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고백
그렇게 한껏 쏟아 낸 이후, 둘은 왠지 모르게 어색해졌다. 카니벨라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순간적으로 그를 안아 버렸다는 게 부끄러웠다. 라이넨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안겨서 엉엉 울어 버렸다는 게 창피했다.
둘은 그저 앞만 바라보며 걸었고, 둘 사이에 끼어 있는 라이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루시!”
그때, 가게가 일찍 끝났는지 루카스와 함께 거리를 걷고 있던 마리가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안 그래도 어색했는데 잘되었기에 곧장 마리에게 뛰어갔다.
“마리, 벌써 끝났어요?”
“오늘은 재료가 일찍 동나서요.”
마리는 평소와 다른 그녀의 모습에도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아티팩트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소에 자신의 과거와 아레마이에 관한 것은 제외하고 전부 말해 주었기에 마리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그 모습에 라이넨은 살짝 표정을 찌푸렸다. 아티팩트 자체가 황실의 비밀이기에 마리 같은 외부인이 알면 곤란했다. 그러나 이미 외부인 둘이 알고 있었기에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오늘은 라이지를 저희 쪽에서 데리고 잘게요. 내일 또 데리고 올 테니 오늘은 편히 자요.”
“괜찮아요.”
“아니에요, 루시. 여태까지 라이지 때문에 밤 축제는 못 즐겼잖아요. 그러니 옆에 계신 분이랑 즐기고 오세요.”
“하하하…….”
“오늘 같은 기회는 더 없잖아요. 그러니 다녀와요.”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즐기고 싶다고 해서 즐길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그렇지만 그는 그녀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고마워요! 오늘 루시랑 재미있게 놀아 줘서요.”
그녀는 반짝거리는 마리의 눈빛을 애써 무시했다. 나중에 라이넨과 헤어지면 마리에게 우린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해명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이야 부부였으니까 괜찮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라이넨한테 실례지.’
그녀는 그를 보면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지만 그 역시 그럴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카니벨라가 아니다.
그들은 마리의 닦달 아닌 닦달에 거리로 향했다. 낮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이는 축제 현장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히려 밤이라 더 색색의 아름다운 불꽃들과 화려한 풍경에 눈이 돌아갔다.
여기저기서 호객행위가 일어났다. 여러 음악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춤을 추고, 광장에서 불을 피우고 소원을 빌거나 뜨거운 애정 행각을 벌였다. 그녀는 낮의 축제는 상당히 얌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연인들을 위한 게임들을 하는 것이 보였다. 여러 연인들이 서서 즐기고 있었다. 그는 다소 흥미로운 표정으로 저들의 행동을 쳐다보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하고 싶나?
“게임, 하고 싶나?”
“예?”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재미있어 보이기는 한데 굳이 제가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녀는 그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저런 걸 즐길 때는 이미 지나갔다. 그냥 시끄러우니까 보고 있었지.
그때, 사회자의 말이 그들의 귀에 꽂혔다.
“자, 자, 오늘은 다시없을 상품을 받을 기회! 라소니 왕국의 특산품, ‘에밀리아의 눈물’로 만든 팔찌를 우승 상품으로 드리겠습니다!”
라소니 왕국 산 무언가.
그들이 처음 만나 첫 데이트를 했을 때 지나가다 참여했던 이벤트가 그들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팔찌를 가져와 주겠다고 했던 라이넨이 생각났고, 그는 팔찌를 쳐다보던 카니벨라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했던 자신이 떠올랐다.
“…….”
둘은 서로에 대한 생각에 침묵했다. 그때, 라이넨이 입을 열었다.
“참여하자.”
“네?”
그는 그 말만 던지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람들 안으로 들어갔다. 둘은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더 없으신가요? 그럼 시…….”
“여기 더 있다.”
사회자는 둘의 모습을 보고 재빨리 무대 위로 내보냈다. 그녀는 갑자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서게 되자 당황스러웠다. 본래도 앞에 나서는 성정이 아닌 데다가 암살자 활동을 하며 어둠 속에만 지내다 보니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졌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그저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휘파람을 불며 그들의 사이를 두고 어울리니 마니 입방아를 찧었다.
‘그나저나 커플 게임이라니.’
서로의 애정도를 테스트하는 게임이라고 하는데 그녀는 이런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예전이라면 재미있게 했겠지만 그녀와 라이넨은 현재 커플이 아니었다. 내려오고 싶었다.
“이번 게임은~ 애인을 최대한 오래 안고 있는 사람의 승리입니다!”
사회자의 말에 모두가 자신의 연인을 다정하게 안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정쩡하게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들의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 옆 참가자가 말했다.
“어이, 그렇게 있을 거 같으면 나가.”
그 말에 그는 그녀를 당장 안았다. 그녀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자, 이제 시작!”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시작 신호가 들렸다. 곧 참가자들이 격렬하게 앉았다 일어나기를 하기 시작했다. 서로를 향해 경쟁 어린 눈빛을 보내며 팽팽한 팔 근육으로 쉴 새 없이 게임에 임했다.
그러나 곧 헉헉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고, 남자들의 다리는 서서히 떨리기 시작했다.
“포, 포기!”
“더, 더 이상은 못 해!”
“왜 이렇게 무거워!”
“자기야, 미안!”
서서히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그들에게 연인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는 것이 아니냐고 놀려댔지만 참가자들은 알았다.
이게 얼마나 극한 일인지를!
