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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임무 (50/93)

49. 임무

아레마이는 시스티아 왕국 정복 이후, 빠른 속도로 루미니르 제국에 침투했다. 그래서 연신 회의 일정이 잡혀 있었고, 매우 빡빡한 일정 속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그렇지만 카니벨라는 황태자비였던 이력이 있었기에 오히려 더 작전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나중에는 라이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그랬던 그들이 그녀를 오랜만에 불렀다.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회의장에 들어왔다. 이곳 자체가 그녀에게는 오랜만이었다.

<이번에는 네가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본래는 딱히 소집에 응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저렇게까지 말하니 핑계 댈 수가 없었다.

“이번에 제가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요?”

“그래. 오랜만이야, 에이니. 얼굴 좋아졌네?”

“고마워요, 칸나.”

칸나의 요염한 표정을 다소 무표정하게 바라본 그녀는 자신이 왜 이렇게 갑자기 간부 회의에 소집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의문 어린 분위기를 느꼈는지 시카온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작전의 방향이 결정되었거든요. 근데 그게 에이니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에요.”

“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왜냐하면 이번 작전은 라이넨 황태자를 꾀어서 궁 안에 침투하는 것이니까.”

서류를 들고 들어오며 슌카린이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절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제게 다시 황태자비가 되라는 건가요?”

“아니다, 황태자비가 될 사람은 대장이다. 넌 그저 징검다리 역할만 하면 돼.”

“…….”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감정을 이용하자는 것인가?

“막상 라이넨 황태자가 네 옆을 떠나니 서운한가?”

“풋! 그럴 리가요…….”

그녀는 은연중에 자신을 도발하려는 슌카린의 기세에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난 그냥 그자와 어떻게 해야 다시 엮일 수 있을지 그게 더 머리 아플 뿐이라고.

“오늘 널 부른 이유는 그 점에 대해 알려 주려 했던 것이다.”

슌카린은 그녀의 말에 다소 안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감정을 가지냐는 듯한 표정에 그녀는 움찔했다. 아마 그녀가 그에게 어떠한 감정이든 남아 있었다는 것을 티 냈더라면 슌카린의 성격상 그녀는 절대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 감정을 접게 만들었을 것이고, 필요하다면 고문도 불사르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

그는 냉혹한 사람이었고, 오로지 대장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이었으며, 또한 작전을 수행하는 것에 있어서 거의 목숨을 바치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의지라고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작전이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거절하면 아마 마리나 라이지를 가지고 협박할 것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나가 봐.”

“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가는 척하며 작은 구멍 안으로 몰래 들어가 그들의 대화를 고스란히 들었다.

“그런데 라이넨 황태자를 어떻게 사로잡죠? 그 남자, 에이니만을 사랑하기로 유명하잖아요.”

모두들 시카온의 말에 침묵했다. 심지어 슌카린조차 딱히 떠오르는 묘안이 없는지 끙 하고 소리를 냈다.

그때, 레신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야 마약으로 대장에 대한 감정을 만들어 내면 되지.”

“좋아, 마약. 구해 올게, 내가.”

레신카의 의견이 좋은 아이디어인 듯, 동조하는 수이카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약이라는 말에 그녀는 움찔했다. 레미우스 왕국의 유키르가 생각났다. 그녀 때문에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 불쌍한 소녀.

“…….”

그녀는 끓어오르려는 감정을 애써 억누른 채 저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야 저들의 계획을 저지시키고 혹시라도 라이넨을 만났을 때 알려 줄 수 있다.

그녀는 아직 아레마이를 무너뜨리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 여력이 없어 미루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럼 빨리 라이넨 황태자와 에이니가 만나게 하는 게 우선인데.”

레신카가 중얼거렸다. 일단 둘이서 만나게 해야 친해질 수 있고, 마약을 먹이든 무언가를 할 수 있는데.

“우연을 가장해야 하나?”

“일단 기다려 보도록 하지. 아니면 황태자가 강제로 밖으로 나오게 만들면 되고.”

“어떤 방법으로?”

“방법이야 많다. 조작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슌카린 역시 넌 참 잔인한 남자라니까?”

“칸나, 너도 나 못지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머 무슨 소리야?”

그녀는 저 말을 듣자 빠르지만 조용히 지부 밖으로 빠져나왔다. 저들이 손을 쓰기 전에 라이넨과 만나야 했다.

아레마이는 라소니 왕국부터 시작해 시스티아 왕국까지 점령해 버렸다. 게다가 지금 그들은 기생충처럼 이곳까지 파고들었다. 하루빨리 라이넨을 만나야 했다. 그녀의 감정 따위를 내 새울 시간이 아니었다.

‘라이넨의 협력을 이끌어 내고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진상을 알면 된다.’

루카민에 대한 것은 그때 물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있을 때 빨리 만나야 해.’

시간은 얼마 없었다. 저들이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그 작전을 시행하는 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누가 이미 침입해서 어떻게 해 가고 있는지 그녀는 몰랐다. 저들이 말하는 단편적인 내용을 알 뿐.

그렇지만 그 내용마저도 그에게 치명적이 될 터였다. 그는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누명을 덮어쓰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다.

