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루시아의 정체
“사랑해요…….”
갑작스러운 카니벨라의 고백에 라이넨은 꽤 당황스러웠다. 며칠 동안 함께 있으면서 그런 낌새를 전혀 보이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무슨 심정의 변화가 있는 거지?
그는 그녀에게 끌려가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부정했었다. 그런데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인가?
그는 자신의 마음이 그녀와 맞닿아 있다는 게 당혹스러웠기에 그녀가 앞에 했던 말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당황한 그를 보며 그녀는 울음 어린 눈으로 웃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더 슬프다고 생각했다.
“울지 마.”
“안 울어요.”
“…….”
“전 고백에 대한 답을 해 달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좋아서 그런 거니까요.”
그는 그 말에 아무런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는 현재 그녀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은 느끼지만 그게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어떤 답을 해 주어야 그녀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이미 그는 약혼녀가 있었기에 지금 당장은 고백을 받아 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의 고민 어린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저 웃기만 하였다. 그러고는 말했다.
“내일 할 말이 있어요. 꼭 나와 주세요.”
“……내일?”
“네. 꼭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넨.”
“꼭 나오도록 하지.”
“내일은 그 호숫가에서 봐요.”
“그러지.”
그렇게 대화를 하는 사이, 이미 그녀의 집 앞이었다. 그녀는 곧 집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그녀의 방에 불이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 자작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몸을 씻고 침대에 누웠다.
그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넨.>
넨?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애칭에 대해 알려 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애칭을 불렀다.
‘내일 가야 하나?’
갑자기 그는 겁이 덜컥 났다. 저 눈물 젖은 고백이 사실은 그를 흔들기 위한 거짓이라면? 그렇다면 그는 마음이 완전히 부서질 것이다.
‘아니야, 일단 가 보는 거야.’
그녀는 내일 그에게 꼭 할 말이 있다고 했었다. 그걸 다 듣고 난 다음에 그녀의 정체에 대해 물어봐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일단 내일이 되어 봐야 알겠군.’
* * *
카니벨라는 오랜만에 화상 분장을 지웠다. 오랜만에 본 자신의 본 모습이 새로웠다. 한참 동안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던 그녀는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을 보고는 준비를 끝마쳤다. 그리고 목걸이를 걸었다.
‘날 수상하게 생각하겠지.’
자신이 그를 ‘넨’이라고 부름으로써 수상하게 여길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를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아마 다시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나가 볼까.’
그녀는 문을 열었다. 지고 있는 해가 아름다웠다. 노을빛에 아름답게 물든 마을은 평화롭고 또 평화로웠다. 이곳에서 그녀는 영원히 살고 싶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전처럼 그녀를 사랑해 줄까? 아니면 사람을 죽인 그녀를 경멸할까?
“…….”
알 수 없었다. 겁도 나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렇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겨 보기로 했다. 그가 그녀를 받아 주든, 받아 주지 않든 그녀는 그를 계속 사랑할 테니.
저벅저벅.
그녀의 발걸음이 묵직하게 울렸다. 오늘은 다음 날 있을 마지막 축제를 성대하기 치루기 위한 쉬는 날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조직원들의 존재를 경계하기 위해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다행이야.’
단둘이 있을 때 납치를 감행하기라도 하면 그녀는 그에게 진실을 전할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행운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이럴 때 고위 조직원이라는 신분이 참 좋았다.
아니, 애초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더 다행이었지.
‘나와 라이넨을 떨어뜨리기 위해 소문을 만들고 레이를 시켜 부추겼겠지.’
대충 전말이 보이니 짜증이 났다. 아레마이는 절대 용서하고 싶지 않은 족속들이었다. 라이넨이 어떤 반응을 보인다 하더라도 그녀는 저들을 부서뜨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걸 것이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도착했네.’
그녀는 소풍을 갔던 호숫가에 도착했다. 라이넨에게 사랑한다고 처음 고백했던 곳처럼 꽃밭이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 정도의 꽃이 피어 있는 곳은 영주 성밖에 없었기에 포기했다.
아직 그는 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네.’
그녀는 습관처럼 혹여 숨어 있는 존재가 있나 그들의 기척을 살폈다. 평소라면 상관없었겠지만 지금 하는 것을 남이 본다면 꽤 귀찮아질 수 있었기에 최대한 조심했다. 아무래도 위험 요소는 적을수록 좋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느껴지는 기척이나 시선이 없었기에 그녀는 마음 편히 벤치에 앉아 호수를 감상했다. 뱃놀이를 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들을 아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안 오네.’
이미 한밤중이 되어 달이 떠올랐다. 그녀는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그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분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순간, 급하게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라이넨이었다. 그의 걸음 소리를 이미 외워 두고 있었기에 그녀는 안심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먼저…… 와 있었나?”
“네.”
숨을 고른 그는 다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곧 황궁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해야 할 일이 꽤 많았다. 그래서 그녀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이미 집은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재빨리 일을 끝내고 달려왔다.
“미안하군. 일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제가 보자고 했던 건데요, 뭘.”
“고맙군.”
