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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딸과 아버지 (51/93)

50. 딸과 아버지

라이넨은 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 자신의 발언을 후회했다. 다음에 다시 만나자니.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모르겠다.

“일어나. 밥 먹을 시간이야.”

카샨이 그를 깨우기 위해 방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아침 같은 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가 봐야겠어.”

“뭐?”

카샨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했다. 이게 설마 또 여자 만나려고 이러는 거야?

“너 설마 그 루시아라는 여자 만나러 가는 거야?”

“…….”

카샨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카샨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너 겨우 정신 차렸는데 이럴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걱정 안 할 수가 있냐!’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고 황제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한 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또 여자한테 꽂혀서 저러고 있으니 카샨으로서는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라이넨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

“그냥 수상한 여자니까 옆에 두고 감시하려고 하는 것뿐.”

그렇게 말하며 라이넨은 벌떡 일어나 로브를 걸쳤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갔다 오지.”

그리고 그는 재빨리 저택 밖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보며 카샨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걱정이 안 될 리가 있냐…….”

카니벨라는 평소처럼 일어나 집을 청소하고, 아침밥을 먹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에 커피를 마시면서 슌카린이 건네준 라이넨에 대한 정보를 읽었다.

‘이걸로 다 알기는 힘들겠어.’

그녀가 아는 라이넨은 과거의 사람이었다. 이미 몇 년이 지나 그녀는 현재의 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게다가 조직이 제공해 준 자료 또한 그녀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정보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한담.’

어떻게 해야 라이넨과 다시 만날 수 있고, 그에게 앞으로 나타날 위험에 대해 알려 줄 수 있을까.

똑똑.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자료를 재빨리 소파 밑에 숨겼다. 그녀가 문을 열기 전에 라이지를 안은 마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라이지는 손을 뻗었고, 그녀는 얼떨결에 자신의 딸을 안아 들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요, 루시.”

“아니에요, 마리.”

“지금이 딱 축제 기간이라 좀 바쁘네요. 당분간 라이지를 데리고 있으셔야 할 거 같아요.”

“아, 여기서 먹이고 씻기고……?”

그러고 보니 여느 때보다 짐이 많았다. 각종 유아용품이 마리의 양옆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마리가 손을 휘휘 저었다.

“여기까지 남편이 가지고 와 줬어요.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엄마, 그럼 나 당분간, 이모 집에서 지내는 거야?”

“그래, 우리 딸 신나지?”

“응!”

라이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런 아이의 상큼한 반응에 카니벨라는 풋! 하며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라이지가 방글방글 웃었다.

마리는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남편을 너무 기다리게 했다는 생각에 서둘렀다.

“루시, 잘 부탁해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안 해요~”

마리가 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문밖에 서서 바라보던 둘은 눈이 마주치자 서로 웃음을 지었다.

“이모, 오늘은 우리, 뭐 하고 놀아?”

“어제처럼 밖에 나갈 거야.”

“우와!”

호기심이 많은 라이지였기에 그녀의 말에 손을 마구 휘저으며 웃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 전에 우리 나갈 준비 할까?”

“응!”

그녀는 재빨리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묶어 주고 옷을 단정하게 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 혹시 두고 간 거 있…….”

문을 열자 검게 빛나는 머리카락, 날카로운 황금빛 눈동자와 눈매, 높게 솟아오른 콧날과 굳게 다물린 입술이 보였다. 바로 라이넨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그는 그런 그녀를 보며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시 보자고 했을 텐데?”

“아…….”

그 다시 보자는 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그녀는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그를 들여보내야 할지, 아니면 내보내야 할지 난감했다. 라이지와 마주쳤을 때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막막했으니까.

“이모, 뭐 해?”

그때, 라이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이지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으며 웃었다. 라이넨은 아이를 보며 다시 한번 당황했고,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야?”

“어?”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그가 마음에 드는지 그녀의 뒤에 숨으면서도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아이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자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뭐라고 해.’

도대체 저 남자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친구라고 하기에는 둘의 신분 차가 너무 컸다. 그렇다고 어제 처음 본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마리가 걱정할 것이다.

그녀는 머리가 아팠다. 그때, 그러한 그녀의 곤란한 표정을 본 것인지 라이넨이 입을 열었다.

“오래전에 부득이하게 헤어진 옛 친구란다. 오랜만에 네 이모를 보러 왔어.”

“아하, 잘생긴 아저씨, 전, 라이지예요.”

“라이지?”

어제 서류에서 봤기에 이름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놀라울 정도로 자신과 이름이 무척이나 비슷했다. 그런 데다가 검은 머리라니. 누가 보면 자신의 딸이라고 오해할 정도가 아닌가?

그는 여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흉측한 흉터 자국. 그렇지만 놀랄 만치 흡사한 다른 요소들. 마치 자신과 저 여자를 각자 반반씩 섞어 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여자아이. 이 여자는 진짜 누구일까?

