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털어놓다
카니벨라는 라이넨에게 막상 모든 것을 털어놓으려니 그가 경멸하는 표정을 짓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녀가 원해서 아레마이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시킨 대로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맞으니까.
“……휴.”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 때문에 절망 어린 삶을 살아야 했던 라이넨, 자신 때문에 레미우스 왕국에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는 유키르, 그리고 자신 때문에 친부모 밑에서 크지 못하는 라이지에 큰 빚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그걸 듣고 어떻게 할지는 라이넨이 결정할 일이었다. 그녀는 그저 그에게 상황을 알려 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라이넨이 그들의 악행에 분노하여 아레마이 소탕에 앞장설 것이라고 확신했다. 라이넨은 백성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황족이기에 그들의 계획을 들으면 분노할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은 앞에 있는 마리에게 집중하기로 하였다. 마리는 본인이 더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를 걱정해 주었다.
“루시, 어제 푹 쉬셨나요?”
“아, 마리.”
그녀는 마리와 라이지를 환영해 주었다. 라이지는 어제 같이 자지 못해서 아쉬웠다고 칭얼거렸다. 그녀는 아이가 귀여워 웃다가 마리를 향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마리, 이 마을에서 앞으로 죽을 때까지 계속 사실 건가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근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하하, 아니에요.”
“에이, 루시는 떠날 건가요? 전 루시와 계속 이렇게 함께 살고 싶어요.”
“마리, 저도 그러니까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그녀는 라이넨에게 모든 것을 말하고 그들과 싸움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마리와 루카스가 혹시라도 인질로 잡힐까 봐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아레마이의 성격상 그들을 잘 대할 리도 없었다. 아마 그들은 만신창이가 될 것이다.
‘이들을 동행시킬 수만 있다면…….’
그녀가 앞으로 라이넨에게 요구할 것은 딱 하나, 마리, 루카스, 라이지의 보호뿐이었다. 마리와 루카스는 그녀가 이때까지 만났던 사람 중에서 가장 착한 사람들이었다. 절대 잃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또한 라이지는 딸이기도 한 데다가 지금으로서는 황태자의 유일한 핏줄이기에 황실에서 황녀로서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이와 함께 살고 싶다는 그녀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겠으나 아이가 위험해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아무리 아레마이가 시스티아 왕국 정복 후, 2년 동안 루미니르 제국 여기저기에 침투해 있다 하더라도 황실까지 장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직 그런 소식을 들은 적도 없거니와, 황실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다.
그녀가 떠난 이후(정확히 말하면 징벌의 궁 방화 이후이지만 카니벨라는 원래 이유를 몰랐었다.), 황제는 지속적으로 사용인들을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전면 교체했기에 쉽사리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러니 황궁은 마리 일행을 보호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라이넨의 귀환 길에 동행시켜 이곳을 떠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마리의 의견을 존중했다. 마리가 떠나기 싫다고 한다면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보호받을 수 있게 할 것이니까.
“사실 전 어디를 가더라도 루시와 함께 있으면 돼요.”
“마리, 고마워요.”
그녀는 자신에게 무한한 신뢰의 시선을 던지는 마리를 보며 마음 한 곳이 따뜻해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마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일단 오늘도 저녁에 데리고 올게요. 내일이 축제 마지막 날이라서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거니까요.”
“마리,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올 때까지 라이지와 놀고 있을 테니까요.”
“루시, 말만 해도 참 고마워요. 최대한 빨리 올게요.”
그녀는 연신 고맙다고 하는 마리를 빨리 돌려보냈다. 그리고 오늘은 밖에 나가지 않은 채 라이지와 집에서 놀았다. 책을 읽어 주기도 하고, 함께 블록 놀이를 하기도 했다. 아이는 집 안이라고 전혀 지루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다고 말하며 좋아했다.
“이모, 오늘은 그 잘생긴 아저씨 안 와?”
