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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침투 (46/93)

45. 침투

한편, 시스티아 왕국은 전쟁에서 패배한 대가로 엄청난 양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들은 항의했으나 먼저 침략한 사람들은 너희들이니 일절의 협상은 없다는 루미니르 제국의 답변만이 있을 뿐이었다.

왕국은 거대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일할 수 있는 장정들은 죄다 전쟁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사람이 급격히 부족해졌다. 남부 곡창지대에서는 당장 일할 사람이 없어 아우성이었다.

그렇게 일할 사람이 사라지자 생산량이 떨어지고, 생산량이 떨어지자 나라의 경제가 서서히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염병도 제대로 수습되지 않아 남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일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일단 왕은 전염병부터 해결하자는 생각에 병에 대해 조사했다. 그리고 약은 루미니르 제국에서만 나는 약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또 루미니르 제국에게 빚을 져야 합니까!”

“폐하, 저들이 다시 기세등등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대들이 말해 보도록.”

“…….”

“일할 사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이 병에 걸려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그대들이 직접 농기구를 들고 일할 것이 아니면 닥쳐라!”

“…….”

그야말로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루미니르 제국에게 가면 갈수록 밀리고 빚만 잔뜩 쌓였다. 왕국의 상황은 가면 갈수록 악화되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분노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것은 곧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유발했다. 날카로운 기운이 왕국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아레마이는 그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안정적인 루미니르 제국 쪽을 억지로 파고들기보다는 혼란을 틈타 재빨리 시스티아 왕국을 제 휘하로 만드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전쟁이 빨리 끝났군.”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슌카린?”

칸나의 질문에 슌카린은 시스티아 왕국의 지도와 파견 조직원들이 올린 서류를 번갈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왕국이 안정을 되찾기 전에 재빨리 아레마이의 수중에 놓을 수 있을까?

그때, 수이카가 문득 중얼거렸다.

“자중지란…….”

“……!”

슌카린은 그에 아이디어를 얻었다. 아무리 시스티아 왕국이 전염병, 전쟁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강대한 나라였다. 귀족들도 건재하고, 왕권도 힘이 있었다. 그랬기에 언제든 다시 재기할 우려가 있었다.

“아직 전염병 수습, 덜 되었다고 했었지?”

“네, 그렇습니다.”

슌카린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쩜 이렇게 상황이 원하는 대로 맞춰져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 저들끼리 싸우도록 하게 만들면 되겠군.”

“어떻게?”

모두들 궁금증을 가지고 슌카린의 말에 집중하였다. 슌카린은 레신카와 카니벨라를 보며 말했다.

“레신카, 에이니, 이번에는 너희들이 도움이 필요하다.”

“무슨 일이지?”

“시스티아 왕국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려야 하겠다.”

*   *   *

한동안 대기하고 있던 카니벨라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에이니, 지금 당장 시스티아 왕국으로 가도록.”

“무슨 일이십니까?”

슌카린은 그녀에게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그녀가 죽여야 할 사람과 해야 할 역할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하이라 후작가? 이곳은 시스티아 왕국의 핵심 세력 아닌가요?”

“그래. 넌 거기서 뮤이라 영애의 대역이 되면 된다.”

“그런데 제가 영애로 변장하더라도 후작이 알아차리면 안 될 텐데요.”

“후작 쪽은 이미 맡아 둔 조직원이 있다.”

“그렇군요.”

그녀는 임무의 방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들을 이용해서 왕국의 핵심에 접근하여 단번에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사이에 시선을 돌릴 만한 어떤 사건을 일으키겠지.

아레마이는 항상 그렇게 해 왔다. 뒤에서 항상 은밀하게 움직여왔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어왔다.

그녀는 곧장 출발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조직원들과 함께 국경을 넘었다. 왕국은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더욱 폐쇄적으로 변했다.

‘공기가 날카로워. 왕국이 꽤 크게 타격을 받았나 본데.’

대체적으로 모든 사람의 표정에서 시름이 묻어 있거나 날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그걸 보며 어찌 하늘에서 아레마이를 도와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나도 상황이 딱딱 맞아 들어가지 않는가.

아마 하이라 후작이라는 자를 죽이고 나면 본격적으로 모든 일이 시작될 것이다.

‘그 고위 조직원은 어디에 있지?’

그때, 다소 살벌한 기운을 가진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하이라 후작의 모습이었다. 후작은 이미 죽은 것 같았다.

“네가 나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기로 한 조직원인가?”

“네.”

그녀나 남자나 서로의 목소리를 어디서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일단은 임무에 집중할 때였다.

“이제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 여기서 대기하도록.”

남자는 이미 후작으로 변장해 있었기에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지붕 위에 있다가 딸(후작 부인은 오래전에 죽어 없다)을 처리하기로 했다.

늦은 밤이었다. 그녀는 눈을 제외한 모든 곳을 가렸다. 부하들을 바라보자 모두들 준비되었다는 표시를 했다.

“침입한다.”

그녀의 말에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사람들을 제압, 안으로 진입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그녀는 아레마이를 무너뜨리기에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건 나중의 일이니까, 일단…….’

그녀는 뮤이라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신의 손아래서 부들거리며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영애를 느꼈다. 눈을 꽉 감았다. 속으로 미안하다고 수십 번 소리쳤다.

푹!

몇 번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섬뜩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생기 넘치던 눈이 서서히 까맣게 변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발밑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자신의 겉가죽이 온몸을 죄어 오는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을 느꼈다.

