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무너진 왕국
레미우스 왕국의 작은 영지에서 시작된 반란은 순식간에 온 나라를 뒤덮었다. 눈을 뜨면 한 영지가 무너지고, 귀족이 죽고, 백성이 죽고, 불에 타 모든 것이 사라졌다. 혼란과 광기의 도가니가 된 나라는 이미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죽여라!”
“저들을 몰아내라!”
“뭐 하느냐? 저놈들을 끌어내지 않고!”
순식간에 수도까지 타고 올라온 그 광기는 이미 아무도 제압할 수 없었다. 제압하면 제압하려 할수록 그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지기만 하였다. 성문 앞에 서 있던 병사들은 두려움에 도망쳤다.
“으아악!”
“사람 살려!”
도망친 병사들을 내버려둔 사람들은 힘을 합쳐 성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성문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불을 꺼라!”
“저들을 죽여라!”
“저 망할 것들을 끌어내려라!”
후계 싸움으로 바쁜 왕족들은 백성들의 불만, 반란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배를 불리기에 바쁠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갑작스러운 반란 소식에 당황했다.
“막아라!”
그들은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게 정말 말로만 듣던 민란이라는 사실이 무서웠다. 왕족들은 기사와 병사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비밀 통로로 도망치려 했다.
“폐하, 도망쳐야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이쪽입니다!”
그러나 궁을 포위한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어디로 가도 저들을 죽이기 위해 누군가가 달려왔다.
“으, 으아악!”
“살려 줘!”
왕족들은 언제나 마음 깊이 얕잡아보던 백성들이 자신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려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그저 살려 달라고만 빌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앞을 막는 왕족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다 죽여야 해!”
“으아악!”
“폐하를 지켜라!”
“아, 아바마마!”
이곳은 이미 지옥이었다. 곳곳에서는 불이 타올랐고, 불씨가 튀겼다.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와 함께 비명 소리, 서로가 서로를 찌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유키르는 그걸 그저 인형처럼 바라보았다.
“저기 왕족이 있다.”
“죽여라!”
“안 돼! 저자는 살려 둬야 해.”
유키르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무기를 휘두르려던 사람들은 한 사람의 말에 멈췄다. 그 사람은 이번 반란의 시작 때 사람들을 이끌었던 남자였다. 남자의 말에 그들은 진정하고 유키르의 손목을 묶고 질질 끌고 다녔다.
“누구야?”
“죽이지 말래.”
“왜?”
사람들은 웅성거렸으나, 남자는 단언할 뿐이었다. 저 여자는 죽이면 안 된다고. 외국인 출신이라서 큰일 날 수도 있다고.
“그럼 안 되지.”
“살려 놓자.”
“그럼 이제 저 여자는 어떻게 되는 거야?”
사람들의 반응이 누그러졌다. 그렇게 남자는 간신히 유키르를 살려낼 수 있었다. 저 여자가 얼마나 이용 가치가 높은데 그리 죽이면 쓰나.
‘우리가 딱 갖고 놀기 좋은 꼭두각시인데 죽이면 안 되지.’
남자의 정체는 바로 레신카였다. 레신카는 에이니(카니벨라)가 임무를 완수하자마자 자신의 직속 부하들과 함께 레미우스 왕국 붕괴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정말이지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라의 체계는 무너졌고, 욕심에 가득 차올랐던 귀족들과 왕족은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강이 피가 되어 온 나라에 흐르고 있었고, 화가 가득했다. 모두가 원한에 가득 차서 상대편을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레신카는 이것이 너무 듣기 좋았다. 아레마이의 모두가 원하는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인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있을까.
“왕족들을 죽였다!”
“살아 있는 자는?”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주위에는 이제 고깃덩이가 되어 버린 사람들만 가득하였다. 여러 신체 부위가 널브러져 있는 참상에도 레신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
“왕족들 다 죽었으니 우리가 왕이 되는 거야?”
“진짜?”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레신카는 피식 웃었다. 무슨 소리야. 여기 우리가 사용할 왕족이 떡하니 있는데.
그는 사람들을 진정시킨 후, 유키르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렇게 유키르는 순식간에 왕이 되었다. 사람들은 똑같은 왕족이 왕이 되었다고 반발하기도 했으나 레신카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럼 네가 지금부터 이 나라를 다스릴 자신이 있어? 마음대로 하는 대신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데? 정책 정하는 건? 주변 나라들의 견제는?”
그 말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딱 봐도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데 글자도 모르는 저들이 그런 것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레신카의 말에 따라 유키르를 새로운 왕으로 올렸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군.’
* * *
레신카가 주도하여 레미우스 왕국을 점령하는 것에 아레마이의 간부들은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카니벨라는 그것을 보며 자신의 행동이 한 나라의 붕괴를 불러왔다는 사실에 참으로 놀라웠다.
“항상 이렇게 성공하는 건가요?”
