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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황태자 순례 (45/93)

44. 황태자 순례

“전하, 이제 내리셔야 합니다.”

라이넨의 주변을 둘러싸며 호위하던 기사단장이 그에게 말했다. 그 말에 그는 로브를 쓰고 품 안에 가지고 있던 황실의 보물을 꺼냈다. 모습을 바꿔 주는 액세서리로, 그는 반지를 꺼내 자신의 왼손 약지에 꼈다.

그러자 그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갈색 머리카락으로, 황금색 눈동자는 갈색 눈동자로 바뀌었다. 전체적으로 평범해진 인상으로,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행인 1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는 말 위에서 내렸다. 숲의 입구로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음산한 분위기까지 자아냈다. 그는 무심하게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여기서부터 걸어가면 되는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기사단장은 자신의 휘하에 가장 강한 기사 3명을 그에게 붙였다. 기사단장 또한 그를 따라가고 싶었으나, 황제라는 주군이 존재하는 한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재빨리 인사를 한 기사단장은 그들이 타고 온 말들과 함께 수도로 돌아갔다.

“그럼 출발하지.”

“예!”

라이넨은 기사 3명, 카샨, 순례 기록자와 함께 길을 떠났다. 일행은 산을 타고 첫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황태자 순례는 황제가 되기 전, 황태자들이 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제국 안의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알기 위해서는 직접 체험해 봐야 한다. 탁상공론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실제와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역대 황제들은 모두 순례를 다녀왔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정책에 반영하여 백성들이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 왔다.

‘이래서 아바마마가 직접 체험해 보라고 하신 건가.’

마을마다 분위기는 다 달랐다. 어떤 곳은 영주의 치세가 좋아 잘 살아가고 있었다. 또, 어떤 곳은 영주의 마음은 좋으나 영지 상황이 잘 풀리지 않아 가난한 곳도 있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꼼꼼히 보았다.

배울 점이 많았다. 그 역시 이때까지 탁상공론으로 백성들의 삶을 살펴봤던 자. 서류상의 내용과 현실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것에 감사했다. 현실을 알게 된다면 앞으로 정책을 짤 때 백성들의 입장에서 짤 수 있었다.

늘 죽은 형님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생각했던 이 황태자 자리가 처음으로 그에게 진심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에 미안해하면서도 착한 형님이니 이해해 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부터는 보고되는 게 다소 허술한 곳입니다.”

황제의 치세는 좋았다. 그의 아버지는 진정으로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제국은 너무 넓었다. 그래서 언제나 나쁜 놈은 있었고, 사각지대는 존재했다.

“이제부터 각오해야 한단 말인가?”

“예, 그리고 전하께서 처신을 잘하시면 이곳을 좀 더 괜찮은 곳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영주를 보낼 명분이 생긴다는 뜻이었다. 그는 단번에 그 말을 알아들었다.

“들어가도록 하지.”

그러는 사이, 영지에 도착하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위화감을 느꼈다.

“왜 여자밖에 없지?”

농사를 짓는 것도 여자, 가게에서 장사를 하는 것도 여자,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도 다 여자가 하고 있었다. 남자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카샨, 왜 그런지 가서 알아보도록.”

카샨은 당장 이 지부를 담당하고 있는 정보 상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들은 여관으로 향했다.

“여기서 제일 비싼 방 5개랑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갖고 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가 계산대에 앉아 그들의 주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방에 짐을 풀고 식당으로 내려왔다. 역시 사람은 휑하게 비어 있었다.

“주인장, 무슨 일이 있습니까?”

5명 중 가장 인상이 순박한 자가 물었다. 그러나 노인은 머뭇거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음식을 내올 뿐이었다.

‘역시 무슨 일이 있어.’

어서 카샨이 정보를 가져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무장한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 여관에 외부인이 들어왔다는 제보가 있어서 왔다.”

험상궂게 생긴 기사가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빙 둘러쌌다. 호위 기사들은 재빨리 일어나 라이넨을 감싸며 섰다. 그는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 이곳에 여행을 온 것인데 이게 무슨 일이지?”