“잘생긴 아저씨는 바빠서 오늘은 안 되고 내일 오신대.”
“와아! 나 그 아저씨, 좋아.”
“라이지는 그 아저씨가 좋아?”
“응. 아빠보다, 더 좋아.”
“왜?”
“아저씨 웃으면 잘생겼고, 아빠보다 더 포근해.”
루카스는 마리처럼 다정하기에 아이에게 절대 못해 주지는 않았다. 그냥 라이넨에게서 친아빠에 대한 본능적인 끌림을 느껴서일 것이다. 그녀는 아이의 말에 작게 웃었다. 아마 저 말을 듣는다면 라이넨은 좋아할 것이다.
시간이 되어 아이에게 점심을 먹이고, 다시 놀았다. 그리고 저녁이 되며 하늘에서 지는 노을을 구경했다. 그 직후 마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녀는 마리에게 물 한 잔을 주며 숨을 고르게 해 주었다.
“마리, 제가 천천히 오라고 했잖아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가 어떻게 루시에게 그럴 수가 있나요.”
“그래도 좀 쉬엄쉬엄하세요.”
“헤헤, 고마워요 루시.”
그녀는 마리와 라이지에게 저녁까지 해 주고 보냈다. 그리고 그들을 배웅하며 사방의 기척을 확인하였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안심이었다.
이제 라이넨과의 약속을 지킬 시간이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암살자 복장을 했다. 그리고 어둠 속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라이넨이 너무 놀라지 않기만을 바랐다.
* * *
카샨은 라이넨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꽤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뷰이트까지 함께였다. 뷰이트는 라이넨 산하 비밀 정보 조직 에리칼의 수장이기에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뷰이트까지 불러낼 정도라면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심각하다는 것일까. 카샨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건 뷰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러운 소환에 그는 주군의 안전이 염려되었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그래, 무슨 일인지 좀 알고 여기 있었으면 하는데.”
“너희에게 보여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사람?”
둘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측근들을 불러 모은 것일까? 그렇지만 라이넨은 굳이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둘의 의문은 더욱더 깊어졌다. 그때, 라이넨의 귀에 익숙한 기척이 들렸다.
“왔군.”
그는 문을 열었다. 암살자 복장의 카니벨라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을 다 가린 채 눈만 보였다.
“라이넨.”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으나 그녀의 그런 복장을 본 라이넨은 당황했고, 카샨과 뷰이트는 표정이 굳었다. 갑자기 웬 암살자지? 사람을 불러야 하나? 그런 경직된 분위기를 느낀 듯,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안으로 들여보내 줄래? 언제 사람이 올지 모르잖아.”
“응, 그, 그래…….”
그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재빨리 그녀를 방 안에 들인 후 문을 걸어 잠갔다. 카샨과 뷰이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복면을 벗었다. 그리고 카샨을 보며 반갑게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카샨.”
“네? 오랜만이라고? 당신 누구…… 헉!”
“네, 저예요.”
카샨은 마치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분명히 죽은 것을 확인한 전 황태자비가 왜 여기에 있냔 말인가! 그것도 암살자 복장을 하고! 그는 라이넨에게 설명의 시선을 보냈으나, 라이넨 역시도 다 알지는 못했기에 딱히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카니벨라.”
그녀는 라이넨을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중요한 할 말이 있어. 혹시 이 근처에 듣고 있는 사람이 있어?”
“딱히 없어.”
“지금부터 하고자 할 말은 지극히 큰 기밀이니 주의해 주길 바라.”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주의를 요구한다면 보통 일은 아니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녀는 제일 먼저 물었다.
“혹시 아레마이라는 조직에 대해서 알아?”
“아레마이? 최근에 다소 떠오르고 있는 신흥 조직이라고 들었는데…….”
정보를 다루는 이들조차도 아레마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앞으로 싸워 나가야 할 조직의 실체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녀가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저들은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그들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레마이는 대륙을 정복하기 위해 출발한 조직이야. 그리고 이미 루미니르 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아레마이의 수중에 있지.”
