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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아이가 생기다 (36/93)

35. 아이가 생기다

카니벨라는 흔들림에 깨어났다. 일어나 보니 마차는 이미 수도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그녀를 본 레신카는 짐마차에서 나와 바람을 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녀는 어두운 곳에서 나올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도대체 얼마나 달린 걸까?’

하루? 이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이곳이 수도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분이 나아졌다.

“도착인가요?”

“아직입니다. 루미니르 제국 쪽에는 아직 지부가 생기지 않아서…….”

가려면 아직 한 달이나 더 가야 한다. 그녀는 그 뒤로 레신카의 옆에 앉아 여러 대화를 했다. 대화라기보다 지식 방출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난 후, 그녀는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궁에 있을 때와 전혀 다른 것이 없는 달이지만 처해 있는 상황이 달라서 그런지 그녀는 그것 또한 새로웠다.

“좋구나.”

춥지만 좋았다. 차가운 바람을 피부로 직접 느끼고, 흘러나오는 입김이 좋았다. 그래서 그녀는 한 달 내내 기분 좋게 도착지까지 갈 수 있었다.

“여기가 루시아 님께서 머물 곳입니다.”

집은 낡았지만 아담했다. 적당히 마을과 멀면서도 접근성이 있어 마음에 들었다.

“이곳은 레미우스 국경 근처입니다. 그러니 거동에 주의해 주시길.”

“알겠습니다.”

“후훗, 알겠습니다. 집은 마음에 드십니까?”

“네, 마음에 드네요.”

레신카는 마음에 들어 하는 그녀를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안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레신카는 의자에 앉아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계약서를 꺼냈다.

“이미 레이에게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가 루시아 님을 꺼내 준 것은 공짜로 해 준 것이 아닙니다. 엄연히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죠.”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선의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 것에 대가를 내야 하는가 하고 하며 화를 낼 것 같았으나 의외로 그녀는 차분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대꾸할 뿐이었다. 그는 그러한 그녀를 보며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하였다.

마치 이 ‘탈출의 대가’를 다 지불하면 미련 없이 털고 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이 ‘탈출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 줄 셈이다.

“자, 여기에 사인하시면 됩니다.”

그녀는 계약서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녀를 아레마이라는 조직의 조직원으로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조직원으로?’

일단 그 아레마이라는 조직이 무엇인지는 둘째 치더라도 그녀를 조직에 넣고 싶다니. 루시아 타키라이가 검술 고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인가?

그러고 보니 저들은 ‘루시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문득 루카민이 자신에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이들은 그냥 ‘루시아’의 존재에 대해 아는 것에 불과했다.

그녀는 선뜻 사인하기가 꺼려졌다. 일단 이 조직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정확하게 모른다. 게다가 막말로 이게 노예 계약서라면……?

그러나 그런 그녀의 망설임을 감지한 듯, 레신카는 살짝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곧장 그녀의 감각에 살기가 얹어진 행인 몇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여기서 거절하면 나는 죽는다.’

라이넨에게서 어떻게 벗어났는데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일단 레이와의 약속도 있고.

‘그렇지만 역으로 이 조직의 약점을 잡으면 저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잠깐 사이 수많은 생각이 오갔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서명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기서 조건을 하나 붙일 셈이었다. 이때까지 부딪혔던 수많은 상황에서 그랬듯, 피할 수 없다면 그걸 역으로 이용하면 된다.

“저를 조직원으로 데리고 오고 싶다 하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전 서명을 했습니다. 이제부터 전 아레마이 소속 조직원입니다. 단, 저를 고위 조직원으로 만들어 주세요. 저는 황태자비였기 때문에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황실의 정보를 잘 압니다. 그러니 제 가치는 일반 조직원 정도가 아닙니다.”

‘이 여자, 협상을 할 줄 아는 사람이군.’

레신카는 그녀의 당돌한 제안을 듣고 피식 웃었다. 만만하지 않다. 자칫했다가는 역으로 모든 것을 빼앗길 것만 같았다.

“저희끼리 회의를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후, 그녀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레신카는 충분한 휴식을 취했음에도 묘하게 지쳐 보이는 그녀를 의아하게 한 번 쳐다보고는 말했다.

“일단 몸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니 다 나으시면 저희를 불러 주시길.”

그녀는 피식 웃었다. 불러 주기는 무슨.

“그 전에 일단 집 주위를 맴도는 감시자들부터 좀 없애 주시죠. 저들이 내뿜는 기운 때문에 휴식이 휴식 같지가 않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도망자들을 많이 봤던지라…….”

“전 그러지 않아요. 제가 회복되면 제 쪽에서 먼저 부를 것이니 그때까지는 다른 곳에서 대기해 주세요.”

도망갔다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될 줄 알고? 저렇게 감시자까지 붙여 놓은 저들이 결코 그녀를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녀는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아예 배제했다. 도망갔다가는 진짜로 죽을 것만 같았다.

“후…… 알겠습니다. 그래도 아무리 늦어도 1년은 넘기지 말아 주시길.”

그녀의 강력한 주장에 레신카는 어쩔 수 없이 조직원들을 데리고 바로 옆 마을로 물러갔다. 그렇게 그들의 기척이 사라지자 그녀는 한결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너무 피곤해. 일단 잠부터 좀 자야겠어.’

잠을 자면서 몸을 회복하려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는 점점 나빠지기만 하였다.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은 울렁거렸고, 계속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시시각각 나빠지는 몸 상태에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뭐지? 왜…….’

그러다가 문득 전에 비슷한 증상을 겪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아니, 그때 딱 한 번 했는데 이렇게?

“네, 회임하셨습니다.”