바닥에 고여 있는 저 피가 마치 영애가 삼킨 비명 같아 무서웠다.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살인은 여러 번 하면 무뎌진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되어 버린다면 라이지와 절대 함께하지 못할 것 같았다. 더러운 영혼을 가진 자신이 어떻게 그 순수한 아이와 함께할 수 있을까.

그녀는 임무를 마치고 나온 조직원들에게 저들의 시체를 모조리 다 보이지 않는 곳에 버리라 명하였다. 자신이 직접 만지기는 무서웠으니까. 당장에라도 저 싸늘한 손이 그녀를 잡아 버릴 것 같아서.

“…….”

그녀는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장 변장을 완료했다(분장이긴 한데 화상 자국 때문에 인조 피부를 덮어써야 했다.). 이제, 그녀는 하이라 후작가의 하나뿐인 금지옥엽, 뮤이라였다.

그 사람의 생을 억지로 빼앗은 것도 모자라 기만하게 되었다. 그녀는 영혼이 되어 자신을 보고 있을 뮤리아가 어떤 심정일지 차마 상상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날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생각하였다.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나 때문에 희생된 사람들 모두를.’

그녀는 절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시스티아 왕국에 침입한 자들로부터 쉴 새 없이 서류는 날아왔다. 다른 조직원들은 그걸 기반으로 또 밤낮없이 회의를 하느라 바빴다. 슌카린은 눈을 꾹 눌렀다. 피로가 사라지지 않았다. 시카온이 서류를 가지고 오며 말했다.

“하이라 후작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럼 이제 라우스 백작가와의 영지전을 통해 그곳의 철광석을 모조리 차지하면 되겠군.”

“네, 라우스 백작가는 이번 전쟁을 통해 잃은 것이 많으니 영지전을 하면 곧장 밀릴 것입니다.”

철광석을 차지하면 앞으로 있을 정복전이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라우스 백작가를 완벽하게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더욱더 철저한 작전이 필요했다.

“그럼 이제 키슌, 네가 들어가서 왕국 전체에 마약을 뿌려라.”

자신의 콧수염을 만지던 뚱뚱한 귀족이 고개를 돌렸다.

“내 수완을 이제야 보여 줄 수 있게 되었군.”

“기대하겠다.”

키슌은 본래 라소니 왕국에서 금융권을 꽉 잡고 있는 만큼 자금 운용에 대해서는 딱히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문제라면 마약은 적발당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 레신카가 들어오며 말했다.

“눈 돌리는 건 나한테 맡겨. 지금이 딱 그때라고 생각하는데?”

“레신카, 벌써 왔군.”

마무리를 위해서 잠시 동안 레미우스 왕국에 다시 보냈을 뿐인데 벌써 귀환한 그를 보며 슌카린은 다소 놀라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런 슌카린의 반응에 레신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안에 인재들이 얼마나 많은데.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어.”

레미우스 왕국과 유키르는 아레마이의 힘으로 잘 관리가 되고 있었다. 유키르는 철저하게 그들의 인형 노릇을 했고, 그런 그들의 개입에 왕국은 점차 안정되고 있었다. 레신카는 이제 새로운 임무에 투입된다는 사실에 흥분되어 기분이 좋았다.

“지금 당장 갈 수 있나?”

“당연하지.”

레신카는 싱글벙글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짐을 싸 들고 시스티아 왕국으로 출발하려는 기세를 보이는 그를 보며 키슌은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다. 저놈은 진짜 대장이 아니었으면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되었을 것이 뻔하다.

“칸나 쪽에서 도와줘야 할 것 같군.”

아무리 은밀하게 활동한다 해도 왕국군이 바보가 아닌 이상 쥐 잡듯 뒤지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도를 뒤흔들 정도로 활동하기 전에 잡혀 버린다면 작전에 차질이 생긴다. 칸나가 그쪽 거리를 꽉 잡게 된다면 쉽사리 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난 일단 우리 상단을 움직이러 가겠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전서구로 연락해.”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뮤일라가 아니더라도 다른 귀족들이 의심을 한다. 그렇기에 키슌은 라소니 왕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슌카린은 말없이 그를 배웅하였다.

“근데 도대체 그 자식은 뭘 했기에 장기 임무에 투입된 거야?”

“그건 나도 모르겠군. 직접 물어봐.”

“……쳇, 알겠다. 이제 간다.”

키슌을 태운 마차가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슌카린은 어느새 떠오르고 있는 태양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들의 미래를 알려 주는 것 같았다.

‘아레마이가 이 대륙을 제패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라소니 왕국은 대장이 꽉 잡고 있고, 레미우스 왕국 역시 유키르를 앞장세워 아레마이가 점령했다. 시스티아 왕국도 흔들리고 있었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면 무너질 것이 뻔하다.

이미 작전은 시작되었고,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해내는 것이 아레마이의 정신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이 있었다. 아레마이가 할 수 있다고 마음먹은 것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

시스티아 왕국이 수중에 들어오면 루미니르 제국만이 남게 된다. 루미니르 제국이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다른 모든 나라를 등에 업고 있는 아레마이를 이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슌카린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루미니르 제국이 어떻게 대륙의 패자가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수를 썼기에 그럴까 궁금하긴 하지만 그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아레마이의 정신과 규모, 그리고 전술을 따라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슌카린은 자신이 이때까지 꿈꿔 왔던 미래를 머릿속에서 그려 보았다. 자신들이 대륙 전체를 차지하는 진정한 미래.

‘앞으로 두 발자국 더.’

그리고 3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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