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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조직에 들어가다 (37/93)

36. 조직에 들어가다

다행히 카니벨라는 아레마이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출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필사적으로 몸조리를 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루시아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제 내 얼굴을 보고 ‘카니벨라’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녀는 불안했다. 아무리 자신의 얼굴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카니벨라 공주’의 특징이 바로 금발 머리에 벽안이다. 그랬기에 언제 그들이 자신을 알아차릴지 몰라 안심할 수 없었다.

특히 라소니 왕국에서 자신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모르기에 더 문제였다. 라이넨이 그녀를 죽은 사람으로 처리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란시엔 그 아이라면 의심할 것이다. 그렇기에 ‘카니벨라’의 특징은 최대한 없애 주는 것이 좋았다.

‘그 아티팩트가 있으면 좋았을 걸.’

라이넨이 주었던 눈동자와 머리색을 바꿔 주는 목걸이가 그렇게 아깝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만 가지고 왔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아니, 그냥 애초에 왜 그냥 놔두고 왔는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괜히 내 본모습만 노출시켰잖아.’

그녀는 그것이 매우 아쉬웠다. 그렇지만 그걸 아쉬워할 시간은 없었다. 하루빨리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볼을 톡톡 치던 그녀는 타올라 있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톡톡 치던 볼을 손바닥으로 만져 보았다. 그때, 아주 좋은 생각이 들었다.

‘얼굴에 화상 자국을 남기자.’

그렇다고 진짜로 불을 얼굴에 끼얹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분장이 필요했다. 그녀는 마리에게 분장하는 법을 배우고 분장 도구들을 샀다.

“아…….”

화상을 입은 자신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 이제 진짜로 아레마이에 소속된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낸 그녀는 레신카가 더 수상하게 여기기 전에 서둘러 그와 접촉했다. 레신카는 마지막으로 볼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그녀의 얼굴에 기이한 화상 자국이 생긴 걸 보며 의아해했다.

“화상 자국이 생기셨군요. 아프지 않으셨습니까?”

“네, 다행히 지인이 생겨 그분의 도움으로 크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이제는 몸도 다 회복되신 것 같고…… 앞으로의 일에 있어 아무런 지장이 없겠습니다.”

“네, 준비되었습니다.”

레신카는 그녀를 이끌고 마차에 올라탔다. 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임시 지부가 생각보다 번화가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래 봤자 낙후된 것은 마찬가지지만.

“조직원들이 거주하는 곳 가까이에는 웬만하면 다 지부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한참을 가던 마차는 뒷골목에서 멈췄다. 그녀는 꽤 높게 솟아 있는 지부 건물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건물은 낡았지만 높았다. 은밀하게 무언가를 하기는 안성맞춤인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레신카가 다가가자마자 문을 은밀하게 지키고 있던 복면인이 그에게 인사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남자의 가슴을 손등으로 치며 말했다.

“힘 빼라. 내가 대장도 아니고 그렇게 맞이할 필요가 있어?”

“에이, 대장님 오시면 더 절도 있게 인사하려고 미리미리 연습해 놓는 거죠. 다른 분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시던데요, 뭘.”

부하의 재치 넘치는 말에 레신카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하? 그렇군. 아, 인사해. 새로운 조직원이다.”

“안녕하세요, 혹시…… 소문의 조직원?”

“소문?”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여기 온 것은 처음인데 소문이 날 만한 행동을 했던가?

“당돌한 신입 조직원이라고 이미 소문이 쫙 퍼졌어요. 고위 조직원이 되게 해 달라고 한 것도 모자라 1년 휴가권까지 얻어 낸 맹랑한 놈이라고.”

그녀는 멋쩍게 웃었다. 그냥 그 당시 필요해서 요구한 것뿐인데 이렇게 되다니.

‘혹시, 나 이렇게 찍힌 건가?’

그러나 남자의 반응으로 봐서는 다들 나쁘게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앞으로 그녀가 접촉해야 할 고위 조직원들은 이런 성격인지 알 수 없지만.

“다들 안에 있나?”

“네,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말에 그녀와 레신카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방이 많아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몰랐다.

“그냥 저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 말에 그녀는 레신카의 뒤만 졸졸 따라갔다. 그렇게 한참을 가던 그들은 바로 보이는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웬 남자가 한 명 나왔다.

‘예쁘다…….’

남자는 잘생겼다는 말보다는 예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아름다웠다. 무심결에 봤다면 여자로 착각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그나마 목소리는 확실히 남자였기에 다행이었다.

“새로운 조직원이십니까?”

“네, 네.”

“시카온입니다. 정보를 담당하고 있죠.”

그녀는 얼빠지게 시카온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런 그녀의 경직된 반응에 피식 웃던 시카온은 안으로 들어갔다. 레신카 역시 뒤따랐고, 그녀는 그들을 따라 빛인지 어둠인지 모를 그곳에 발을 붙였다.

방에는 큰 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3명의 인원이 앉아 있었다. 레신카와 시카온은 익숙하게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그녀를 두고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당신이 루시아?”

“어머, 어머, 정말 반가워요!”

“이제야 보게 되는군.”

복작복작했다. 뭔가 음침하고도 은밀한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뭔가가 달랐다. 저들이 자꾸만 시끄럽게 떠들어 대니 정신이 사나워지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경직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크흠, 루시아, 저 음란한 여자 옆에 가서 앉으면 되오.”

