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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흔들리는 마음 (53/93)

52. 흔들리는 마음

카니벨라는 초상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

그렇지만 그건 그녀가 망쳐 버린 가족이었다. 아이가 친부모에게서 커갈 권리를 빼앗고, 친아빠는 자식의 존재를 모르게 했다.

‘죄인이지.’

언제나 그것을 잊지 않으면 안 된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여러 사람을 기만했다. 그녀는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죄인이었다.

‘가족…….’

그래도 그 사실을 잊어 보고 싶기도 했다. 지금의 이 가족 놀이가 나름 즐겁기도 해서. 이 초상화의 그림처럼 우리가 진짜 가족이면 어떨까 싶기도 해서.

“넌 자상했구나.”

아이에게 웃으며 다가갔고, 보이지 않게 그녀를 신경 썼다. 그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초상화 속 그는 웃지 않았지만 마치 웃는 것 같았다.

“웃지 마. 그러니까 이 그림이 진짜인 거 같잖아.”

그녀는 웃지 않는 그림에다 중얼거렸다.

“내가 이상해지는 거 같다고…….”

*   *   *

라이넨은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여자는 존재만으로 자꾸만 그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몇 번에 불과했다. 그 여자를 본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신의 발걸음은 그 여자의 집으로 향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얼굴을 보고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말해야겠어.’

그렇게 다짐했지만 늘 허탕이었다. 말하려 해도 항상 아이가 눈에 밟혔다. 아이의 웃음에 언제나 무장해제당하는 그는 늘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반드시 말하겠다고 다짐했다. 언제나 그렇듯 문을 두드리자 그를 반기는 건 라이지였다.

“아저씨!”

아이는 곧장 그에게 안겨들었다. 그는 익숙하게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이는 꺄르르 웃었다.

“왜 이제 와요?”

몇 시에 오겠다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건만 아이는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투정을 부렸다.

“미안해. 아저씨가 늦잠을 자서.”

“괜찮아요! 저도 늦잠 자거든요.”

“그래?”

부녀의 대화 소리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라이지가 아버지를 좋아해서 다행이고, 또 그녀를 볼 때마다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사라지는 그가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 보니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나도…… 괜찮고.’

오늘은 호숫가에 놀러 가기로 했다.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누워서 하루 종일 보내도 괜찮을 만큼 그곳은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다.

“이모 음식은, 맛있어.”

“그래? 고마워.”

본래 그녀는 암살자이기에 독을 제조하는 것에 있어서는 자신 있었다. 훈련 당시 여러 가지의 독을 제조했었고, 그것은 그녀의 손끝에 남아 있었다. 그런 손으로 누군가를 위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이 감격스러우면서도 어색했다. 그녀는 재빨리 도시락을 쌌다. 그리고 바구니 안에 넣었다.

‘좀 무겁네.’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이 많았기에 한 손으로 들기에는 힘들었다. 그녀는 진지하게 안에 있는 내용물을 뺄까 고민했다.

“내가 들어주지.”

그때, 라이넨이 들어오며 바구니를 한 손으로 들었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제가 들 수 있어요.”

“넌 아이나 제대로 챙기도록.”

무뚝뚝하게 말한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한 손에는 읽을 책을, 다른 한 손으로는 라이지의 손을 잡고 호숫가로 향했다.

“시원하다!”

호숫가에 도착하자 라이지는 환한 목소리로 외쳤다. 축제 때문에 사람도 거의 없는 데다가 경치도 좋아 시간을 보내기에는 딱이었다. 그녀는 오늘도 아이에게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배고파!”

돗자리를 펴자마자 들려오는 아이의 투정에 그녀는 바구니 안에 있는 음식들을 꺼냈다. 꺼내는 족족 아이는 맛있게 먹었다.

“맛있어!”

그 말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메인요리인 샌드위치에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고 나자 아이는 자신의 배를 통통 두드리며 웃었다.

“이모, 여기, 너무 좋아.”

나비가 날아다니고, 꽃 냄새가 가득한 숲. 아이는 아름다운 풍경에 기분이 좋았다. 밟히는 풀 소리마저도 좋았다.

“그럼 앞으로 여기 자주 올까?”

“응! 꼭 오자!”

오늘은 날씨가 화창했고, 소풍을 즐기기에 좋은 날씨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은 꽤 무거웠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어.’

벌써 3일째였지만 그녀는 그와 친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 처음 봤을 때의 라이넨도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매일매일 웃는 사람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무표정한 그의 모습이 지독하게 낯설었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 또한 침묵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본래도 말이 없던 그녀는 암살자 활동을 하면서 말수가 더 줄어들었다. 마리나 라이지가 없으면 하루 종일 말하지 않고 보내는 날도 있을 정도였다.

‘어떻게 친해져야 하지.’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쳐도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화가 나면서도 서운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서운함을 느낄 자격이라는 게 있나.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할 말이 있다.”

