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멸망
아레마이는 3년 동안 정말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이라 후작가는 라우스 백작가와의 영지전에서 승리했다. 그들은 막대한 철광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슌카린은 수이카에게 무기 제조를 맡겼다.
“쉬워, 그 정도는.”
“부탁하지.”
또한 키슌은 왕국 내에 식료품 지부들을 만들어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은밀하게 마약을 뿌렸다. 사람들은 점점 중독되어 갔고, 왕국의 여러 부서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멈춰 버렸다.
그런 그들을 보고 왕궁이 움직이기 전, 레신카는 반란군을 조직해 왕궁의 여러 시설들을 습격하고 다녔다. 그들이 너무 크게 활동한 탓에 왕궁은 마약 건에 대해 전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반란군을 칸나가 뒤에서 봐주고 있었다.
그런 데다가 슌카린은 수도, 동부, 남부가 엉망이 된 틈을 타서 서부와 북부의 귀족들을 포섭했다. 중립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그들을 휘하로 거둬들이거나 반항하면 죽이고 아레마이 단원을 앉혔다.
왕국은 3년 사이에 더 엉망이 되어 버렸고, 더욱더 혼란해지고 있었다. 한 왕국 전체가 한 조직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뮤리아, 오늘 그대와 함께 춤을 추고 싶어. 7시에 연회장으로 와. 기다리고 있을게.>
그리고 카니벨라가 뮤리아로 살아간 지도 벌써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녀는 3년 동안 첫째 왕자의 죽음으로 인해 후계자가 된 둘째 왕자의 곁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이 엘르탄이라는 왕자는 시도 때도 없이 그녀를 불러댔다.
‘오늘도 연회라니 귀찮아 죽겠군.’
그녀는 엘르탄에게서 왕국 기밀을 빼오기 위해 접근했지만 이 왕자는 아는 것이 거의 전무했다. 머리에 뭐가 들어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빼낼 정보가 아예 없었다.
그래도 딱히 다른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기에 그녀는 계속 왕자의 곁에 붙어 있었다.
“긴장되느냐?”
치장이 끝나고 홀로 거울을 보고 있는 그녀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녀는 그의 앞에서 연기를 계속했다.
“아버지.”
“여기는 현재 우리밖에 없다.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
“긴장이 풀리면 결정적인 순간에 실수를 하는 법입니다. 저는 제 실수로 인해 조직의 일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났다. 남자는 그녀에게 왕국 군사의 규모나 왕궁의 비밀 통로, 왕의 인장 위치 등은 알고 있을 것이라 말하며 거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캐낼 것을 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그녀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 이국적인 곳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마차가 멈추자 곧장 내려 안으로 입장하였다.
“하이라 후작가의 뮤리아 영애 입장하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요즘 엘르탄의 새로운 연인으로 수도 내에서 뜨거웠다.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가게 될지 궁금하다는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구석에 들어가 왕자가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곧, 왕자가 등장했다. 왕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왕자의 곁으로 와 손을 잡았다. 왕자가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백치미 가득한 미소였다. 그녀는 활짝 미소 지었다.
그때, 음악이 흘렀다. 그들은 곧장 춤을 추었다. 그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자, 다른 귀족들도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추었다. 곧장 사교의 장이 펼쳐졌으나, 그녀는 왕자를 휴게실로 이끌었다. 왕자는 아무 의심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표정이 좋지 않구나.”
“실은…… 부끄럽지만 무서운 꿈을 꾸었습니다.”
“무슨 꿈이냐?”
“제가 서 있는 모든 곳이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뜨겁고 무서운지 꿈에서도 벌벌 떨었답니다.”
“저런.”
왕자는 안타까워했다. 자신의 아름다운 연인이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아팠다. 그래서 왕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 어두컴컴한 통로로 나왔다. 왕궁의 비밀 통로였다.
“여긴 어딘가요?”
“내가 네게 곧 청혼한다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네게 특별히 보여 주는 것이다.”
왕자는 그녀에게 곧 조만간 이곳에서 살게 될 것이니 불타는 꿈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지금과 같은 비밀 통로로 들어가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전하. 정말 이런 투정 같은 이야기도 다 들어주시고…….”
