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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우연한 재회 (49/93)

48. 우연한 재회

카니벨라는 자신의 추측에 부르르 떨었다. 아레마이는 라이넨을 약화시키기 위해 자신을 떼어 놓아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신분은 루카민의 여동생. 헛소문을 퍼뜨려 쉽게 그녀를 흔들 수 있었다.

그 당시 유산의 충격과 루카민이 죽었다는 사실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녀는 레이의 말에 쉽게 넘어가 버렸고,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믿어 버렸다.

“그렇지만 이게 아레마이의 계략이었다면…….”

그 계략에 말려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증오하게 되어 지금까지 온 것이다. 정말 헛웃음이 나왔다. 라이넨에게 미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제 그를 만날 방법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황궁으로 찾아갈 수가 없지 않은가. 또한 잘 살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 굳이 헤집고 싶지도 않았다.

‘젠장.’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틀리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정말 아레마이의 손안에서 놀아난 꼴이 아닌가. 그녀는 바보가 되기는 싫었다.

“이모…….”

그사이, 라이지가 낮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아이를 안고 토닥여 주었다. 아이는 좋아서 꺄르르 웃었다.

“루시, 많이 늦었죠?”

시간이 지나 초저녁이 되었다. 그때, 마리가 남편인 루카스와 함께 나타났다. 그녀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일로 오늘은 빨리 끝났어요?”

“오늘은 재료가 빨리 떨어졌지 뭐예요? 그래서 일찍 왔어요.”

“잘되었네요. 마침 저녁을 만들고 있던 중이었어요.”

마리는 주방으로 들어와 저녁을 함께 만들었다. 사양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마리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다.

“이모가 먹여 주면 안 돼?”

식탁에 앉자 라이지가 칭얼거렸다. 그녀는 곤란한 표정으로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리는 괜찮다는 듯 아이를 그녀의 무릎에 앉혔다.

“음식 맛있어.”

“그래?”

아이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음식을 달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음식을 덜어서 아이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이게 제일 맛있어.”

“그래?”

아이의 재롱(?)에 식사 시간은 더욱 재미있었다. 그녀는 함께하는 식사가 맛있다는 걸 오랜만에 깨달았다.

깊은 밤이 되었다. 그녀는 마리네 가족을 집으로 보냈다. 마리는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 아쉽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건 그녀 역시 아쉬웠다.

그렇지만 다음 날에 일을 가야 하는 사람을 그렇게 계속 붙잡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마리의 품에 안겨 있는 라이지에게 속삭였다.

“잘 가렴.”

마리는 그녀에게 미안한 표정을 살짝 짓다가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했다.

“내일 또 올게요, 루시.”

마리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가 저 말을 듣기 위해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네, 내일 봐요.”

그녀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   *

시간은 흘렀다. 이 마을에서의 생활도 서서히 적응해 가고 있었다. 마리와 루카스는 여전히 카페 일에 바빴고, 라이지는 그녀의 집에 맡겨졌다.

“지루하지는 않니?”

“아니. 괜찮아.”

이 마을은 나름 사람이 많았지만 아이는 별로 없었다. 있는 아이들마저도 라이지보다는 나이가 다들 많아 어울리는데 어려웠다. 그녀는 놀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에 퍽 미안해졌다.

“이모랑 같이, 노는 거, 재밌어. 특히 이모가 책, 읽어 주는 게, 좋아.”

그렇지만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오히려 둘이서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라이지는 동화책 한 권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오늘은 이거 읽어 줘.”

“그럴까?”

그녀는 아이가 가지고 온 책을 펼쳤다. 집에서 구박받는 소녀가 왕자님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이었다.

‘한 때, 내가 이 책에 나오는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했었지.’

그녀는 구박받던 소녀였지만 라이넨이라는 왕자님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 그렇지만 그건 허상이었고, 지금 그녀가 살고 있는 인생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의 행복을 짓밟으면서 사는 악마지.

“이모?”

“응?”

“안 읽어 줘?”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그녀를 라이지가 흔들었다. 그녀는 얼굴을 붕붕 저으며 책을 펼쳤다.

“미안해, 지금 읽어 줄게. 아주 먼 옛날, 한 아름다운 소녀가 살고 있었어요. 소녀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이는 눈을 감았다. 이야기가 즐거운지 집중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그 모습에 신이 나 열성적으로 책을 읽어 주었다.

그리고 평소와 같은 밤이 되었다. 마리는 늦게 와 저녁을 함께 먹고는 아이를 데리고 귀가했다. 그녀는 훈훈한 바람을 맞으며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좀 더 잘 먹이려면 장도 좀 봐야겠지.’

그녀는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건강식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부지런히 장을 보며 각종 식재료를 샀다. 그런 그녀의 귀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번에 축제 있다고 했었지?”

“황태자 전하께서 순례를 우리 마을에서 마친다고 하시더라.”

“오랜만의 축제네.”

축제? 갑자기 웬 축제지?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물었다.

“갑자기 웬 축제인가요?”

“아, 루시아.”

“요즘 통 안 보여서 걱정했다고.”