그렇지만 아직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팀이 있었다. 바로 카니벨라와 라이넨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절대 그가 질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전에 상사병 때문에 몸 상태가 최악임에도 그녀를 찾기 위해 먼 거리를 달렸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황태자 수업 시간에는 검술 훈련 또한 포함되어 있기에 안 좋은 것이 이상했다.
또한 그녀도 은연중에 라이넨이 힘들어하지 않게 하기 위해 힘이 가해지지 않게 조절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경쟁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커플이 있었다. 마을에서 꽤 유명한 수리크와 아이나는 장수 커플이었다. 그렇지만 무대에 카니벨라와 라이넨이 등장함으로써 시선을 빼앗겨 배가 아팠다.
‘저 연놈들은 도대체 어디서 굴러들어온 돌들이야…….’
아이나는 악의 어린 시선으로 안겨 있는 카니벨라를 보며 수리크에게 좀 더 힘을 주라고 닦달했다. 수리크 역시 너무나도 편하게 연인을 안고 있는 라이넨을 바라보며 좀 더 힘을 내기 위해 안달복달했다.
그렇지만 그런 그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카니벨라와 라이넨은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저들의 눈빛에 빨리 끝내야겠다는 마음이 솟아났다.
“아~ 끝나지가 않네요! 그럼 이번에는 다른 걸 해 볼까요?”
사회자는 길어지는 승부에 관객들이 지루해할까 새로운 것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위에 사람을 올려놓고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하는 것이었다. 관객들은 흥미로운 볼거리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간단하군.’
그리고 실제로 그는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빨리 엎드려뻗쳐를 하고 자신의 등 위에 그녀를 앉혔다. 그녀는 그가 올라갔다 내려갈 때마다 박력 넘치는 그의 등 근육을 느낄 수 있었다.
“헉헉헉.”
그렇지만 옆에 있는 수리크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이미 다리는 끊어질 정도로 아팠고, 휘청거렸다. 팔에는 감각이 없었고, 아이나는 가면 갈수록 무거워지기만 했다. 그는 당장에라도 포기하고 싶었지만 포기했다가 연인에게 어떤 질책이 날아올지 몰라 참았다.
그러나 현실은 더 지쳐가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지만 결국 탈락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해야 했던 것이 바로 연인을 안은 채로 한 발을 들고 오래 버티기였기 때문이다.
“크윽!”
결국 그는 넘어졌고, 그 반동으로 아이나는 넘어져 엉덩이를 거칠게 박았다. 아이나는 아프다고 악을 쓰며 수리크의 등을 때렸다. 그사이, 카니벨라는 라이넨에 의해 안전하게 내려왔다.
“자, 팔찌의 주인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첫 데이트를 연상케 하는 물건을 다시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꽤 당혹스러웠다.
“가요.”
그들은 곧장 거리로 나갔다. 그는 팔찌를 그저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기다려요!”
갑자기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까 그들을 향해 쓸데없는 경쟁의식을 불태우던 수리크였다. 그녀의 앞에 도착하자 수리크는 무릎을 꿇고 사정하였다.
“저기, 제발 그 팔찌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예?”
“제발요!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대놓고 무릎을 꿇는 수리크를 보자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잠시 이 사람과 말 좀 하고 올게요.”
“어?”
“다녀올게요.”
그러고는 수리크의 옷 뒤쪽을 잡고는 다소 어두운 골목이 보이는 곳까지 끌고 갔다. 수리크는 옷이 목을 눌러 한동안 캑캑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수리크를 무감한 표정으로 보곤 말했다.
“다시 말해 봐요.”
“그 팔찌, 주실 수 있으신가요?”
“왜 어째서 달라고 하는 건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요. 다짜고짜 이야기해서 사람 당황시키지 말고.”
“아…….”
“연인에게 주고 싶어서 그래요?”
“네. 가지고 싶어 했거든요.”
“왜 제가 줘야 하죠?”
“그건…….”
그녀는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타인의 것을 구걸해서 얻으려는 자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이것은 라이넨이 준 것이다. 그런 소중한 것을 왜 저 찌질한 놈에게 주어야 한단 말인가.
“…….”
그녀는 멈춰 섰다. 무엇인가 벼락처럼 그녀의 전신을 강타했다.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심장이 이리 뛰고 있었지?
어이가 없었다. 날뛰는 심장은 이제야 그녀의 앞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왜 이걸 이제야…….”
그녀가 멈춰 있는 사이, 수리크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 깨닫지도 못하고 있을 만큼 두근거림에 취해 있는 상태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라이넨을 다시 마음에 담았다.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걸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그저 미안한 게 다라고 생각했던 감정은, 애써 부정했던 감정은 처음부터 사랑이라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증오의 꽃은 피어나지도 않았다.
팔찌를 더 세게 쥐었다. 여전히 심장은 아플 정도로 뛰고 있었다. 그녀는 뒤늦게 깨달은 감정에 안절부절못했다.
“루시아. 거기 있나?”
그때, 라이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때까지 울리고 있는지도 모르던 심장이 거칠게 뛰며 존재감을 나타냈다. 그녀는 자신을 찾으러 온 그를 보자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어리둥절했다. 갑자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더니 하는 말이 뜬금없는 과거 이야기였다.
“갑자기 무슨…….”
그는 당황했다. 그녀의 말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계속 말을 꺼내기만 했다.
“전 그 사람을 오해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정말 수많은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제는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 그의 앞에 그녀는 진심으로 고백했다.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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