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해결
그러나 루카민을 없애 버렸다 하더라도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바로 레미우스 왕국의 트리우스 왕자와 카니벨라 공주의 혼인에 대한 문제가.
란시엔은 머리가 아팠다. 사라진 지 1년이 다 되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레미우스 왕국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녀에게 한가롭게 휴식을 취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레미우스 왕국에서 빨리 공주를 내놓으라고 하는군요.”
그녀는 레미우스 왕국에서 보내진 공문을 읽으며 뮤일라에게 말했다. 어차피 모든 것을 딸에게 맡기고 있던 뮤일라는 먹고 있던 쿠키를 마저 먹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은 방법 없겠니?”
그래서 그냥 묻기만 하였다. 란시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생각을 거듭하였다.
‘어떻게 한다?’
라소니 왕국에서 공표하지 않았고, 루미니르 제국에서도 딱히 아무 말을 하지 않았기에 카니벨라의 신변은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그렇지만 레미우스 왕국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기에 굳이 카니벨라가 사라졌다는 말을 해 괜히 저들을 화나게 할 필요는 없었다. 4국 중에서도 가장 약소국인 라소니 왕국은 이들을 이길 힘도 없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방법은 있어 왔고, 그녀는 그 방법을 통해 훌륭하게 시련을 극복해 냈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반드시 해낼 것이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왕국 전체에 공고문이 붙었다. 다른 왕국에서 일하고 싶은 인재 귀족들은 왕국에 신청서를 내면 엄격한 심사를 통해 다른 왕국으로 파견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뽑히게 될 경우, 엄격한 교육을 받을 것이고 또한 국가에서 보상금도 지급해 준다 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무조건 여자만 된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의아해했다. 이미 여자 귀족들 대부분이 왕실이나 가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이런 방을 붙이는 여왕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았다.
남자 귀족들은 다른 왕국에 파견되어 일하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었다. 그러나 여자 귀족들의 경우는 달랐다. 라소니 왕국과 달리 다른 왕국에서는 여자는 여전히 정략결혼을 위한 패였다.
그랬기에 왕궁의 행보는 더 뜨거운 화제를 불러 모았다.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나 저기 가 볼까?”
“평소에 외국 가고 싶었는데 잘되었네.”
귀족 가문들은 자기 딸을 보내 볼까 말까 고민했다. 주로 가난한데 딸은 많은 가문에서 딸들의 동의를 받아 지원서를 작성하여 왕궁으로 보냈다. 그렇게 지원서는 쌓여 갔다.
“하, 우리 왕국에 귀족 가문이 이렇게 많았나?”
란시엔은 피식 웃으며 서류들을 추렸다. 자작, 남작 가문의 영애들의 지원서가 대부분이었다.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고위 귀족이 지원했더라면 떨어진 이유를 둘러대는데 꽤 난감했을 테니까.
그렇게 서류를 추리며 일주일이 지났고, 그와 동시에 면접이 시작되었다. 대략 70명의 귀족 영애들이 선택을 기다렸다.
란시엔은 궁에 들어오기 위해 검사를 받고 있는 영애들을 보며 냉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미 저기서 50명의 영애들이 가려졌다. 이번 일의 진상은 아무도 몰라야 할 테니 희생자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내가 주는 이 서류의 영애들은 오른쪽 방에 데리고 있다가 귀가시키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시녀는 20명의 영애들을 면접실로 데리고 왔다. 본격적으로 면접이 시작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탈락했다.
순서는 끝없이 이어졌다. 그녀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찬찬히 평가하였다.
‘많군.’
그러나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었다. 저들 중 한 명이라도 기준에 부합해야 하기에 그녀는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슬슬 끝날 때 즈음, 문이 열리고 한 귀족 영애가 들어왔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저 영애를 보내면 되겠다고.
트리우스 왕자의 취향인 저 어린 얼굴과 나이, 세상을 잘 모르는 것 같은 때 묻지 않은 미소, 그 무엇보다 카니벨라처럼 금발에 벽안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가고 싶은 나라가 있는가?”
“저는 레미우스 왕국에 가고 싶습니다. 그곳의 경제가 낙후되었다고 하여 제가 생각한 정책이 맞는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그렇군……. 수고했네.”