그런 그들의 시장 바닥을 보다 못한 슌카린이 일어나 가슴골이 부각된 옷을 입은 칸나의 옆의 자리에 그녀를 안내했다. 그녀가 옆에 앉자 칸나는 한 번 싱긋 웃었다.

“오늘은 회의 대신 간단하게 루시아에게 우리에 대한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지. 난 슌카린이고 이 조직의 부대장이다.”

“전 아까 문 앞에서 소개했으니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카온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기억 못 해도 당신은 기억할 수밖에 없을 거 같아.

“난 수이카. 맡고 있어, 무기 밀매.”

“칸나야. 이래 봬도 조직의 구역들을 관리하고 있어. 한마디로 말하자면 조직이 진출해 있는 모든 땅을 관리하는 거지.”

검은 머리카락의 조용한 인상의 수이카를 보며 그녀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무기 밀매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저 옆에 있는 레신카는 예전에 봤으니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과 달리 행동대장의 역을 하고 있다.

슌카린의 말에 레신카는 발끈했다.

“이봐, 보이는 것과 다르다니? 신입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레신카의 말을 무시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그게 익숙한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의 말을 끊어 먹은 레신카를 오히려 한 번 노려본 슌카린은 덧붙였다.

“참고로 아직 2명 더 있으나 사정상 오지 못했다.”

“사정?”

“그 둘은 신분이 귀족이라서 함부로 운신하기가 힘들다. 그 둘은 군사 훈련과 자금을 도맡아서 관리하고 있지.”

‘그렇구나.’

모두의 소개가 끝나자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다소 긴장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전 루시아입니다. 무슨 일을 맡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잘 부탁드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레신카를 제외한 다른 4명의 이름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예상과는 다소 다른 분위기여서 당황스럽긴 하지만 단순히 계약서를 쓰는데도 사람을 감시하는 조직이라면 굳이 오래 있고 싶지는 않았다.

벗어날 방법은 여기서 지내다 보면 생각이 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아이와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파이팅 하자고.

슌카린은 그녀에게 서류를 나누어 주었다. 조직의 간단한 운영 원칙 같은 것이었다. 그는 서류에 있는 자료를 토대로 조직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은 너에게 모두를 소개해 주는 날이기 때문에 다들 민얼굴이지만 평소에는 다들 수이카가 입은 옷을 입고 복면을 써서 얼굴을 가린다. 혹시 모를 위험과 보안 때문이지.”

또한 그는 평소에는 다들 위장 직업을 가지고 있다가 정해진 기간이 되면 편지나 전서구 등을 통해 모임을 가진다고 했다. 서로가 알고 있는 것은 암호명밖에 없기에 모두 본명이 아니라고 했다.

조직 간부들이야 자신의 본명을 쓰지만 웬만한 조직원이라면 그러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 또는 자신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동료들을 위해서도. 그렇기 때문에 만약 생포 당하더라도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을 수 있었다.

혹은 자신의 이름도 새어 나가지 않는다.

‘상당한 보안을 갖추고 있어. 대단한데.’

게다가 모이는 날짜는 늘 바뀌며, 조직원 등급에 따라 열람할 수 있는 정보의 등급이 다르다.

“루시아, 네 말마따나 넌 앞으로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 너를 S급 조직원으로 승격시켰다. 그렇지만 아직 임무를 받거나 성공시킨 것은 아니니 열람 등급은 A급이야.”

“임무?”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한다. 그런데 넌 아직 훈련도 이수하지 못했고, 임무를 성공시킨 적도 없으니 서류상으로는 S등급이어도 권한은 딱히 없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S급 조직원이 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빨리 여러 임무들을 성공시켜 열람 등급 S급에 도달해야 했다.

“그리고 훈련 과정을 마치고 나면 레신카와 함께 행동대장으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네 이름은 정체를 들킬 염려가 있으니 암호명을 정해.”

확실히 루시아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녀는 슌카린의 말에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이름을 내뱉었다.

“에이니.”

“에이니로 하겠다고?”

“네.”

정말 무심결에 나온 이름이었다. 에이니라는 이름은 라이넨이 자신과 그 사이에서 만약에 딸이 태어난다면 지어 주고 싶어 하던 이름이었다. 그녀의 눈에 동요가 살짝 일었으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이니라니, 괜찮은 이름이군.”

“너랑 잘 어울리는데?”

“……감사합니다.”

또다시 다른 조직원들이 떠들기 시작했으나 슌카린은 그들을 진정시켰다.

“그러도록 하지. 그럼 이만 해산.”

그렇게 모임이 파하였다.

*   *   *

당분간은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훈련을 받아야 하지만 지금 훈련 담당자가 다른 임무를 위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나 그녀는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생각을 비워 버리고 싶었다. ‘에이니’라는 이름을 지을 때 오랜만에 그가 떠올랐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애써 잊고 지냈는데 다시 떠올랐다.

“…….”

괴로웠다. 그리고 더 싫은 것은 그를 생각할 때 아직도 반응하는 마음이었다. 비록 미약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것마저도 괴로웠다.

‘나를 이렇게 만들고, 루카민이 죽는 데 일조한 남자가 아직도 좋은 거야?’

그녀는 싫었다. ‘처음’에 눈뜨게 해 주었지만 그녀의 마지막 것들을 빼앗아 간 남자. 애증의 존재.

그녀는 은은하게 밝아 오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분과는 다르게 달빛은 한없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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