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감내해야 하는 일
루미니르 제국은 막강한 황권을 지닌 대륙의 유일한 제국이었다.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는 주요 비결은 마법의 존재였지만 역대 황제들의 통치력 또한 요인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황제 때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라이넨이 온전한 모습으로 황실에 복귀하기 위해 요양을 떠난 사이, 황실은 난리가 나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는 라이넨에 대한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차기 황제인 황태자의 정신 상태가 약해빠졌다는 비판이 제기 되었다. 귀족파들은 이때를 틈타 황태자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법 계승의 비밀을 알고 있는 4대 공신 가문 이외의 황태자파는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라이넨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방황하는 사이, 귀족파의 발언권이 높아졌고, 황태자파는 반대로 위축되었다. 지금까지는 4대 공신 가문이 어떻게든 받쳐 주고 있었지만 언제 모래성이 되어 무너질지 모른다.
‘하루빨리 우리 쪽으로 분위기를 돌려야 한다.’
라이넨은 주제 모르고 날뛰는 귀족파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라이부스 또한 짜증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기 파벌을 그냥 놔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라이부스의 꿍꿍이가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그렇지만 최근에 느끼는 것은 동생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일단 지금은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우선이다.’
황제가 강력하게 황태자 자리 유지를 선언한 이상, 그는 반드시 황제가 될 터였다. 게다가 그는 다시 잘해 보겠다고 다짐한 자신에게 찬물을 끼얹으려고 하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바마마, 계십니까.”
“들어오도록.”
그는 복귀하자마자 황제를 찾아갔다. 인사도 할 겸,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황제가 그에게 나쁜 아버지라지만 일을 의논하기에 가장 좋은 상대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무슨 일이냐?”
“아바마마께서는 지금 세력이 어떻게 양분되어 있을지 잘 알고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
현재 세력은 현 황태자 라이넨을 지지하는 황태자파, 2황자 라이부스를 지지하는 귀족파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라이넨이 잘해 주고 있었기에 이때까지는 귀족파가 크게 힘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카니벨라의 죽음 이후 공식 석상에 서지 않자 문제가 생겼고, 귀족파는 그것을 약점으로 삼아 끊임없이 물어뜯었다.
“잘 알고 있다.”
“그럼 어찌 라이부스에게 중재를 청하지 않습니까?”
본래 후계자가 정해지면 다른 황족들은 해당 후계자를 지지하게 되어 있다. 여러 사례도 있었고, 그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관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족들이 이렇게 싸우는 경우가 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2황자 라이부스 쪽에서 특별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자신의 업적을 감추지도 않았고, 라이넨의 자리를 위협하려 드는 귀족파에게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것에 대해 그저 짜증만 나던 라이넨은 최근에는 의문이 들었다. 왜 동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에 대해 알고 싶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황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황제가 뜸을 들이는 모습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했지만 파고들기에는 귀찮았다. 그리고 지금은 흩어지려는 자신의 세력을 다시 규합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급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약혼이다.”
그 말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카니벨라가 죽은 지 꽤 시간이 흘렀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옆에 두는 건 역시나 꺼려졌다.
“싫으냐?”
“…….”
황제는 그의 기색을 단번에 읽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가 그 여자를 잊지 못했음은 알고 있다.”
“…….”
“예전처럼 네 세력이 공고하다면 별문제가 없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황제는 라이부스가 언제 개입할지 알 수가 없었다. 라이부스의 진심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하루빨리 라이넨의 상황을 안정시켜야 했다.
“네, 알겠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당장 혼인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약속만 하는 것이 다였기에 원한다면 언제든지 깰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황태자 순례다.”
“황태자 순례요?”
황태자 순례. 황제가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자는 취지에서 초대 황제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제국만의 관례였다. 순례를 시작하면 황태자는 대략 1~2년 동안 황궁에서 떠나 제국의 모든 곳을 돌아보며 백성들과 소통한다.
“너무 갑작스럽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떠나는 것이다. 귀족들 사이에서 뒷말이 나올 가능성이 컸다. 말이 황태자 순례지, 실상은 그냥 일하기 싫어서 놀러 다니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약혼이라도 하라는 것이다.”
“그렇군요…….”
“내 몸은 이미 쇠약하다. 네게 빨리 계승을 해야 하는 처지다.”
“……아바마마.”
결정적으로 황제에게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의 걱정스러운 기색을 읽은 황제가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그리고 너도 알지 않느냐. 이미 갔다 와도 이상하지 않을 시점이다. 또, 너무 더워지기 전에 떠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단다.”
“…….”
황제가 저리 말하니 그로서는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딱히 없었다. 그리고 황제의 말처럼 마법 계승이 걸렸다. 계속 시간을 끌기라도 했다가 마법 계승을 받지 못한 채 황제가 죽어 버린다면 정말이지 난감한 상황이 될 테니까.
“그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네가 보고 느낄 것들을 앞으로 잊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네, 충고 감사드립니다.”
“그럼 가 보거라.”
“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카샨이 일어나 그를 반겼다.
“지금 당장 우리 파벌 쪽에서 미혼인 영애들을 조사해서 내게 말해. 오늘까지야.”
“네?”
“급하니 지금 당장 부탁하지.”