그녀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먼저 주위를 살폈다. 사람은 없었고 달빛은 환했다. 정체를 밝히기 참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내 조금 망설여야 했다. 이미 그녀가 없이도 잘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그에게 혼란을 주어도 될까? 그에게 엄청난 민폐가 되는 거 아닐까? 괜히 자신이 그에게 악영향을 미칠까 걱정되었다.
“루시아?”
그러나 그의 표정을 본 순간, 결단을 내렸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체를 밝히자. 더 이상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목걸이를 빼냈다. 갈색 머리카락이 금발로, 갈색 눈이 벽안으로, 흉터 없는 매끈한 볼이 드러났다.
“…….”
그는 달빛에 비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뭔가 달라졌다. 그러나 이윽고 눈이 커졌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
“너, 너는…….”
“라이넨.”
“정말이야?”
“맞아.”
오랜만에 듣는 반말이었다. 그는 그녀의 죽음 이후, 카샨과 황제, 황후 이외에는 자신에게 반말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넌 진짜로 살아 있는 건가?
그녀는 그가 기억하는 모습이 맞았다. 그렇지만 그는 쉽사리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이게 허상일까 봐. 그는 이미 오래전에 그녀의 죽음을 확인하고 절망했으니까. 또 실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라이넨. 나 못 믿어?”
“나는…….”
그렇지만 그녀는 그의 사정이 쉽게 이해가 갔다. 아마 자신 같았어도 쉽게 믿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자, 느껴봐. 난 살아 있어.”
그녀는 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얼굴에 갖다 댔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드디어 이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
그는 어제에 이어 눈물을 흘렸다.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 그녀는 있는 힘껏 그를 안아 주었다. 그는 그녀의 품에 안겨 그렇게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그의 떨리는 몸을, 심장 박동을 느꼈다.
“이제 진정이 좀 돼?”
“……응.”
눈 밑이 빨개진 그를 보며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눈 밑에 작게 키스했다. 그가 움찔했다.
“미안해, 널 떠나서.”
“…….”
“내 멋대로 널 오해하고 떠나서 널 힘들게 했어.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녀는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그리고 한참을 미안하다고 말했다. 널 오해하고 떠나서 상처 주고 이렇게 아직 아프게 만든 것이 난 미치도록 미안하다.
“그렇지만 이제부터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보다 너를 더 믿을게. 신을 걸고 맹세할게.”
“카니벨라.”
“응?”
“그런 말 안 해도 괜찮아. 난 널 믿어.”
“미안해…….”
그렇지만 그녀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에게 엄청난 죄를 저질렀으니까.
난 널 믿지 못했어. 소문에 휘둘려 너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미워했어. 그리고 이렇게 네게 큰 상처를 줬어. 그리고 난 아직도 네게 숨기고 있는 것이 많아. 그런데도 넌 날 믿는다고 하는구나.
“아니야. 이렇게 내게 나타나 줘서 고마워.”
“넌 날 부끄럽게 하는구나.”
“어째서?”
“난 널 다시 봤을 때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 그런데 넌 날 보자마자 나타나 줘서 고맙다고 하네.”
난 널 그저 사랑하니까. 지금 널 보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감격인지 넌 알고 있을까. 내 손에 느껴지는 이 온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넌 알고 있을까. 내가 지금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긴장하고 있는지 모를 거야.
‘그래, 넌 모를 거야.’
그때, 그녀가 그를 풀어 주며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중대한 발표를 앞두고 있는 사람처럼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기세에 그도 덩달아 긴장했다. 그녀는 그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또 한 가지 할 말이 있어.”
“뭔데?”
“라이지는…… 우리 딸이야.”
“뭐……?”
“너와 나 사이에서 난 딸이라고.”
“뭐라고?”
그는 놀라 눈이 커졌다. 라이지가 그와 어느 정도 닮았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아이가 자신과 그녀의 딸이라니. 그건 정말 몰랐다.
“도대체 언제……?”
“……너랑 내가 동침한 날에.”
그의 침묵에 그녀도 침묵했다. 아마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다행이네.”
“응?”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우리의 딸이라니. 난 정말이지 자랑스러워.”
그는 왜 그녀에게 아이를 다른 사람의 딸로 키웠는지 묻지 않았다.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데 시간이 늦었어.”
밤은 더욱 깊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 역시 들려올 카샨의 잔소리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내가 곧 찾아갈게.”
“어떻게?”
“다 방법이 있어. 내일 이 시간 즈음, 뒷문의 개구멍만 비워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든 들어올 방법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닐까.
“그리고 네 방에 네가 믿을 만한 사람들을 같이 데리고 있었으면 좋겠어.”
묘하게 이상한 말이었지만 그는 알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볼에 짧게 키스하며 말했다.
“내일 봐, 라이넨.”
“그래.”
“오늘의 상황을 꿈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줘. 여기 있는 나는 현실이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알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는 달려가는 그녀를 보며 다시 한번 볼을 꼬집었다.
“아, 꿈이 아니구나…….”
그래, 너는 꿈이 아니었다. 그는 그게 미치도록 감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