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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대장의 정체
눈을 뜨니 어둠 속이었다. 카니벨라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야?”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보이는 것은 웬 어린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었다.
‘갈 수밖에 없나.’
어차피 이곳에 가만히 서 있어 봐야 할 일도 없었기에 그녀는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갈 때마다 허상처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바로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주마등을 본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 난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인가? 주마등까지 보게 되다니.
‘그나저나 걸어가면서 봐야 하는 주마등이라니, 정말 누구의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악취미군.’
정말이지 기분 나쁜 주마등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행복은 12살 때 이후로 멈췄다. 그 이후로는 지옥이었고, 그녀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악몽이야.”
어렸을 적의 행복한 기억은 그녀에게 일종의 악몽과도 같았다. 꿈의 행복에 빠져 현실을 외면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행복을 맛보게 되면 머물러야 하는 현실이 더 지옥처럼 다가왔으니까.
그렇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그녀의 행복했던 시절은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그녀는 냉소적으로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저 허상에 머물러 버려 현실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면 곤란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네가 들어가.”
“싫어. 공주마마가 미친 거 같아서 나도 무섭다고.”
시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였다. 그녀는 저것만 보더라도 지금 그녀가 어느 때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때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때였다.
“기분 나빠.”
그러나 그녀가 짜증을 내든 말든, 주마등은 진행되고 있었다. 저 시점은 어머니가 죽은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그때 그녀는 기억이 일시적으로 사라져 알 수 없는 공포감만 남은 채 사람들을 무서워했다.
사람이 오기만 해도 벌벌 떨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런 그녀에게 지쳐 버린 시녀들은 서로 오기 싫어서 차례를 떠밀었다.
‘저 때부터…….’
그녀는 홀로 지쳐 갔다. 모두들 그녀를 배척했고, 그녀는 혼란스러운 상황 가운데 던져져 있었다. 그사이에 뮤일라 일가의 폭력이 시작되었다.
“이것도 못 하니? 내가 이런 것까지 지적해야 하겠어?”
“언니, 왜 제가 나서게 하시나요. 바쁜 거 안 보이세요?”
저들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그녀를 때렸다. 포크를 소리 나게 놓아서 뺨을 맞았다. 걸음걸이가 방정맞다고 손등을 때렸다. 말하는데 “네?”라고 말대꾸를 해서 종아리를 맞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갑자기 시녀였던 뮤일라가 왕이 된 것도 당황스러운데 갑자기 자신을 이렇게 때리는지 알 수 없었다.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고, 주마등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그때 뮤일라에게 반항했었다.
“왜 때리세요?”
“네가 말대꾸를 해서 그래.”
“아파요!”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저것은 아이라면 흔히 가질 수 있는 의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때 당시 저들은 정말 이상한 핑계들을 대가며 그녀를 때렸다.
아이에 불과했던 그녀는 폭력을 견딜 수가 없었다. 반항은 점점 사라지고 무력하게 맞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도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란시를 때리지 말라고 했잖니. 네가 감히 내 딸을 때려?”
그렇게 그녀는 발바닥에 회초리를 맞았다. 그리고 발길질을 당했다.
“언니, 어마마마께서 결재해야 할 서류들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떡해요? 제가 다시 정리해야 하잖아요!”
그렇게 그들은 그녀의 온몸을 몽둥이로 때렸다. 옷에 피가 물들 정도로 맞고 난 다음에야 그들은 그만두었다.
“잘못했어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강제로 잠을 자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 하루 종일 바깥에 세워 두기도 하였다. 그때 그녀는 진짜 얼어 죽을 뻔했다.
“살려 주세요…….”
어떨 때는 거의 고문에 가까운 학대를 받으며 그녀의 마음은 죽어 가기 시작했다. 그저 방바닥에 누워 흐린 눈동자로 뮤일라와 란시엔을 쳐다보며 살려 달라고 비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린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귀족들은 권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녀를 외면했고, 시녀들은 그녀를 무시했다. 그렇게 모두에게 외면당한 와중에 기억이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도저히 더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고개를 돌려 발자국을 찾았지만 끊겨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 보라는 의미인 거야?”
그녀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고개를 돌리자 멈춰 있던 주마등이 재생되었다. 기억이 돌아온 후,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왕비궁으로 갔었다.
‘그렇지만 그 인간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아비에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희망을 품었지만 그 희망은 꺼져 버렸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으로 울부짖었다.
정말로 의지할 곳은 사라졌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마음을 붙잡았다. 기억이 돌아온 순간부터 하기로 결심했던 일을 하기로.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자. 복수하는 거야.’
그렇게 다짐했던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봤다가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달리다가 검은 굴에 빠져 버렸다.
“으악!”