“외부인을 들이라는 허락 따윈 없었다.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냥 신분증을 제시했을 뿐이다. 여기 들어온 것만으로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인가?”

최근, 황태자가 순례를 시작했다는 정보가 귀족들 사이에서 퍼졌다. 언제 이곳에 황태자가 나타날지 모른다. 그래서 불안했던 영주는 외부인이 들어오면 그 즉시, 어떤 죄라도 만들어 내어 잡게 만들었다.

“너희가 죄를 짓고 이곳에 숨어들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네 말은 마치 우리가 범죄자인 것 같다만.”

“곧 귀하신 분이 오신다. 그분을 모시기 위해서 혹시 모를 위협은 모조리 제거해야 옳다.”

귀하신 분은 여기에 있다. 그가 바로 앞으로 오실 귀한 분이다. 그러나 저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는 차갑게 웃었다.

“우리에게 어떤 죄가 있는지 알고 싶군. 당장 대 보도록 해라.”

“그건 조사해 보면 알 노릇이다. 이들을 잡아가라!”

그러더니 곧장 라이넨을 비롯한 일행들을 모조리 포박했다. 기사들은 저항하려 했으나 가만히 있으라는 그의 눈빛을 보곤 곧장 얌전히 끌려갔다.

“이곳에서 죄를 반성하고 있도록!”

그렇게 말하며 그들은 영주 성 지하 감옥에 모두를 내동댕이치듯 집어넣었다.

“전하, 어째서 저들에게 그냥 끌려오신 것입니까? 이러다가 모두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흥분하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그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어디에 있든 카샨은 알아서 잘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영주의 꿍꿍이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어차피 나중에 다 밝혀질 것이었다.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제가 없는 사이 잡히시면 어떡합니까.”

그리고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감옥의 어둠 속에서 한참 동안 기다리던 그들은 카샨의 목소리가 들리자 일어났다.

“소란을 피우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들은 카샨의 수하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영주 성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정보 상점 지하로 들어간 그들은 이 마을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중앙 정계로 진출하고 싶은 놈의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무슨 소리지?”

“곧 황제 폐하의 탄신일이지 않습니까? 귀한 것 진상하겠다고 영지민들을 착취한 겁니다.”

이곳을 통하는 숲에는 큰 새가 살고 있었다. 전설 속에 나오는 몬스터처럼 난폭하고, 덩치가 큰 동물이었다. 그 새는 엄청 아름다운 깃털을 가지고 있었다.

“잠깐, 그렇다면……?”

그 깃털을 가지고 황제의 코트를 만들어 진상하기 위해 남자들을 전부 데리고 간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일반 농부들이 몬스터 같은 맹수를 제대로 상대해 본 적이 있겠는가.

게다가 그 새는 멸종 위기종이기에 잡는 것부터가 불법이었다.

“하, 웃기는군.”

라이넨은 진심으로 웃겼다. 그런 걸 진상한다고 해서 황제가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둔함이 짜증 났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영지민들을 함부로 동원한 것에 대해 화가 났다.

“내 선에서 처리해야겠군.”

“네, 그러실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겠습니다.”

카샨은 그에게 증거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곧장 수도 감시대를 불렀다.

“내일이 기대되는군.”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앞으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겠다는 헛된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남의 희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행복을 염원하는 그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다음 날이 되었다. 어제와 달리 그는 자신의 용모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모습이 꽤 낯설었지만 그는 지체하지 않고 영주 성으로 향했다. 그가 들이닥치자 예상대로 영주는 놀라 나자빠졌다.

“저, 전하 여기는 어쩐 일로…….”

“순례 중에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는 싸늘하게 말했다. 영주는 아부하며 손을 싹싹 모았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렸다.

‘아직 코트도 완성되지 않았는데…… 어떡하지?’

애초에 라이넨이 자신의 악행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영주였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의 얼굴이나 익히게 만들자는 생각으로 온갖 진귀한 대접을 했다.

