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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다시 일어서다 (43/93)

42. 다시 일어서다

라이넨은 이번 전쟁이 끝나면 다시 자신의 의무를 착실하게 지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제일 먼저 자신의 방에 비치는 징벌의 궁을 보수하기로 했다.

이때까지 그는 저 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절망감이 피어올랐으니까.

처음에 그는 카니벨라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다 타버려 재밖에 남지 않은 곳을 그는 계속 파헤쳤다. 황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마치 네가 직접 보고 인정하라는 것처럼.

<전하, 그만하십시오! 그 사람은 비전하가 맞습니다!>

그의 행동을 참다못한 카샨이 말렸다. 그는 그때서야 시신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고, 카니벨라의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움에 그는 주저앉아 소리를 질렀다.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눈물이 펑펑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옆에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울었다.

<아니야, 너와 난 현실 가운데 있어. 그러니 나를 만져 봐. 느껴지지 않아?>

그의 머리에 마지막으로 그녀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아니, 난 이제 네가 느껴지지 않아. 네 촉감이 기억이 나지 않아.

<애초에 우리는 만나서는 안 되었어. 그랬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왜 그렇게 말해? 무슨 일이기에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떠나가 버린 거야?

매일매일, 그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새겼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은 다 죽게 된다는 것을.

‘형님도, 어마마마도, 비도 내 곁에 있어서 죽었어.’

그래서 계속 어두운 세계에 빠져들었다.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었지만 한 가닥 남아 있는 의무 때문에 그저 기계처럼 일했다.

그렇지만 자리에 대해 책임을 지라는 황제의 말과 전쟁 속에서 보았던 처절하게 싸우던 병사들 덕분에 그는 확실하게 느꼈다.

“슬픔은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언제나 붙잡아 두는 저 징벌의 궁을 보수하기로 했다. 그녀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까지나 그의 안에 있다.

단지 더 이상 절망에 젖어 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짐하는 그의 앞에 카니벨라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그는 단번에 이곳이 꿈임을 자각하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꿈으로나마 볼 수 있어 좋았다.

“오랜만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

“그래, 오랜만. 요즘 뭐 하고 지냈어?”

“난, 요즘 안 좋은 일을 하고 있어.”

“안 좋은 일?”

그녀가 말하는 안 좋은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는 그저 이렇게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는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좋아서.”

“……그래?”

그의 말에 다소 기묘하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이지만 그는 그녀의 표정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그녀는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말했다.

“꼴사납다고 욕하려고 찾아왔는데 정신 차려서 다행이네.”

“날 보고 있었어?”

“어쩌다 보니.”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피식 웃었다.

“잘 가. 그리고 이런 일로 날 더 이상 부르지 마.”

“그래, 고마워.”

그는 웃으며 꿈에서 깨어났다. 몇 년 동안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툭툭 털고 일어나서 달릴 것이다. 형님께서 주신 황태자 자리, 반드시 지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황제에게 자신이 다시 온전히 복귀할 것임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황제 폐하께 내가 왔다고 알려라.”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동안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되었다.”

황제는 툴툴거리며 대꾸하였다. 그러나 그는 저게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황제는 아들의 그런 시선을 받았으나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네가 황태자가 되지 않는다면 죽어야 한다. 알고 있겠지? 난 그런 꼴은 절대 못 본다.”

라이넨은 전 황후가 남긴 유일한 핏줄. 황제는 지금의 황후와 아들 라이부스 또한 사랑하지만 라이넨은 첫 사랑이 남긴 유일한 결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는 절대로 라이넨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황제의 진심에 그는 대뜸 말했다.

“제 몸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무슨 소리냐?”

“이번에 전쟁터에 나가긴 했지만 쉽게 지치더군요. 이런 몸 상태로 갔다가는 금방 지칠 것입니다.”

실제로 그가 이번 전쟁 당시 후방에서 있었던 것에는 그러한 사정이 있었다. 체력 훈련을 멈추니 금방 지쳤다. 그래서 선두에 나가 싸울 수 없었고, 기사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했다.

“확실한 것이냐?”

“이번에는 진짜입니다. 입증하겠습니다.”

그는 단단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했다. 아들의 단언에 황제는 속으로 한숨 쉬었다. 이놈이 해 달라고 저렇게 사정하면 안 넘어갈 수가 없었다. 황제는 아들에게 약했다.

“그래, 다녀오거라. 단, 기한은 최대 2달이다. 그 이상 넘어가면 강제로 귀환시키마.”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요양 길에 올랐다. 그리고 카샨 역시 함께였다. 카샨은 갑작스러운 요양 행에 당황했다.

“제가 어째서 이곳으로 따라오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전하?”

쉬러 가는 것이야 좋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쉬는 게 아니고 저 빌어먹을 친구가 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찌하든지 가서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 내가 무슨 시종이야? 왜 내가 너 쉬러 가는 거까지 따라가야 하냐고!’