“아니다. 내가 아바마마의 마음을 돌릴 터이니 넌 나와 혼인하면 어떤 드레스를 입을 건지나 생각하여라.”
“네, 고맙습니다. 전하.”
그렇지만 그녀는 속으로는 냉소적으로 비웃었다. 진짜 사랑하던 라이넨과의 결혼 생활도 파국을 맞이했고, 증오의 꽃만 피우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혼인을 논하는 왕자의 말이 터무니없이 느껴졌다.
둘은 정원을 거느리다 왕자의 궁으로 들어가서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그때, 은근슬쩍 인장이 왕자의 방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서류 몇 가지를 은밀하게 빼냈다.
“너무나도 즐거웠습니다, 전하.”
“나도 그러하였다. 하루빨리 너와 함께하고 싶다.”
“저도 그러하답니다.”
“내일도 이곳에 오거라. 기다리고 있겠다.”
그렇게 말하며 왕자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마차를 타 하이라 후작가로 귀환했다.
‘이제는 터질 때가 되었어.’
아레마이가 쌓아 놓은 그 모든 것이 이제 실체로 나타날 때가 왔다. 그리고 그날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 * *
시스티아 왕국의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이제는 자신들에게 반감을 품을 것 같은 귀족들과 왕족들을 깡그리 모아 없애 버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슌카린은 이때까지 은밀하게 진행하던 모든 일들을 일부러 다 터뜨렸다.
귀족들의 마약 중독, 서부와 북부 지역 귀족들의 갑작스러운 변심 등 갑자기 너무나도 커다란 일들이 연달아 터지자 시스티아 왕국의 왕은 당황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반란군이 설치고 있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왕 또한 경계하던 일이었고, 수습을 위해서 많은 인력을 투입하였으니까. 그렇지만 여기에 신경을 쓰다 보니 다른 것에 대해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서 놀아나는 것 같았다. 왕은 실체를 알지 못하는 적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무서워졌다. 아레마이는 3년 동안 왕국을 손에 넣기 위해 온갖 공작을 했고, 지금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왕은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모든 귀족들을 소집했다. 슌카린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은 자들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소집령에 응했다. 왕은 많은 귀족들이 소집령에 응하지 않은 것이 괘씸했으나 지금은 그들을 책망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왕국에 큰일이 생겼다.”
왕은 현 상황에 대해 말했다. 갑자기 왕국이 혼란에 빠졌고, 그것이 음지에서 누군가가 움직여서 그런 것 같다고. 귀족들은 당황하거나 고개를 끄덕였다. 은밀하게 접촉 당했던 귀족들은 입을 열어 자신들에게 누군가가 접근했었다고 호소했다.
그런 그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왕은 귀족들의 말에 경청했다. 그때, 새로운 소식이 또 날아왔다.
“또다시 반란군들이 나타났습니다!”
“젠장! 도대체 왜 반란 세력 하나 제압하지 못해 일을 크게 만드느냐!”
왕의 노성에 모든 이가 고개를 숙였다. 그때, 하이라 후작이 갑옷을 입고 당당하게 들어왔다.
“다들 여기에 계셨군요.”
그들은 평소와 다르게 무장을 한 채 서 있는 하이라 후작을 보며 당황했다. 후작은 문관이지 무관이 아니다. 검과는 전혀 거리가 없이 살던 사람인데 갑자기 이리 갑옷을 입었다는 것은…….
“설마…….”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창문을 깨고 사방에서 아레마이 단원들이 쇄도하였다. 그들이 걸어오자 피 냄새와 탄내가 진동하였다.
“이건……!”
그들이 미처 상황을 다 판단하기도 전에 폭발하는 소리가 나며 모든 궁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성 밖에서 기다리던 단원들은 불을 피해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으아악!”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개중에는 자신을 보호할 방법이 없던 아이, 여자, 노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약자들에게도 아레마이 단원들은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으아악!”
“끄억!”
카니벨라는 행동대장의 신분이었기에 암살단을 이끌어야 했다. 이 참상을 보며 그녀는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도망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보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사, 살려…….”