“아이와 놀아 주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그녀는 마을에서 얼마 없는 미혼 처녀였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다행히 그들이 언제 결혼하냐 독촉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자기 아들들과 엮으려고 해서 별로 어울리지는 않았다.

“그쪽 집은 뭐가 좋다고 자꾸 처녀한테 아이를 맡겨?”

“제가 원해서 한 건데 너무 그러지 마세요.”

그녀는 웃으며 은근슬쩍 마리를 힐난하는 자에게 일침을 놓았다. 그리고 곧장 원하는 주제로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갑자기 웬 축제인가요?”

“아, 이번에 황태자 전하께서 순례를 오시거든. 우리 마을이 마지막 순례지라서 그걸 기념해서 축제를 하는 거야.”

황태자 순례에 대해서 그녀 또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라이넨이 온다는 사실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내심 불안했다.

혹시라도 마주치면 어떡하지?

만나게 된다면 그녀가 알고자 하는 진상에 대해 알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조직원들의 눈에 띄면 그가 위험해진다.

“축제 중에 황태자 전하와 마주칠 확률은 없겠죠?”

“에이, 그럴 리가 있나.”

“오시면 곧장 영주 성으로 가시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을걸.”

“우리 마을 축제는 유명해서 그날만큼은 사람들이 북적이거든.”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쓸데없이 라이넨과 마주쳐서 그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 확률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안심하기로 했다. 그리고 라이지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아이에게 이런 활기찬 축제를 보여 주고 싶었으니까. 그녀는 그 사실을 마리와 의논했다.

“루시, 축제에 가려고요?”

“네, 라이지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요.”

“그렇지만 루시는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걸 싫어하지 않았나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괜찮아요.”

“루시의 뜻이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해요.”

“고마워요, 마리.”

“아니에요. 제가 늘 고마워요.”

그리고 그녀는 며칠 후, 축제가 열리는 날이 되자 루이지를 이끌고 밖으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더 생기 넘치는 마을은 라이지를 설레게 하였다.

“우, 우와!”

그녀는 아이가 쳐다보는 모든 것들을 구경시켜 주었다. 거리의 공연, 놀이, 재미난 대회 등 아이는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중간에 배가 고프다는 기색을 보이면 곧장 각종 음료와 음식을 손에 쥐여 주었다.

그녀는 고위 조직원이었기 때문에 돈은 많았다. 그래서 평소에 해 주지 못한 걸 마음껏 해 줄 수 있었다.

“이모, 재밌어!”

“그래?”

아이의 즐거워하는 표정에 절로 배가 불렀다. 이것이 어머니가 자신을 봤을 때 들었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그녀의 어머니는 억울하고도 비참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녀가 복수귀가 되어 미친 듯이 진실을 찾기 위해 날뛰는 것을 좋아하실까? 아니면 이렇게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것을 보는 걸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전히 그날의 진실은 알고 싶었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있어 라이지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해도 괜찮을 만큼 소중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혹시나 어머니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궁금했다.

-괜찮아…….

그때, 바람이 날리며 괜찮다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녀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모, 나 졸려.”

“그래, 그럼 돌아갈까?”

“응.”

그녀는 칭얼거리는 라이지를 안아 올렸다. 라이지는 그녀의 몸에 머리를 기대며 헤헤 웃었다. 그녀는 짧게 물었다.

“오늘 축제 어땠어?”

“정말, 정말, 좋았어!”

“그래? 라이지가 그렇게 말하니까 이모가 기분이 정말 좋아.”

“사실, 나는 엄마보다, 이모가 더 좋아!”

“……그래요? 우리 라이지는 누구 딸이라서 이렇게 착하지?”

라이지는 자그마한 소리로 엄마 딸이라고 말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웬 잘생긴 아저씨가 보였다. 그 잘생긴 아저씨는 자신을 보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냐고 묻고 싶었다. 그때, 그 잘생긴 아저씨가 이모를 안았다.

“보고 싶었어.”

“……!”

카니벨라는 라이넨의 목소리에, 그의 포옹에 너무 놀라 순간적으로 굳었다. 몸은 그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소름이 전신에 돋았다. 그녀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누, 누구세요?”

“……!”

“누구세요?”

그녀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였다. 그러자 라이넨이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잡아 자신에게 끌었다.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 라이지가 떨어지지 않게 더 꽉 쥐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상 자국이 있는 여자였다. 미묘한 실망감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똑같은 목소리와 똑같은 머리카락과 똑같은 분위기. 그렇지만 그녀가 아니었다. 그래도 잠시 동안 꿈과 같은 희망을 품었었는데 그것은 여실 없이 깨져나갔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는 그녀의 팔을 놔주었다.

그래, 역시 꿈은 꿈이군.

“미안하군. 잠시 내가 아는 사람과 착각했다.”

“……아닙니다.”

“내가 무례했다. 사과하지.”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다시 걸음을 뗐다. 그녀는 그와의 재회에 너무 당황해 순간적으로 제대로 된 대꾸를 하지 못했다.

‘물어야 하는데.’

루카민에 대한 것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녀는 아이를 안지 않은 다른 쪽 손을 뻗었다.

“저, 저기!”

그러나 그는 이미 인파 안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그녀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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