그러나 그는 우스웠다. 그 의도가 너무 뻔히 보였고, 그 역시도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기에 오히려 다행이었다.

“저희 영지에서 이번에…….”

그래서 저 헛소리도 성심껏 들어주었다. 자신에 대한 자랑으로 도배된 말은 들을 때마다 역겹기만 했다. 정작 주변 사람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언제 오려나…….’

그는 대충 한 귀로 흘리면서 깨작깨작 식사를 하던 중, 갑자기 감사대가 들이닥쳤다. 영주는 깜짝 놀랐고,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자를 체포하도록.”

“저, 전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잡아서 안 되는 멸종 위기종을 잡으려고 했던 것도 모자라 백성들을 네 사사로운 일에 함부로 사용하려 하지 않았나.”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강제 노역 서류를 영주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뒤에서 감시대 일원들이 새의 사체를 가지고 왔다. 이미 깃털이 거의 다 뽑혀 앙상했다.

“이, 이건!”

“변명할 기회 따윈 없다. 그러니 얌전히 끌려가도록.”

“아, 아닙니다! 수하들이 과잉 충성을 했나 봅니다!”

저렇게 말할 것 같았다. 그가 피식 웃자 카샨이 영주의 필적이 담긴 또 다른 서류를 가지고 왔다. 그는 보는 시늉을 하며 서류철을 덮었다.

“둘 다 네 글씨체로군.”

“그, 그건…….”

“쓸데없는 변명은 그만하도록.”

그는 그렇게 말한 채 뒤돌아 성 밖으로 나갔다. 감사대가 영주 일가를 포박했다. 뒤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는 저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영주민들이 질러야 했던 절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뒷수습을 부탁하지.”

그는 감사대의 대장에게 뒷일을 맡겼다. 대장은 그에게 부복하였다.

“예, 전하. 무사히 순례에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당연한 걸 가지고.”

그는 피식 웃었다. 문밖으로 나오니 다른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한다.”

앞으로의 순례길이 더더욱 기대되었다.

*   *   *

순례 길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여러 백성들을 보았다. 웃음이 떠나지 않는 자들에게는 더 큰 행복을 빌었다. 그리고 그늘이 져 있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싸웠다.

“아저씨가 너무 좋아요.”

“안 가면 안 돼요?”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백성들의 행복한 삶에 감화되었다. 그래서 일정은 점점 더 미뤄졌다.

“가셔야 합니다.”

발걸음은 언제나 잘 떨어지지 않았다. 저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 내가 있는 힘껏 저들을 위해 살겠다는 마음이 그의 마음에 심어졌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잊지 말라는 황제의 말을 따라 그는 자신이 겪은 모든 일들을 기록하고, 되새기며 어떻게 제국을 만들어 갈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야 ‘황태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예정했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이번이 마지막 마을입니다.”

“그렇군.”

아쉬웠다. 더 배우고 싶고, 더 저들을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자신의 의무를 다하러, 저들을 진심으로 품어 주기 위한 자리로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순례의 끝을 기념하기 위해 다소 성대한 행렬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대놓고 들어간 적은 거의 없었기에 뭔가 어색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진정한 생활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서 자신들을 대접해 준 영주의 집에서 탈출했다. 거리에서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즐거워하는 영주민들 사이로 계속 걸었다. 웃음꽃이 가득 핀 그들의 모습을 보며 그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걷던 그의 망막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쿵! 그는 자신의 심장이 떨어졌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의 귀에 낯익은, 그리워하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축제 어땠어?”

“정말, 정말, 좋았어!”

“그래? 라이지가 그렇게 말하니까 이모가 기분이 정말 좋아.”

“사실, 나는 엄마보다, 이모가 더 좋아!”

“……그래요? 우리 라이지는 누구 딸이라서 이렇게 착하지?”

그렇게 말하며 여인은 아이를 안았다. 아이가 안기자 검은색 머리카락과 파란 눈이 보였다. 아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그 시선에 본능적으로 달려가 여자를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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