마침 가고 싶은 나라도 레미우스 왕국이라니. 정말이지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수고했다는 말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영애에게 다가왔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리고 시녀는 영애를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으로 인도하였다. 영애는 시녀를 따라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기지개를 쭉 켜며 편지를 쓰고는 종을 울렸다. 한 시종이 나타났다. 그녀는 시종에게 편지를 건넸다.
“이걸 어마마마께 전하거라.”
편지 안에는 갈 사람은 정해졌으니 가지고 갈 물품이나 주문해 달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비릿하게 웃었다. 이제 저 영애의 운명이 정해졌다.
한편, 뮤일라는 란시엔의 서신을 받고 은밀하게 사람을 시켜 드레스, 꽃, 마차, 장신구, 화장품 및 구두를 주문했다. 그녀는 딸이 단시간 안에 적임자를 찾아낸 것을 보고 감탄했다.
‘역시 내 딸이야. 어쩜 이렇게 기가 막힌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그녀는 란시엔이 적은 레미우스 왕국에 보내야 할 서신에 간단히 사인을 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웃음이 났다. 이렇게 앓던 이가 빠지자 너무 시원했다.
[병으로 인해 거동하지 못했던 공주가 드디어 일어나 왕국과 영원의 언약을 맺으러 갑니다.]
뮤일라는 그리고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루미니르 제국이 입을 다물고 있기에 이런 대형 사기극이 버젓이 펼쳐질 수 있게 되었다고.
게다가 레미우스 왕국 자체도 현재 후계자 싸움에 정신이 팔려 다른 왕국의 정세에 어두운 상태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여러모로 다행인 상황이었다.
트리우스 왕자의 그 더러운 취향을 감당해야 할 어린 귀족 영애가 불쌍하긴 하지만 그 마음은 눈곱보다도 더 작았고, 그만큼 동정심이 많은 성격도 아니었다. 뮤일라는 단지 자신에게 살길이 생겼다는 것이 기쁠 뿐이었다.
그때, 란시엔이 들어왔다.
“어마마마.”
“응? 무슨 일이니?”
딸이 저렇게 말을 깔면 필시 무엇인가가 불만족스럽기 때문에 그런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던 뮤일라는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합격자에게 인사를 하러 가야지, 지금 뭐 하십니까?”
“아, 그, 그렇구나……. 응, 가야지.”
오늘도 여지없이 딸에게 혼난 뮤일라는 합격자의 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란시엔이 따라왔다. 뮤일라는 딸이 무서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걷기만 했다.
“아, 여, 여왕 폐하, 공주마마. 엔티르 자작가의 여식 유키르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합격자가 홀로 앉아 있었다. 눈가가 빨갰다. 란시엔은 그 모습에 역겨움이 솟았다. 도대체 뭐가 그리 서러워서 울고 있는 것인가. 정말이지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나약한 여자였다.
그녀는 우는 사람을 혐오했다. 우는 건 울 여유가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감정을 제대로 표출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형제자매들과 후계 자리를 두고 싸워야 했다. 그 잔인한 싸움 가운데서 울 수 있는 사치란 없었다. 오직 살기 위해서 그녀는 독해져야 했다.
그리고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 그녀는 이미 감정이 망가져 버린 상태였다. 그 이후에는 왕국이 멸망하고, 아버지가 죽었다. 눈물은 말라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눈물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리고 그런 그녀였기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너무나도 싫었다.
‘진정해라.’
그러나 이런 사소한 이유 때문에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현재보다 미래를 추구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감정 따위는 사뿐히 없애 버릴 수 있었다.
“그냥 영애께 합격 소식을 전하러 온 것뿐이랍니다. 아직 미숙하지만 충분히 발전할 여지가 있기에 뽑아보았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입니다.”
“네, 네, 감사합니다!”
유키르는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란시엔은 비웃음을 삼키며 겉으로는 환하게 웃었다.
“부디 영애의 앞날에 행복함이 가득하길 바랍니다.”
유키르는 그런 란시엔의 웃음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웃음이 있다면 여기에 있을까.