어디선가 나타난 토끼들과 놀고 있는 라이지를 쳐다보며 그가 말했다. 그녀는 무게를 잡고 말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무심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오늘을 끝으로 여기 오지 않을 생각이다.”

“네……?”

“너와 아이를 보러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앞으로 닥쳐올 위험에 대해 알려야 하는데 그가 떠나겠다니!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게 있나요?”

“없다.”

“그렇다면 왜……. 라이지를 위해서라도 와 주시면 안 될까요? 아이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안 된다.”

라이지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카니벨라를 닮았다. 본래의 모습도, 팔찌를 낀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는 사랑스러웠지만 자꾸만 자신을 자극해 갔다.

그는 자꾸만 떠오르는 옛 연인의 모습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그리고 저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도 싫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떨면서 잡고 있는 여자를 향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간신히 벗어났다.”

“예?”

“그러니 제발 나를 더 붙잡지 마라.”

“…….”

“널 보면…… 자꾸만 죽은 사랑스러운 아내가 떠오른단 말이다.”

“네……?”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자신이 죽었다고? 도대체 언제?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목소리가 커졌다.

“죽은 아내라고요?”

“그렇다.”

당혹스러웠다. 자신이 도대체 언제 죽었단 말인가. 그녀는 현재 멀쩡히 살아서 그와 함께 있다.

‘혹시?’

그녀는 그에게 캐묻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의 표정이 통증으로 찌푸려졌지만 그녀는 그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아내가 죽었다고요? 언제?”

그는 그녀의 모습을 수상하게 보면서도 자신이 보고 들은 진상에 대해 말해 주었다.

“내가 출궁한 사이 누군가가 불을 질렀다.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죽었다.”

“아내의 얼굴은 확인할 수 있었나요?”

“직접 확인했다. 아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특징과 일치했지.”

‘설마?’

그녀는 문득 탈출 당일 금발 머리로 염색을 했던 레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아레마이에 들어온 이후 레이를 본 적이 없었다.

퍼즐은 순식간에 맞춰졌다. 그녀의 탈출을 위해 레이는 자신의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것이 작전이니 아마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자신을 불태웠을 것이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야 멈출 것인가.’

그녀는 아레마이가 무서웠다. 그리고 아레마이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녀의 앞에서 간절한 목소리로 앞으로 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 남자가 꼭 필요했다.

“난 그저 빨리 갈 생각에 들떴을 뿐이다. 우리 사이에 어긋난 일을 확실히 알아내고 해결해서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감정적으로 점점 무너져 갔다.

‘어긋난 일? 설마?’

그 말에 그녀의 머리는 한없이 차가워졌다. 그녀는 저 말이 자신이 의심해 왔던 것에 대한 진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긋난 일? 그게 무엇인지요?”

“나도 모른다. 그래서 돌아왔을 때 알고 싶었다. 그런데 일이 그렇게 되었지.”

“왜 어긋난 건지는 모르고요?”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은 내게 화를 내며 떠나가려고 했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붙잡았어.”

“…….”

확실했다. 라이넨은 루카민의 사형에 개입하지 않았다. 아레마이가 헛소문을 만들어 놓고 그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자신을 그에게서 떨어뜨려 놓기 위해.

“허!”

기가 막혔다.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저게 진짜라는 걸 들으니 화가 났다. 도대체 저들은 몇 명의 피해자를 만들었단 말인가.

그녀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헛소문에 휘둘려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 그는 영문 모를 그녀의 증오를 받으며 그녀가 죽은 줄 알고 슬픔 속에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라이지는 친부모의 품에서 크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다 아레마이의 탓이었다. 그들은 인생을 그리고 한 가족을 철저하게 부숴 놓았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녀를 지금껏 철저하게 이용해 왔다.

‘지금 당장에라도 죽이고 싶다!’

엉뚱한 사람에게 퍼부었던 증오심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녀의 몸에서 살기가 뻗칠 뻔했지만 그에게 살기를 날릴 수는 없었다. 그는 죄가 없고, 애꿎은 라이지까지 휘말릴 염려가 있었다.

‘아레마이……!’

그녀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평정을 찾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잡은 손을 빼며 차갑게 말했다.

“제가 그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이러고 있는 걸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

“죽은 사람을 계속 붙잡고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실례입니다.”

그녀는 굳이 그에게 자신의 생존 사실을 알려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생존 사실에 그가 어떻게 반응할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황실과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간신히 털어 버렸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렇다면 그 사람을 잊으십시오. 그 사람도 자신의 남편이 아파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가 아파하는 모습이 싫었다.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아프니 자신도 아팠다. 슬퍼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네?”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그 사람은 잊을 수 없다.”

“어째서죠?”

“그 사람은 내가 소중한 사람을 모두 잃었을 때 나타난 구원과도 같은 사람이다.”

“…….”

“그 사람은 죽은 내 형님과 어머니 다음으로 나타난 소중한 사람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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