“둘은 계속 집 안에 있을 건가?”

“아니요. 나갈 거예요!”

그러고 보니 아이의 머리가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옷도 외출복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외출하려는 사람의 집에 무작정 찾아온 무뢰한이 되어 버렸다.

“그럼 아저씨도 같이 나가요.”

“응?”

카니벨라는 곤란해졌다. 라이지와 단둘이 나가는 것은 괜찮다. 라이지는 이미 마을 안에서 마리의 딸로 유명한 아이였기에 별문제가 되지 않지만 공식적으로 미혼인 그녀가 외간 남자랑 같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구설에 오를 게 뻔했다.

가뜩이나 남자들의 추파가 많이 들어오는 상황에서 뒷말까지 듣기는 싫었다.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게…….”

그리고 같이 나간다고 쳤을 때 검은색 머리카락이야 어떻게 할 수 있다 치더라도 저 황금색 눈은 어쩐단 말인가? 저건 누가 봐도 황족이었다.

그녀는 라이넨을 기만하며 황실에서 탈출했다. 본래라면 큰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루카민의 죽음에 일조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녀는 이미 그 진상에 대해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라이넨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를 구해 주며 자신의 기만을 씻어 버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황실과 엮이고 싶지는 않아.’

핑계를 대야 했다.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아직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외진 곳이라도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은 아니기에 그녀는 일단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아저씨한테 물어볼래?”

그녀는 차마 그를 앞에 두고 확실하게 의사를 밝힐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결정권을 맡겼다. 그는 웃으며 라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히 같이 갈 수 있지.”

“우와, 그럼 아저씨도, 같이 나가요!”

“그래. 그런데 그 전에 아저씨가 줄 선물이 있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목걸이 하나와 팔찌를 내밀었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렸다. 저것은 한때 그녀가 하고 다니던 목걸이였다.

“고마워요.”

마치 목걸이의 용도가 무엇인지 아는 것 같은 그녀의 반응에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맞네.’

목걸이를 걸자마자 그녀의 머리색과 눈 색이 갈색으로 변했다. 화상 자국도 사라졌다. 예전과 똑같은 모습인지라 그녀는 그가 자신을 알아볼까 내심 무서웠다.

‘다행이네.’

그러나 그는 딱히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시선은 아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라이지, 혹시 팔찌 좋아하니?”

“네!”

“그럼 이걸 껴 줬으면 좋겠어.”

“우와아, 감사해요!”

그리고 곧장 낀 팔찌에서 작은 빛이 나며 아이의 머리색이 변했다. 검은 머리가 금발로 변했다. 하필이면 파란 눈까지 가지고 있는 라이지였기에 머리색이 변하자 아이는 완전 카니벨라와 판박이였다.

“…….”

카니벨라와 라이넨은 동시에 움찔했다. 카니벨라는 혹시나 라이넨이 수상함을 가질까 무서웠고, 라이넨은 이 아이와 카니벨라의 연관성이 궁금했다. 그리고 이 여자와는 또 어떤 관계인지.

그러나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입을 열면 모든 것이 깨져 버릴 것만 같아 둘은 침묵을 선택했다. 둘의 기류를 모르는 라이지만 갸우뚱거렸다.

“이제 나갈 거야?”

“……그래.”

그는 자신이 느끼는 수상함을 애써 접었다. 저 여자와 친구라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도 자신에게 생글생글 웃어 주는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기회가 있겠지.’

시간이 지나면 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수상함의 정체를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는 훗날을 기약했다.

“그런데 어디로 나갈 생각이었니?”

“이모가, 데려다주기로, 했어요!”

“그냥 돌아다닐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군. 그럼 이제 나가도록 하지.”

그 또한 반지를 꼈고, 그와 동시에 모습이 평범하게 변했다. 그녀는 느껴지는 자신에 대한 경계심에 한숨을 쉬었다.

‘참 번거로운 상황이네.’

그렇다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고 싶었지만 친해져야 하는 상황에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저씨, 안아 주세요.”

그래도 라이지에게 해 주는 것을 보면 무의식중에 혈육에 대한 정은 있는 것 같았다.

“라이지, 혹시 무섭지는 않니?”

“아니요, 아저씨, 키가 커서 좋아요.”

“그래, 다행이구나.”

라이넨은 끊임없이 라이지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혹시나 자신에게 안긴 아이가 불편해하는가 계속 살폈다. 그리고 지루해하지 않게 대화를 건네고, 아이의 대답이나 반응에 아빠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라이넨이 라이지를 좋아해 주고 있기에 훗날 라이지가 친아빠에 대한 기억을 나쁘게 가지고 갈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부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갈까요?”

그녀는 그에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때, 그의 심장이 콩콩 소리를 내었다.

카니벨라를 잃은 후 절대 뛰었던 적이 없던 그의 심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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