그런 그녀의 발을 잡는 작은 손길이 있었다. 어린아이였다. 딸인 라이지보다 조금 나이가 많을까 싶은 귀엽고 작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겁을 먹은 채 살려 달라고 그녀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역겨웠다. 이런 아이를 해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몸서리쳐질 것 같이 싫었다. 손은 이미 빨갛게 얼룩졌지만 더 더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이를 일으켜 준 후, 조직원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손을 가리켰다.
아이는 감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달려갔다. 이윽고 아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아악!”
그녀는 눈을 꽉 감았다. 자신의 비겁함을 외면하기 위해 입술을 씹으며 그녀는 사람들을 기계적으로 베어 나갔다. 자신의 검에 누가 쓰러져 가는지 보지 않았다. 보면 도망쳐 버릴 것 같아서.
그녀는 걸었다. 아직 불타지 않는 궁이 있었다. 엘르탄이 머무는 궁이었다. 그녀는 그 궁에 횃불을 던졌다.
화르륵!
궁은 순식간에 불에 타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까이서 왕자를 기다렸다. 다른 곳은 애써 둘러보지 않았다. 조직원들의 손에 쓰러지는 사람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고, 다른 쪽은 이미 다 해결되었을 테니까.
“너는?”
“드디어 나오시는군요.”
얼마나 기다렸을까. 기다리던 왕자가 나왔다. 그녀는 오랜만에 장검을 꺼냈다. 며칠 전에 기름칠을 해 놓아 반질반질했다. 왕자는 복면을 쓴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벗을까 하다가 왕자의 충격 어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어, 어떻게!”
왕자는 왕궁이 이렇게 습격당한 것에 대해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조용하게 대꾸하였다.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왕자에게 덤벼들었다. 검을 배우기는 하였으나 실전 감각이 부족했던 왕자는 그녀의 기세에 눌려 공격을 막아 내는 것도 버거워했다. 그녀는 그와 검으로 대치하다 불현듯 왼손에 단검을 꺼내 힘의 균형을 깨뜨렸다.
“앗!”
왕자가 당황한 사이, 그녀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으로 왕자의 목을 베었다. 목에 빨간 줄이 그어지고, 동시에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녀의 얼굴에 피가 잔뜩 튀었다.
“끄륵……!”
왕자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목을 쥐었다. 그리고 이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이내 몸을 돌렸다. 왕자의 고통 어린 표정을 애써 외면한 그녀는 남자가 있는 회의장으로 향했다.
“끝났습니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피 냄새가 훅 몰려왔다. 토하고 싶을 정도로 역겨웠다. 그러나 애써 들어간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한 귀족을 향해 단검을 던졌다.
풀썩.
귀족이 쓰러졌다. 간간이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 싸움에 굳이 끼지 않고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다 끝났나?”
“이 정도는 쉽습니다.”
남자가 옆에 서서 검을 닦았다. 묻어 나오는 피가 새까맸다. 도대체 저 검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베어 낸 것일까. 그러나 그녀는 이내 피식 웃었다. 그녀는 그와 다를 것이 없는 살인자다.
손에 피가 가득 묻은 더러운 사람.
손에 쥐고 있는 검 날이 그녀의 모습을 비추었다. 평소와 다름이 없어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손이 작게 떨렸다. 검을 더 쥐고 싶지 않아 그녀는 재빨리 검을 검집에 넣었다.
“다 끝났습니다.”
회의장에 있던 귀족들이 다 죽었다. 이날 왕의 소집령으로 인해 모였던 귀족들이 전체 귀족의 절반이었으니 순식간에 귀족 자리가 텅 비어 버리게 되었다. 앞으로 이 빈자리들은 조직원들로 채우면 될 것이다.
“왕은 어디에 있나?”
“비밀 통로로 도망치는 것을 일단 붙잡았습니다. 데리고 올까요?”
“데리고 오도록. 내가 직접 하도록 하지.”
그리고 남자는 끌려온 왕의 목을 직접 쳐서 끝냈다. 그렇게 시스티아 왕국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