아악!”

사랑을 잃은 한 남자의 고함이 궁 전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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