“늦어도 차근차근 밟아 가며 이루는 것이 우리의 정신이다.”
“네 임무 또한 우리의 일을 이루어가는 것에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군요…….”
그렇지만 그녀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1대 대장의 유언에 따라 대륙 정복에 힘쓴다는 그들의 사상은 정말이지 헛된 아이 같은 생각이었다. 그것을 통해 저들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예전의 그녀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바로 복수였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녀는 그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제는 이곳에서 벗어나 라이지에게 어머니라고 불리면서 살고 싶었다.
그래, 그것이 다였다.
‘어머니…….’
물론 그녀는 정말 진실을 알고 싶었다. 누가 어머니를 죽였을까.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걸고 찾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캐려 해도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만큼 위험했다.
그래서 포기했다. 그녀의 딸이 너무나도 소중하니까. 모두가 죽거나 배신한 지금, 라이지는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녀는 진실을 포기하더라도 단 하나 남은 핏줄과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위해서 이 조직에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제 무엇을 하면 되지, 슌카린? 빨리 말하라.”
대륙 정복이라는 저 허황되고도 말도 안 되는 일을 실제로 해내고 있는 이 거대한 조직에서 말이다.
“이제 우리 일을 할 차례이지.”
슌카린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레미우스 왕국의 지도를 꺼내 펼쳤다. 반란이 시작된 마을에서부터 수도까지의 여러 곳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반란에 휘말리지 않은 영지들이었다.
“이들을 정복해야지.”
“언제까지?”
“최대한 빨리. 지금 움직이면 된다.”
그녀는 슌카린이 내리는 여러 지시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의 임무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뭐가 이렇게 할 일이 많아?”
“뒷수습이 쉬운 일인지 아나?”
“야, 내가 이걸 어떻게 다 관리하니? 내 피부 망가지면 책임질 거야?”
옆에서 칸나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겪으면 겪을수록 의외로 시끄러운 자들이었다. 저들의 저런 모습을 보면 볼수록 괴리감은 커져만 갔다.
“그럼 귀족들도 채워야 할 텐데요? 반란으로 인해 귀족들 대부분이 죽었지만 반란군 중 귀족 작위를 받을 만한 자가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시카온이 명단을 내밀었다. 반란군 중 섞여 있던 아레마이 조직원들과 이용할 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런 인력을 어디서 다 구해 오는지 알 수가 없군.’
대부분이 라소니 왕국민이면서 아레마이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사생아, 고아, 빈민가, 하위 귀족 가문 출신들이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해 알지 못한 그녀는 그저 수많은 사람들이 아레마이에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게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만큼, 저들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얼마 가지 않아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게 되겠지. 그녀는 그러한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무서웠다.
서류를 펄럭이던 그녀는 문득 생긴 궁금증에 물었다.
“그런데 이제 왕이 될 꼭두각시는 누구인가요?”
“지금은 유키르 폰 레미우스, 과거에는 유키르 엔티르. 라소니 왕국 출신 귀족이다.”
“……라소니 왕국 출신? 그런 자가 왜 거기 있지요?”
“카니벨라 공주가 도망쳐 실종된 이후 대타로 온 여자지.”
그녀는 의아함과 함께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함을 느꼈다. 왜 자신의 이름이 여기서 나오는 거지? 설마 내가 탈출해서 대신 끌려온 거야?
그녀는 그게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늘 잔혹했다. 간부들의 대화를 들으며 그녀는 속으로 경악했다.
“카니벨라 공주가 실종되었을 때는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는데 이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다니.”
“애초에 루미니르 제국에서 죽었다고 발표했었지 않나?”
“넌 그걸 믿는가? 절대 죽었을 리가 없어. 루미니르 제국이랑 거래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여자는 반드시 살아 있어. 대장이 말씀하셨으니까.”
“그렇다면 찾아야 하는 거 아냐?”
“그럴 시간 있나? 없으니 일단 중요도에서 밀려난 것뿐이다. 언젠가는 다시 시작할 테니 걱정 말도록 해.”
“…….”
정말 수많은 대화들이 그녀의 귀를 통과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유키르의 이야기밖에 남지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 자신 대신 희생되어 버린 안타까운 유키르에게 죄악감을 느꼈다. 미안함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속에서 역겨움이 차올랐다. 아무렇지도 않게 한 사람을 지옥에 넣어 버린 저들과 그리고 그걸 이때까지 몰랐던 자신에게.
유키르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 한 가문의 귀족 영애로 태어나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며 자신이 생각한 정책을 마음껏 펼쳐 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국에 끌려와 짐승처럼 취급당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나중에 꼭 구해 드릴게요…….’
그녀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레마이가 위험한 이유, 이곳에서 탈출해야 하는 이유, 이들을 무너뜨려야 하는 이유 한 가지를 더 새겼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강하게 다잡았다. 힘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