그건 싫었다. 그녀는 그 아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에게 아무리 찌꺼기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남아 있다 해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게 달려가던 그녀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라이넨을 만나서 이에 대해 말하지?’

레신카의 의문처럼 일단 둘은 만나는 것조차 어려운 관계였다. 그녀는 평민 루시아이고 라이넨은 고귀한 황태자다. 둘 사이에는 신분이라는 벽이 있기에 그는 그녀가 만나자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설사 만난다고 하더라도 문제였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형편도 아니거니와 이런 말을 했을 때 그가 믿을지도 의문이었다. 미친년 취급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모욕죄로 처형당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그에게 다가가서 친해져야 하는 임무가 있었다.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그를 만나게 되어 친분을 쌓다 보면 아레마이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저들의 칼끝으로부터 제국도 지켜내고 그녀 역시 이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라이지와 함께 살 수 있겠지.

또다시 라이넨을 이용한다는 것에 마음이 걸렸지만 그를 움직일 수만 있다면 라이지도 지키고, 그도 무사하고, 제국도 조직에 함락되지 않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아레마이를 무찌를 수도 있을 것이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 대장부터 조직 간부들까지 전부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레마이의 각종 기밀들을 세상에 공개하여 저들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게 된다.

또한 그녀처럼 억지로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을 구해 낼 수도 있겠지.

그녀는 반드시 라이넨과 친분을 쌓아 이 모든 일을 완수하리라 다짐했다. 그렇지만 라이넨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하아, 어떡하지?’

여차하면 영주 성을 침입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때, 그녀가 정말 간절하게 찾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루시아?”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다소 굳은 표정의 라이넨이 서 있었다.

*   *   *

한편, 라이넨은 혼란스러웠다. 간신히 마음을 잡고 다시 일어났다. 그래서 싫었지만 카일라와 약혼을 했고, 훌륭한 황제가 되기 위한 순례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발버둥 치고 있었는데 카니벨라를 닮은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와 똑같은 몸매와 목소리, 똑같은 걸음걸이, 똑같은 머리카락 색깔과 얼굴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냥 생김새가 다를 뿐.

“…….”

그것도 충분히 혼란스러웠는데 그녀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대화할 때 아이가 그녀를 이모라고 부르는 것을 봐서는 본인의 아이가 아닌 것 같았으나 둘은 분위기가 매우 흡사했다. 누가 봐도 모녀지간이었다.

모든 것이 똑같지만 다른 여자. 그는 그녀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가 간신히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 애꿎은 사람을 향한 엉뚱한 감정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는 다시 나락으로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그의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카샨이 손에 서류를 든 채 들어왔다.

“너는 어떻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나한테 일을 시키니? 진짜 징하다, 징해.”

“미안하다. 알아 온 건?”

카샨은 말없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는 라이지와 카니벨라에 대한 신상 정보에 대해 읽었다. 둘의 정보는 지극히 간단했다. 라이지는 평범한 부부의 딸이었고, 루시아라는 여자는 그들과 자주 교류하는 관계였다.

“그런데 이 루시아라는 여자, 이 부부랑 교류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알아낼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어. 수상해.”

“…….”

그러고 보니 라이지에 비해 이 루시아라는 여자의 정보는 여러 군데가 비어 있었다. 이건 이 여자가 그만큼 감추고 있다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면 여자에 대한 정보를 숨겨 주고 있는 무언가가 있거나.

“이 여자한테 접근해 봐야겠어.”

“왜, 또. 설마?”

“아니야.”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너 혼자 지레짐작하고 그래.”

“무슨 말을 할지 뻔해서 그런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카샨은 착잡함을 느꼈다. 역시 이 녀석은 아닌 듯했지만 아직도 그 여자를 잊지 못했다. 왜 죽은 사람을 놓지 못하고 붙잡으면서 그리워하는지 원.

“이제 그만 가 봐. 피곤해.”

“그래, 푹 쉬어.”

책상에 놓았던 서류가 거칠게 구겨졌다. 오랜만에 떠오르기 시작한 밝은 달빛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만 그의 눈빛은 달빛과 다르게 음울하게 물들어갔다.

‘답답하군.’

그는 결국 몰래 밖으로 나가기로 하였다. 이 여자를 지금 봐야 뭔가 속이 시원할 것만 같았다. 카샨과 호위 기사들의 시선을 피해 성 밖으로 나왔다.

‘이런, 여자 혼자서 다니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인가?’

그는 어두컴컴하게 가라앉은 거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미 가게 문은 다 닫았고, 사람은 한산했다. 답답함에 무작정 나왔는데 낭패였다.

‘돌아가야 하겠군.’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 그가 찾고 있던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바닥을 보며 걷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네가 루시아?”

그녀는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놀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을 잃은 채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전체적으로 군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그때와 달리 더욱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고생을 한 듯, 눈빛은 예전보다 다소 날카로워졌고 눈동자는 다소 공허했다.

“네가 루시아인가?”

다시 한번 그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루시아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그럼 다음에 보지.”

“저, 저기!”

그녀는 그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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