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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의심 (48/93)

47. 의심

모든 것이 끝났지만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왕국 안정화 및 후속 작업 때문에 귀환은 지연되었다.

이번 일로 인해 왕국의 귀족 수가 확실히 줄어들었기에 그들을 채워야 했다. 기존에 교육이 되어 있던 단원들을 전부 그 자리에 앉히고, 주요 보직은 모두 마약 중독자들로 채웠다. 또한, 아레마이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가진 자를 왕위에 앉혔다.

당연히 정통 왕족이 아니었기에 잡음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또 피를 봐야 했고, 그걸 처리해야 하는 사람은 카니벨라였다. 그녀의 검에, 조직원들의 검에 사람들은 베여 나갔다. 그녀는 정신적인 피로함이 극에 달하는 것이 느껴졌다.

저 비명 소리를 다시 듣고 싶지 않아.

그러나 그녀가 그러든 말든, 작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시스티아 왕으로 추대된 자와 아레마이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자며 서류를 작성했다. 그리고 나중에 자연스럽게 라소니 왕국에 복속되도록 만들었다.

아레마이를 건들면 언제든 이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내용의 서류와 함께.

“근데 저자는 주요 보직에 앉은 귀족들이 마약에 중독된 사실을 알고 있어?”

“저자는 그냥 단순히 왕의 자리를 좋아하는 바보일 뿐입니다. 자신이 허수아비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저런 놈들 데리고 나라를 운영하려고 해 봐야 헛짓거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

칸나의 의문에 시카온이 대답해 주었다. 칸나는 그놈의 감투가 뭐가 좋다고 허수아비 노릇을 자처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인간은 누구나 다 추구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렇구나.”

“이제 루미니르 제국만이 남았다. 그사이 일단 귀환해서 쉬다가 모이도록 하겠다. 그럼 이상!”

오랜만에 살던 곳으로 귀환한다.

*   *   *

일단 복귀하자마자 그녀가 한 일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좋든 싫든 3년 동안 부지런히 움직였던 탓인지 피곤했다.

‘빨리 보고 싶다.’

그러나 그녀는 얼추 몸이 풀어지자마자 라이지를 보러 마리를 찾았다. 앞으로 한동안 못 볼지도 모르니까. 마리는 오랜만에 본 그녀를 매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루시, 정말 오랜만이에요!”

“몇 년이 지났는데도 잊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자신을 잊지 않은 마리가 고마웠다. 마리는 싱긋 웃었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했다. 여러 짐들이 한곳에 쌓여 있었다. 어디로 떠나려고 하나?

“무슨 일이 있나요?”

“아뇨, 그건 아니고 이번에 좋은 기회가 되어서 여기보다는 좀 더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사 준비 중이에요.”

“어디로 가요?”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리가 말한 지명은 그녀가 가야 할 곳이었다. 같이 붙어 있으면 마리를 보호할 수 있는 데다가 라이지를 계속 볼 수 있다.

“정말 잘되었네요.”

“네, 아무래도 그쪽이 치안이 좋으니 더 안심할 수 있을 거 같고요.”

“그럼 그곳에서 남편분과 사시는 건가요?”

마리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이제는 아장아장 걸을 수 있게 된 라이지가 마리의 치맛자락을 붙잡으며 칭얼거렸다. 그녀는 아이의 어깨까지 오는 검은 단발머리와 파란 눈을 보며 목이 메었다.

“…….”

“엄마.”

“어머, 라이지.”

마리는 라이지를 안아 들었다. 일순간 마리의 눈빛에서 미안함이 스쳤다. 라이지를 낳은 친엄마 앞에서 엄마 행세를 해야 하니까. 그녀는 그런 미안함을 읽고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리. 이건 제 선택이니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제 나름대로 아이를 지키기 위해 한 것이니 괜찮아요.”

그녀의 아련한 웃음에 마리는 침묵했다. 도대체 그녀가 무슨 위험한 일을 하고 다니기에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딸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 이런 것이라면 참으로 잔인한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라이지에게 진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반드시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마리가 말했다.

“루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네?”

“여기 계속 머무실 건가요?”

그녀는 머뭇거렸다. 마리는 그녀의 모습에 함께 가자고 졸랐다.

“루시, 저희와 함께 가요. 어차피 아이를 계속 보셔야 하잖아요.”

“……그럴까요?”

결국 그녀는 못 이기는 척 승낙했다. 마리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라이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

아이의 목소리는 지극히 청량했다. 그녀는 아이의 통통하고 말랑말랑한 볼에 손을 댔다. 참으로 따뜻했다.

내 아기. 내 모든 걸 바쳐 낳은 아이. 내게 남은 유일한 것. 사랑해, 아이야. 엄마는 널 사랑해…….

그렇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이는 그녀의 얼굴을 멀뚱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네, 엄마랑…… 아주 친한 사람이야.”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며 말했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애써 참았다. 다행히 눈물이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이모 안녕.”

아이는 방싯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아이의 모습에 결국 눈물을 흘렸다. 아이는 그녀가 울자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이모 울지 마. 울면 아파.”

“그래, 그럴게…….”

그녀는 눈물을 겨우 닦아 냈다. 아이는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웃었다. 그 모습에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모, 안 가면, 안 돼?”