란시엔은 귀족들 사이에서 얼음공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아름답지만 생기가 없어 조각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피식거리며 웃는 것을 본 사람은 많아도 환하게 웃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란시엔은 대륙 최고 미녀 공주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그러니 그녀가 작정하고 유혹하면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웃음은 유키르 또한 홀렸다.
“아…….”
유키르는 란시엔의 그런 웃음에 넋을 놓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고 소리쳤다.
“그럼 잘 부탁하지.”
그렇게 말한 란시엔은 뮤일라와 반대로 정원 쪽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녀 한 명이 와서 그녀에게 부복하였다.
“부르셨습니까.”
“네가 저 아이를 데리고 레미우스 왕국으로 함께 가. 그리고 도착하는 즉시 돌아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왕비 때처럼 그것을 쓸까요?”
“당연하지.”
시녀는 일어나서 다과와 함께 유키르의 방으로 들어갔다.
“누구세요?”
“란시엔 공주마마께서 보내셨습니다.”
“네, 들어오세요.”
그리고 시녀는 방에 들어가 향을 피워 주고 다과를 차려 주었다.
“공주마마의 선물입니다.”
유키르는 자신에게 이렇게 신경을 써 주는 란시엔에게 감동했다. 차의 색깔은 다소 이상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의심 없이 마셨다. 눈이 탁해지고 정신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맛있네요…….”
‘걸려들었군.’
몽롱한 표정으로 말하는 유키르를 보며 시녀는 약의 효과를 체감했다. 그리고 그녀의 순진함을 속으로 비웃었다. 이 약품은 시간을 들이며 사람의 정신을 서서히 침식시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을 점점 인형처럼 만든다.
이 약품은 일종의 마약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섭취했을 때 환각을 보게 한다거나 그 사람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왕비가 오랜 기간 란시엔의 의도대로 움직인 것이다.
그렇지만 단번에 증상이 생기거나, 육체적으로 튼튼한 사람이 그것을 섭취했을 경우에는 그리 큰 효과를 가지지 않았다. 그래서 꾸준히 중독시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리고 유키르도 그렇게 중독시킬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이 여자는 치사량을 조금만 조절해서 먹이면 되겠군.’
유키르는 검술을 배우거나 운동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흔히 있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시녀는 꾸준히 유키르의 방으로 가 향을 피우고 다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유키르는 자아가 없는 인형처럼 변해 버렸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사이 국혼을 치르고, 트리우스 왕자에게 더럽혀졌다.
* * *
“잘 처리되었나?”
란시엔은 무표정하게 곁에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네, 잘되었습니다.”
깔끔한 생김새를 가진 한 남자가 그녀에게 보고했다. 해외 파견 지원 영애들을 모두 도적 떼에 당한 것처럼 위장해 살해하고, 처리도 깔끔하게 했다.
‘이 전말에 대해서 아는 자가 있으면 안 된다.’
란시엔은 그 어느 영애도 자신들의 속내를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 깔끔하게 죽였다. 그리고 한 달 정도 수색하는 척 쇼를 하고는 신원 미상 시체를 가득 가지고 와 딸들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하고 국장(國葬)을 치러 주었다.
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궁은 수색에 최선을 다했고, 딸들을 국가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라고 치켜세워 주기까지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단지, 자신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평생 원망하며 살 수밖에.
“당분간 어수선하겠군.”
“그래도 저희의 목적에 방해를 걸지는 못 할 겁니다.”
“당연한 소릴.”
그녀는 큰일들을 연달아 해결했다는 공으로 뮤일라에게 포상을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거리로 나왔다. 후드를 쓴 그녀는 익숙한 듯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히히힉, 돈 내…… 히익!”
부랑자가 돈을 구걸하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왔으나 란시엔의 후드 오른쪽에 박혀 있는 문장을 보자 혼비백산하였다.
“알면 꺼져라.”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부랑자를 한 번 쓱 본 그들은 한 허름한 가정집에 도착하였다.
“안내하겠습니다.”
남자의 뒤를 따른 그녀는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긴 테이블과 그 위에 쌓여 있는 서류,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모두들 오랜만이군.”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난 언제나 무사하니 걱정할 필요 없다.”
란시엔은 심드렁하게 말하며 이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바로 그녀의 진짜 부하이고, 오른팔이다.
“자, 그럼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