카샨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곧장 조사에 착수했다. 카샨이 자신의 일을 하는 사이, 그는 자신의 책상에 쌓인 서류를 말없이 결재하기 시작했다.
‘저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라면 저들 세력 쪽에서 사람을 뽑으면 되지만…….’
그렇게 되면 나중에 파혼했을 때 일이 복잡해진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세력이 다시 단단해질 때까지 얼굴 마담 역할을 할 사람이었지, 향후 황후가 될 여인이 아니었다.
그는 혼인할 생각이 없었고, 귀족파에게 꿍꿍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면 같은 파벌 내에서 뽑는 게 나았다. 나중에 저들에게도 설명하려면 꽤 귀찮아지겠지만 같은 편이라면 납득시키기는 쉽다.
그리고 루미니르 제국에서 혼인을 해서 후계를 잇는 것도 결국은 마법 계승 때문이다. 그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마련한다면…….
“찾았습니다.”
카샨은 황태자파 소속 미혼 영애 명단을 가져왔다. 그는 그녀들의 이름, 가문, 얼굴, 성격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한 여자를 가리키며 카샨에게 말했다.
“내일 이 영애랑 약속 잡아.”
* * *
카일라 라이문타는 갑작스러운 라이넨의 호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와 라이넨은 라이문타 후작이 황태자의 파벌에 속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었다.
“왔군.”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그의 등장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시녀들이 잘 보이라고 입혀 준 값비싼 드레스에 땀이 묻을 정도로 긴장했다.
“영애를 놀라게 하려 부른 것은 아닌데.”
그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애썼지만 그녀는 더 긴장할 뿐이었다. 말하는 그의 표정은 지극히 무표정했고, 말투 또한 차가웠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라이넨이 황태자고, 위압감이 있는 자이지만 그녀는 죄를 지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좀 더 당당해져도 되었다.
‘딱이군…….’
라이넨은 카일라가 움츠렸던 어깨를 피고, 허리를 곧게 펴고,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는 편한 옷에 맞게 편한 기색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자네가 딱이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원하는 인재.”
“그게 무슨…….”
그는 간략하게 그녀에게 해 주었으면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위장 약혼자로 지정했다는 사실에 눈이 동그래졌다.
“전하, 그게 어떤 일인지 아십니까?”
“어차피 네가 원하는 일은 이런 황궁에서 말라 가는 일 따위가 아니지 않은가?”
“…….”
“나는 네가 라이문타 가문을 잇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후작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것은…….”
그녀는 보통 영애들과 관심사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정치를 하고 싶어 했고,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라이문타 가문을 잇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네가 날 도와준다면 차기 라이문타 후작은 네가 될 것이다.”
그녀는 그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토록 원했지만 손에서 떠날 것 같던 것이 다시 잡힐 기회가 주어졌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기회를 놓칠 정도의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곧장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카일라 라이문타, 전하의 명에 따릅니다.”
“간단하다. 넌 그저 내가 황제가 되기 직전까지 내 약혼녀 노릇을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해 주지.”
“제게 이런 기회를 주심에 감사하여 감히 전하를 쳐다보지도 못하겠사옵니다.”
그녀의 말에 그는 피식 웃었다. 어차피 그 또한 그녀를 이용하는 것에는 똑같은 입장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은 없었지만 짐짓 자애롭게 말했다.
“앞으로 황궁에 자주 찾아오도록 해라. 의심하는 자들에게 쐐기를 박아야지.”
“예,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그녀는 자리에 다시 앉으며 그와 형식적인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했다. 계획은 차곡차곡 쌓여 갔고, 그는 그녀의 일 처리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럼 그날 보도록 하지.”
그리고 라이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일라와의 약혼 사실을 발표했다. 자기 파벌 안의 영애와 약혼을 한다는 사실에 황태자파는 안도했다. 그리고 다시 라이넨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다.
귀족파는 황제가 되어야 할 사람이 중심이 없는 것 아니냐고 비난했다. 그렇지만 라이부스의 제지와 변하지 않는 약혼 사실에 밀어붙일 구실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라이넨의 황태자 순례일이 다가왔다. 성문 밖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짐을 싸고 있었다. 그는 주변 시선을 위해 카일라를 같이 데리고 나왔다.
“내가 돌아올 동안 이곳을 부탁한다.”
“걱정 마십시오. 사교계는 제가 잘 잡고 있겠습니다.”
“귀족파의 정세도 파악할 수 있으면 파악해 주길 바란다.”
“예, 전하를 실망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히 들어 보면 누가 봐도 주군과 신하의 대화지만 멀리서 본 둘의 모습은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 누가 봐도 멀리 가는 연인을 걱정하는 것으로 보였고, 이것이 바로 그들이 의도한 것이었다.
“다녀오지.”
“예, 다녀오십시오.”
말에 올라타니 카샨이 불평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전 또 전하를 따라가는 것입니까?”
“넌 내 수석 시종이니까 따라가는 게 당연하지 않나?”
“아, 정말이지…… 전하께서는 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십니까?”
“그렇게 만든 건 네가 아니었나.”
“뭐라고요?”
둘은 나란히 말을 달리며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그런 사이, 그들을 태운 말들은 순식간에 수도 밖으로 향했다.
라이넨의 인생을 바꿀 순례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