“내일 다시 올게.”

“응. 꼭 와야 해!”

“루시, 내일부터 짐 싸는 걸 도와주러 갈게요.”

“아, 고마워요. 마리.”

“아니에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라이지를 한 번 가볍게 안아 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어둑한 하늘 사이에서 빛나는 별을 보며 오랜만에 그녀는 감성적으로 변했다. 계속해서 자극적이면서도 건조한 일상을 보내던 그녀에게 아이는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야, 난 널 꼭…….’

지켜 줄게. 엄마가 널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지켜 줄게.

그녀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별들이 빛나는 것이 마치 그녀의 다짐을 듣고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힘이 넘치는 그녀의 발걸음이 별빛들에 의해 은은하게 빛났다.

그녀는 마리의 도움으로 빠르게 짐을 싸서 집결지 쪽으로 이동했다. 조직원들과 같이 가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이 마리네 가족과 쓸데없이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검문이 약화되어서 오히려 더 좋았네.’

그녀는 위조 신분증을 내며 생각했다. 예전에 루미니르 제국에 처음 올 때 봤던 그 광경이 아직도 잊어지지 않았다. 그때는 되게 좋은 장비로 엄격하게 관리했었는데 근데 지금은 뭔가가 허술했다.

뭐, 그래서 오히려 더 다행이었지만.

‘만약 지금도 그때와 같았다면 쉽사리 통과하기는 힘들었을 거야.’

그래서 안심했다. 게다가 마을도 조용하니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새로운 집을 둘러보고 있는 그녀에게 마리가 찾아왔다.

“루시. 전 여기서 새로운 카페를 차리려고 해요. 제가 바쁠 때 라이지를 보실 수 있으실까요?”

“네, 고마워요.”

아무리 카페 일이 바쁘다고는 하지만 마리의 남편이 행상인 일을 그만두고 함께 카페를 관리한다고 했으니 그렇게까지 크게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그저 그녀가 라이지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기 위한 배려였다.

“아니에요, 루시가 당연히 가져야 할 시간이잖아요.”

역시 마리는 그녀가 이때까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마음이 따뜻하고 예쁜 사람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웃어도 항상 공허해 보이던 그녀의 환한 미소에 놀란 마리의 눈이 커졌다.

처음이었다, 그런 표정은. 마리는 자신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루시, 앞으로 매일 그렇게 웃어요.”

“네?”

“루시는 루시의 지금 그 표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를 거예요.”

“…….”

“전 나중에 라이지가 루시랑 둘이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고마워요.”

“고마우면 평생 같이 있어 줘요. 전 루시가 정말 좋아요.”

“저도 마리가 제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예요.”

“다행이에요, 마음이 통해서.”

마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막바지에 돌입한 가게 준비에 손을 거들었다. 그리고 곧 마리는 남편과 함께 카페 일을 시작했다.

“이모, 오늘은 우리 뭐 하고 놀아?”

“오늘은 둘이서 같이 책 읽어 볼까?”

그녀는 아이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여러 책을 읽어 주었다. 아이는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마지막 문장을 읽어 주자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재잘거렸다. 그녀는 아이의 말을 들어주며 가끔씩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모, 나 졸려.”

그렇게 한참 동안 웃고 떠들던 아이는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잠들었다. 그녀는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마저도 듣기 좋았다.

“아가야…….”

그녀는 아련하게 아이를 불렀다. 그때, 아이가 몸을 돌렸다. 순간 그녀는 라이넨이 아이가 되어 누워 있는 줄 착각했다.

‘그래, 넌 이 아이의 아빠지.’

라이넨에 대한 생각은 끊어진 지 오래였다. 조직 일에 적응하는 사이, 세월은 무참히 흘러가 버렸고 그녀는 그에 대해 잊었다.

아니,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다. 여기서 그의 흔적을 보자 그는 다시 그녀의 머릿속에 나타났다.

‘너도 이 아이가 보고 싶겠지?’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네게도 보여 주고 싶다. 우리의 아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리고…….

‘뭐라고?’

그녀는 갑자기 솟아오른 생각에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어떻게 이 아이를 그자에게 보여 준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의 아버지 같은 자를 죽이는 데 일조한 파렴치한 놈에게!

그녀는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루카민에게 죄를 지은 것 같았고, 절대 라이지를 그자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잠깐…….”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가정이 세워졌다.

“그럴 리가…….”

아레마이의 목적은 대륙 정복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루미니르 제국이 매우 성가실 수밖에 없다. 제국은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았기에 쉽사리 건들기가 힘들었다.

황제 역시 통치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였다. 실각시킬 명분도 없었고, 황권도 강하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약한 라이넨을 건드려야 하는데 라이넨 역시 약점이랄 것이 딱히 없었다.

있다면 자신뿐.

그리고 자신은…….

‘레이의 말에 흔들렸다.’

레이는 아레마이 소속 조직원이었다. 만약 그녀를 이곳으로 끌어들이라는 조직의 명이 있었더라면 분명히 그와 자신을 떼어 놓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젠장…….”

그녀가 추측한 것이 사실이라면, 루카민이 죽은 것은 라이넨의 탓이 아니게 된다. 이때까지 믿어 왔던 사실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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