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이해하다
자신은 행복했다, 라이넨은 자신의 유년기를 늘 이렇게 정의했다. 엄하지만 든든한 기둥인 아버지, 자애로운 어머니, 그리고 존경하는 형까지. 화목한 가정은 그를 그늘 없는 아이로 자랄 수 있게 해 주었다.
“형님!”
매일매일 시녀들이 가져오는 간식에 좋아하는 순수한 아이였던 라이넨은 공부를 싫어하고, 교사들을 골탕 먹이는 재미를 가지고 있는 개구쟁이였다.
“왔니?”
“예!”
라이넨의 형, 라이넬 폰 루미니르는 그보다 8살이나 많았다. 그래서 라이넬은 항상 동생을 귀여워했고, 그는 형을 자랑스러워했다. 라이넬은 마법 계승의 대상이자 루미니르 제국의 황태자였다.
차기 황제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라이넬은 라이넨의 우상이었다. 항상 같이 있고 싶었고, 형님으로서 존경했다.
그렇지만 라이넬은 황태자인 만큼 매우 바쁜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수업과 업무에 파묻혀 살아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동생인 그가 놀자고 하면 업무까지 물리고 함께 놀아 주는 사람이었다.
‘형님은 훌륭하신 분이니까!’
그는 자신의 형이 훗날 황제가 되면 이 제국이 더욱더 장성할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훌륭한 형이 있으니 그가 질투할 리가 절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좋아해서 탈일 정도였다.
“형님, 저랑 놀아요!”
“그래, 오늘은 무엇을 하고 싶니?”
“헤헤, 형님과 유리 온실에 놀러 가고 싶습니다.”
“황자 전하, 이제 황태자 전하께서는 국정을 보러 가셔야 합니다만…….”
“오늘도 형님은 바빠? 왜 자꾸 형님한테 일 시켜.”
라이넬의 직속 시종의 말에 그는 투정을 부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라이넬이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다. 서류 정도면 금방 처리할 수 있으니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넌 그냥 다과를 준비하고 우리를 따라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라이넬의 중재에 시종은 고개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이넨에게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 유리 온실이라고 했지? 지금 당장 가자.”
“네, 형님!”
그렇게 둘은 유리 온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황후는 꽃을 손질하고 있었다. 라이넬이 반갑게 말했다.
“어마마마.”
“어머, 라이넬! 우리 둘째도 있었네?”
황후는 아들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라이넨은 오늘은 참 운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존경하는 형님과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마침 시종이 다과를 가지고 왔다.
“황후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어마마마, 우리 같이 이거 먹어요.”
라이넨은 황후의 치마를 잡으며 칭얼거렸고, 황후는 웃으며 시종에게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시종은 온실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에 다과를 놓았다. 황후와 라이넬은 홍차, 라이넨에게는 우유를 따라 준 시종은 뒤로 물러갔다.
그렇게 셋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 라이넨이 혼자서 재잘거리면 황후와 라이넬이 듣고는 웃어 준 것에 불과했지만.
“그래서 제가 이렇게…….”
그는 과장되게 팔을 펼치며 자신의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실상은 그가 사고를 치고 시종들이 수습한다고 고생한 것이었지만 둘은 재미있게 들었다.
“그렇구나. 우리 아들 참 당찬걸?”
그리고 궁의 모두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막내의 순수함을 지켜 주기 위해 모두들 침묵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라이넨은 예쁨받는 황손이었다.
그러나 그걸 모르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하는 라이넨을 황후는 그거 귀엽다는 표정을 지으며 코를 살짝 꼬집었다. 그는 아팠지만 자신을 보며 웃는 어머니의 모습에 그냥 헤헤 웃었다.
그리고 라이넬은 동생의 몸짓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라이넨은 자꾸만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는 그들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듣고 계십니까?”
“당연히 듣고 있단다. 이 어머니는 아들이 똑똑해서 참으로 행복하구나.”
“형님은요?”
“우리 동생의 모험담이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는데?”
라이넨은 너무나도 행복했다. 언제나 이 행복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행복이 깨지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계기는 매우 사소했다. 라이넬이 나이가 차 이제 혼인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혼인을 하고 난 후에는 대부분의 황족들은 황태자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궁 밖으로 아예 나가 버리거나 죽은 듯이 살아야 했다.
그래서 라이넨 역시 원치 않는 출궁이 결정 나 버렸다. 이에 그는 형님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심히 반발했다. 그런 둘째를 설득하기 위해 황제는 라이넨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이는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폐하, 넨은 아직 어립니다. 받아들이기 힘들 거예요.”
“아바마마, 저희가 라이넨과 여행이라도 하면서 마음을 풀어 보고, 그때 다시 설득해 보겠습니다.”
“후, 그렇게 해 보거라.”
황후, 라이넬이 황제를 설득한 결과, 황제는 휴가를 허락해 주었다. 황제를 제외한 황족들은 황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놀러 가기로 했다. 그 때문에 라이넨은 아침부터 신이 났다.
그러나 화창했던 하늘은 곧 어두워지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바깥 풍경을 보며 라이넨은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 상황에서 황후와 라이넬이 자신을 설득하려 하자 그는 화가 났다.
“왜 저는 할 수 없다는 겁니까!”
“넨, 그게…….”
“형님은 제가 싫으십니까?”