그는 대놓고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라이넨은 그런 죽마고우의 표정은 일절 보이지도 않은 듯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이제부터 내 수석 시종이다. 정보국장이 아니다.”

“네, 네? 뭐라고요?”

“어차피 정보국장 일을 할 때도 넌 기존 업무를 포함해 시종일, 보좌관 일까지 다 했지 않았나?”

실제로 카샨은 정보국장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일을 다 했다. 그래서 기존의 수석 보좌관이나 시종들에게 불만 어린 말도 많이 들었다. 카샨이 워낙 능력이 좋기도 하고, 라이넨과 합이 잘 맞는 부하들이 별로 없기에 일어난 참사였다.

그렇지만 카샨은 정보국장 일을 퍽 좋아했다. 그렇기에 아무리 제 친구가 상사여도 자신의 일자리를 마음대로 바꾸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그렇다고 남의 일자리를 마음대로 바꾸십니까, 전하?”

“이미 상의 다 된 일이니 땍땍거리지 말도록.”

“그럼 우리 가문은 어쩌라는 겁니까! 후계자가 저인데!”

“후계자는 백작이 알아서 하면 되는 일이니 신경 쓸 필요 없다.”

“…….”

카샨은 제멋대로인 이 빌어먹을 친구를 한 대 때리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이놈은 자신의 상사이자 황태자였다. 그때, 문득 생각난 것에 카샨은 라이넨에게 소곤거렸다.

“근데 나 이제 후계자 아니라서 마법에 대해서 알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어차피 내가 황제가 되면 넌 내 수석 시종이 되어 있을 테니 상관없다.”

“하긴.”

“게다가 넌 원래 알아서 안 되는데도 알고 있었지 않았나.”

“…….”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개인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이 삭제된다면 알지 못해도 매우 찝찝할 것이니까.

“다행이네.”

카샨은 한숨을 푹 쉬고는 기지개를 켰다. 욕하고 싶지만 이미 일은 일어났고, 보직을 되돌리려면 이놈이 마음을 바꿔야 하는데 절대 그런 놈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접었다.

“월급이나 왕창 줘라, 이 자식아.”

“내가 돈으로 서운하게 했던 적 있나?”

“정보국장 할 때보다 배로 달라고 이놈아!”

“생각해 보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앞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카샨이 계속 씩씩거렸으나 무시했다.

‘아, 평화롭다.’

그런 평화로움은 요양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조용한 마을이었다. 그렇지만 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으로 황족들이 꽤 자주 이용하는 요양지였다.

“전하, 이곳에 계실 동안 보필하게 된 유리키스 자작입니다.”

“그렇군. 잘 부탁하지.”

“오랜 시간 오시느라 지치실 것으로 사료되어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길.”

자작이 그를 목욕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그사이에 하녀 한 명이 수건과 갈아입을 새 옷을 가지고 그의 뒤에 섰다.

“시중을 들어 드릴까요?”

“아니다. 나 혼자 할 수 있으니 물러나도록.”

“네, 알겠습니다.”

나무로 된 욕탕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았다.

“본래는 여기에 너와 같이 오려고 했는데.”

원래 이곳은 그녀와 함께 오려고 했던 곳이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니 임산부가 오기에도 부담스러운 곳이 아니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참…… 나도 별수 없구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목욕을 끝내고 옷을 입었다. 창밖을 보니 활기찬 사람들의 삶이 보였다.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저기서 너와 함께 있고 싶었어.”

홀로 있으니 그녀가 생각났다. 이건 막을 수 없었다. 본래 그는 사랑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읽던 로맨스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서로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사랑하는 주인공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건 다 거짓말이라고. 사랑이 영원했으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렸던 그는 황제가 현 황후와 재혼한 것이 어머니를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랑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카니벨라를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넌 나를 바꿨지.”

그랬던 그가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년처럼 사랑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를 사랑해 주었다. 그는 그게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구름 위를 밟는 것처럼 황홀했다.

게다가 둘은 같은 상실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에 서로에게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휴식처가 되어 주었고, 치료제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사라졌으니 그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래서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이제 네가 없는 세상에 서서히 적응하려고 해.”

그러나 그녀는 죽은 사람이고 그는 산 사람이었다. 그래서 살아가야 했다. 정말 끔찍하지만, 감당하기 힘들지만 그는 그녀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 했다.

그는 그녀에게 허락을 구하듯 말했다.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마치 그녀가 옆에 있는 것처럼 계속 입을 열었다.

“그러니 서운해하지 마. 내게 화가 난 게 있으면 꿈에서라도 알려 줘.”

그래, 우리의 끝은 제대로 된 화해 없이 끝나 버렸지. 그래서 난 결국 네게 진실을 들을 기회를 놓쳐 버렸지.

그는 창문에서 눈을 돌렸다. 이제는 복귀를 위해 힘써야 할 때였다. 그는 부지런히 체력을 회복했고, 수도로 복귀하였다.

이제 다시 의무를 다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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