그녀는 설마 했다. 그리고 그 설마는 의사의 확진에 무너졌다.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이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

레신카 몰래 진료를 받은 그녀는 고민했다. 아이를 지울까? 내가 원하던 아이도 아닌데 달고 다니다가 약점만 되면 어떡하나.

‘아니야, 내가 그래서는 안 돼.’

그녀는 자신을 버렸던 왕비가 생각났다. 그녀가 혼자서 울고 있을 때 여행을 떠났던 증오스러운 아비!

그렇다면 이 아이에게는 그러한 아픔을 겪게 해서는 안 된다. 버림받는 게 무엇인지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내가 지켜 줘야 한다. 그렇지만 저들에게 들킬 수는 없었다. 저들이 아이를 어떻게 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관찰했다. 누구에게 아이를 맡겨야 안전하게 클 수 있는지 알아야 했다. 아이를 저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을 믿지 않는 그녀가 어떻게 그런 것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겠는가? 시간은 점점 지나가는데 마땅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점점 초조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러다가 아이를 세상에 나오게 하자마자 버려야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아무리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그것은 아이에게 상처가 되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결심에 어긋난다.

심란한 그녀는 계속 걸었다. 그렇게 걷든 그녀의 눈에 한 카페가 보였다. 최근에 자꾸 달콤한 음료가 먹고 싶었기에 곧장 들어가서 주문을 했다. 그런 여사장에게 희롱을 하는 한 무리가 보였다.

‘정말이지 할 짓도 없군.’

그녀는 심드렁하게 저들이 하는 짓거리를 지켜보았다. 어딜 가나 저렇게 산소를 낭비하는 놈들은 존재했다.

“제발 놔주세요! 전 남편이 있다고 말했지 않았습니까!”

“지금 없으면 없는 거지.”

“남편 올 때까지만 같이 있자고.”

“이 오빠랑 뜨거운 밤을 보내야지?”

희롱의 수위는 끝도 없이 올라갔고, 그녀는 듣다가 귀가 썩을 것 같아 주변에 있는 막대기를 가지고 남자들의 머리, 목젖, 명치, 무릎, 종아리를 차례로 때렸다. 남자들이 억 소리를 내며 쓰려졌다.

“듣자 하니 내 귀가 썩을 거 같아서 말인데, 지금 당장 꺼져. 아니면 내가 너희 집까지 찾아가서 때려 줄 테니까.”

“이이익…….”

“왜? 못할 거 같아? 이참에 오늘 밤에 한번 원정이라도 해 볼까?”

그녀는 다시 한번 막대기를 위로 쳐들었다. 그러자 남자들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그들은 재빨리 일어나 밖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으아악! 다시는 이런 곳에 오나 봐라!”

“그래, 다시는 안 올 거다!”

협박성 멘트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있던 곳에 막대기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말이나 못 하면…….”

그때, 사장이 다가와 그녀에게 시키지도 않았던 디저트를 제공하며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이지 아가씨께서 없으셨다면 어찌 되었을지…….”

“저들이 하는 말에 짜증이 나서 그런 것뿐이니 너무 치켜세우지는 마십시오.”

“아니에요, 그래도 감사해요.”

그녀는 굳이 마다하지 않고 음료와 디저트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음료값만 계산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때, 사장이 뛰어나왔다.

“저, 저기…….”

“무슨 일이시죠?”

“앞으로 자주 와 주세요. 제가 맛있는 음료를 많이 대접해 드릴게요! 아, 물론 공짜로.”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그녀가 살면서 배운 인생 철학이었다. 그랬기에 거절했다. 그러자 사장이 울먹였다.

“부디 제가 은혜를 갚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 무엇보다…….”

“무엇보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만 저희 카페에 머물러 주세요. 아무래도 혼자서는 좀 무서워서…….”

“…….”

그녀는 피식 웃었다. 문득 괜찮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을 자꾸 거절하기도 뭐하고, 혼자서 계속 집에 있는 것도 별로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장이 감격하며 양손을 잡았다.

“아, 정말 감사해요!”

“아닙니다.”

그녀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래도 사장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생글거리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카페 사장의 이름은 마리. 남편은 행상인이라 돌아오는 것에 시간이 조금 걸린다고 했다. 그래서 홀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자신을 미혼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곤혹이라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네.’

그녀는 마리가 마음에 들었다. 일단 사람이 순진하지만 입이 무겁고, 또한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무언가를 원하는 게 없었다. 그 라이넨마저도 눈에서 그녀와 함께하고 싶다는 바람을 잔뜩 풍겼었는데.

하루, 이틀, 한 달, 한 계절이 지나면서 그녀는 확신했다. 이 사람에게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리의 심성으로 봐서는 절대 아이를 버리거나 방치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와 라이넨의 아이이기에 태어나면 금발이거나 흑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근데 마리는 흑발이라 만약 상황이 꼬이면 마리의 아이라고 우기면 될 것이었다.

“마리, 혹시 아이 좋아하십니까?”

“아이요?”

“네, 아이들. 혹시 키우고 싶다거나…….”

“아이를 가지면 좋겠죠. 실제로 원하고 있고요. 하지만 전 불임이라 제 품으로 아이를 키울 수가 없네요.”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이 현재 아이를 가졌는데 스스로 키우기가 힘든 상황이라 대신 키워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적임자인 것 같다고.

“루시, 당신은 어쩜…….”

마리는 또 쓸데없는 오해를 한 것 같았다. 그녀는 울먹거리는 마리를 진정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

‘휴.’

그래도 어찌 되었든 아이를 돌보아 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해서 다행이었다. 오랜만에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아이야, 잘 자…….’

그렇게 수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그녀는 마리의 도움으로 순조롭게 세상에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것 같은 추운 겨울에 품게 된 아이는 겨울이 시작될 즈음에 세상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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