“그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라이넬이 라이넨을 싫어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에게 있어 라이넨은 소중한 동생이었다. 그러나 자꾸 라이넨의 존재를 걸고넘어지는 귀족들이 많았기에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궁 밖으로 내보냈다가 다시 들여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건 라이넨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형을 설득하기 위해 위험한 일을 벌였다. 그저 함께하고 싶어서 달리는 마차 문을 열었고, 그의 그런 돌발행동에 놀란 마부는 미처 방향을 틀지 못했다.
결국 마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감싸다 바위에 부딪혀 죽은 어머니를 흔들며 오열했다. 자신 때문에 그 뜻을 다 펴지 못한 채 심장을 찔려 고통스럽게 죽은 형님의 모습을 보며 절규했다.
“으아아아아악!”
그렇게 한참 동안 비명을 지르던 그는 일어나 비틀거리며 황궁까지 걸어왔다. 꽤 먼 거리를 혼자 걸어온 그의 모습에 모든 사용인들이 놀라 달려왔다. 그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웅얼거리며 잠들었다.
황제는 홀로 돌아온 그의 모습에 조사대를 착수했고, 조사대는 사건 현장에 죽어 있는 황후와 황태자의 시신을 모셔왔다. 황제는 곧장 국장을 치렀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에 슬퍼했다.
누구보다 슬퍼한 사람은 바로 황제였다. 아내와 첫째 아들이 죽었다. 둘째 아들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고 한다.
그렇지만 황제는 통치자로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이렇게 남은 자식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아…….”
그런 황제의 간절함은 하늘에 닿았다. 라이넨은 곧 깨어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 때문에 형과 어머니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자책했다.
그러나 슬퍼할 틈도 없이 그는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그 결정에 크게 반발했다.
“형님과 어마마마가 죽은 것은 제 탓입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형님의 뒤를 이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건 네 탓이 아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황제는 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라이넨. 너밖에 할 사람이 없다.”
“…….”
“라이넬의 뒤를 이을 사람은 너밖에 없단 말이다!”
“……그럼, 형님의 의지를 잇겠습니다.”
그렇게 그는 황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라이넬의 궁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릴 뿐,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비워진 황태자궁을 보며 그는 자신의 죄를 새기고 또 새겼다.
‘나는 죄인이다.’
그 사고는 그를 바꾸었다. 말투는 싸늘해졌고, 분위기는 차가워졌다. 화사하게 웃던 아이는 사라졌다.
말수는 줄었고, 모든 것에 무심해졌다.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중한 것을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의 의무를 행할 뿐이었다.
황제는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그는 한 제국의 수장이었기에 무작정 아들만 돌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장례가 끝난 후, 전 황후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현 황후와 결혼하여 라이부스를 낳았다.
그렇지만 라이넨에게는 그것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는 황제에게 실망하고 황후를 경멸했다. 자나 깨나 자신을 걱정하는 황제의 시선을 밀어내고, 자신을 품으려는 황후의 마음을 튕겨냈다.
그렇게 마음 안에 아무도 들이지 않은 채 홀로 살았다. 그런 그에게 카니벨라가 나타났다. 자신과 같은 그녀는 그에게 구원자였다.
* * *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버릴 수가 있단 말이냐? 대답해라!”
“…….”
카니벨라는 정말 몰랐다. 서류에 단 몇 줄로 적혀 있을 뿐인 그 과거사가 이렇게 슬프고, 그를 무너뜨렸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네가…….’
연회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동질감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 또한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러나 그녀와는 달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손으로 그들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과 닮은 그녀가 나타나기 전까지 속죄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그렇게 집착했던 것이다.
그녀가 그의 구원이나 다름없으니까.
“그 사람들은 당신이 이렇게 슬퍼하기를 바라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그녀는 그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는 그녀의 품에 쏙 들어갔다. 곧 그녀의 옷이 축축해졌다.
“그건 당신의 탓이 아니에요.”
그의 흐느낌은 더욱 커졌다. 그 또한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녀는 그의 팔 힘에 아팠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건 사고예요. 이렇게 슬퍼하는 당신을 보면 그 사람들이 더 슬플 거예요.”
그런 그녀의 위로에 그의 눈물이 멎어가기 시작했다. 한 방울에 형님에 대한 죄책감이, 다른 한 방울에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이, 마지막 눈물방울로 사랑하는 이에 대한 슬픔이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그는 슬픔을 털어가는 방법에 대해 배워 갔다.
‘그러니까 그만 울어, 라이넨.’
그녀는 속으로 속삭였다. 그녀의 죽음은 그녀의 탓이 아니고 단지 오해로 인해 빚어진 비극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사과해야 할 일이었고, 그에 대한 죗값 또한 치러야 한다.
그녀는 그에 대한 미안함과 이때까지 자신을 그리워한 그에 대한 묘한 감정을 끌어안았다. 그것은 저 깊은 곳부터 심장까지 닿아 그녀를 흔들었다.
“이제 괜찮은가요?”
“……그래.”
그가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고 눈까지 빨갰지만 그는 후련함을 느꼈다.
“괜찮아지셨다면 이제 그만 가 보도록 해요.”
“그러도록 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닦아 내고 놀다가 지쳐 풀밭에 벌렁 누워 버린 아이를 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바구니를 들고 걸어가고 있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이지 감당할 수가 없구나…….’
그녀는 카니벨라 이후 그 누구도 흔들 수 없었던 그를 사정없이 흔들고 그의 깊은 곳에 들어와 그를 어루만졌다. 처음에는 그것이 싫었기에 거부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남은 날은 사흘.’
그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일주일이었다. 이미 3일이 지났으니 남은 시간은 반밖에 없는 셈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