“……!”
카샨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보니 최근에 레미우스 왕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었고, 시스티아 왕국도 왕의 일가가 하루아침에 모두 죽어 교체되었다. 그걸 보며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었다.
근데 그게 다 아레마이라는 조직이 벌인 짓이라고? 카샨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 시선에 대답했다.
“저조차도 아레마이의 정확한 규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대륙 곳곳에 퍼져 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루미니르 제국에도 다수가 침투한 상태이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 제국은 쉽사리 침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신분증이 없으면 들어올 수도 없는……!”
뷰이트는 그녀의 말에 반박하려 했다. 그렇지만 라이넨은 그 말을 듣자마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황제의 결계가 일시적으로 약해졌던 시점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그때 침입했을 것이다.
“젠장.”
“이미 제국 점령을 위한 작전이 물 밑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규모는 대략 이 정도.”
그녀는 숫자를 헤아렸다. 대략 70~80명 정도.
“…….”
그녀의 말에 방 안은 침묵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인원들이 들어와 있는 동안 아무도 몰랐던 것일까?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고 라이넨은 더욱 걱정이 되었다. 하루빨리 황실에 돌아가 계승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제가 그곳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카샨은 그녀의 말에 경악했다. 지금 전 황태자비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제국을 대적하는 조직에 들어갔다는 것인가? 그는 그녀에게 따졌다.
“전 황태자비께서는 이 제국에 대한 애정이 없으셨습니까? 아무리 외국인이라도, 원했던 혼인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는 거죠?”
“전 그때 당시 황태자께서 라소니 왕국과 연관되었다는 헛소문을 들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제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 그들이 제게 접근했었습니다.”
“그럼 물어보셨으면 되었지 않았습니까!”
카샨의 말에 그녀는 다소 싸늘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카샨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제가 만나려고 했지만 정보국장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카샨은 침묵했다. 실제로 라이넨이 피곤해한다는 이유로 수차례 만남 요청을 거절했던 그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라이넨이 카샨을 째려보았으나, 그녀는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조직이 무너지는 게 제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조직을 무너뜨리는 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래.”
“흠…….”
라이넨의 입장으로서도 충격이었다. 몇 년 동안 그녀가 악의 축에서 활동했다는 것도, 그 조직이 제국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도, 전부 몰랐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악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행히 아직 제국 깊숙이 침입하지는 못한 것 같아. 왜냐하면 저들이 라이넨, 널 이용해서 자리를 꿰차려고 하거든.”
“나를 이용한다?”
“전 황태자비께서 접근하여 전하의 마음을 이용할 속셈이었군요.”
카샨과 뷰이트는 그들의 속셈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왜 그녀가 이 시기에 그들을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지 납득이 되었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기에 그런 것이다.
동시에 그녀 또한 이 조직이 좋아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저들이 어떻게 할지는 알고 있어?”
“잘 알지는 못해. 나한테 모든 걸 다 알려 주지는 않거든.”
“흠…….”
“그럼 일단은 계속 모르는 척 활동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레마이에 대한 조사는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뷰이트는 음지에 위치한 자다. 에리칼의 취지 자체가 그랬다. 그는 라이넨에게 부복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도록 하지.”
“그럼 일단 이쪽 상황에 대해 황제 폐하께 알려야겠는데. 이쪽은 내가 처리할게.”
“그러는 게 좋겠어. 카샨, 그쪽은 네게 맡기도록 하지.”
그녀는 자신의 말을 믿고 나서주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자칫하면 홀로 싸우게 될 뻔했는데 든든한 아군들을 얻었다.
“믿어 줘서 고마워…….”
“뭘, 알려 줘서 고마워. 네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당할 뻔했어.”
그녀는 그에게 인사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작전이 떠올랐다. 이제 저들에게 반격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