그리고 눈을 뜨니 간부 전용 감옥이었다.
* * *
“에이니가 그런 일을 벌이다니.”
“증오심에 휘둘려 그런 짓을 했다니, 에이니답지 않군.”
“어떻게 해야 하죠?”
카니벨라가 벌인 일을 두고 간부 회의가 열렸다. 슌카린은 짜증 나는 듯 머리를 헝클이고, 칸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이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졸고 있었다. 레신카와 시카온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렇게 경고했거늘, 제 감정 때문에 일을 망쳐?”
슌카린은 화가 나 미칠 정도였다. 에이니 정도의 조직원이 얼마나 큰 재산인데 자기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대장에게 누가 되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또한 증오심에 눈이 멀어 이런 일을 만든 에이니에게 화가 났다.
“지금 에이니는 어디에 있지?”
“간부 전용 감옥.”
“레신카, 따라오도록.”
레신카는 머리를 긁으며 일어났다. 이번 일은 명백히 그의 실책이었다. 조직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일어난 참사였기 때문이다.
“내가 실수했다.”
“이미 일어난 일이다. 만회할 생각이나 해.”
“…….”
둘은 외진 감옥에 도착했다. 감옥이라 하더라도 간부 전용이었기에 시설은 좋았다.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요양이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에이니.”
슌카린의 부름에 카니벨라는 발작하듯 일어났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지만 심문이 먼저였다. 레신카는 그녀를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네가 라이넨 황태자 납치 현장에 있었다고 들었다.”
“…….”
“내가 분명히 가지 말라고 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아직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레신카의 말에 슌카린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조직원으로부터 물을 받아 들고 옥 안으로 직접 들어갔다.
“마셔.”
그리고 멍한 그녀의 입에 억지로 물을 들이부었다. 그녀는 캑캑거리며 물을 다 마셨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는 걸 확인한 슌카린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렇게 황태자가 싫었나.”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 주마등의 잔상이 너무 컸고, 저들이 오해하고 있는 상황에 굳이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만 슌카린은 그녀의 말에 짜증이 났다. 그가 듣고 싶은 말은 그딴 것이 아니었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슌카린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그 이유를 듣고 싶은 거지.”
“…….”
“네게 실망했어. 넌 정말 유능한 조직원이었는데.”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에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들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근신 처리하겠어. 일단 대장에게 보고하지.”
그녀는 이때까지 활동하면서 대장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대장의 얼굴을 보는 것이 좋은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네 처분은 그때까지는 보류다.”
그사이, 슌카린은 자기 할 말만 하고 감옥 밖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 한 후,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간부 전용이기에 그녀는 그저 옥 안에 던져졌을 뿐, 아무런 제재도 가해지지 않았다.
‘왜 하필 이 꿈을.’
주마등처럼 나타난 꿈은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생겼기에 그녀는 예민해졌다.
‘지금은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야.’
지금은 탈출이 먼저이기에 그녀는 애써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폈지만 틈은 없었다. 경비들은 사방에 서 있었고, 모두 무장한 상태였다.
‘어떡하지?’
게다가 저들은 교대조차 틈이 없었다. 교대하는 인원이나, 임무가 끝난 인원이나 최소 3명씩 움직였다. 이런 상황이니 그녀는 딱히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태를 대비해서 구출 조를 따로 마련해 달라고 하긴 했으나 제때 빠져나올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생겼다.
‘밤까지 기다릴까?’
아직 탈출하기 위한 시간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너무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느긋해지기 위해 애쓰며 라이넨이 세운 작전에 대해 점검해 보았다.
‘어떻게 해야 들키지 않고 저들의 기밀 자료를 가지고 올 수 있을까?’
아레마이가 가지고 있는 기밀 자료는 정말 많았지만 정작 그녀가 알고 있는 아레마이의 기밀 자료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열람 등급이 S급이지만 그녀는 여러 작전에 돌려지느라 제대로 자료를 훑어볼 시간이 전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다 저들의 작전인 것 같았다. 기밀 자료를 보게 되면 루카민의 죽음에 라이넨이 일조했다는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게 증명되는 거니까.
“쓰레기들.”
감옥 문 앞에 있던 조직원이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바닥을 바라볼 뿐, 시선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보다 슌카린이 빨리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낯익은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뭐지? 누구……?’
그녀는 불쾌한 감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드레스의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자를 써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장, 저자가 바로 에이니입니다.”
저자가 바로 대장이었다. 은발 머리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실루엣의 여자였다.
“훗.”
여자는 모자를 벗었다. 이윽고 드러난 모습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째서……?”
“오랜만이야, 카니벨라. 나 기억하지?”
불길한 꿈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예언이나 다름없었다.
“란…… 시엔?”
아레마이의 수장은 바로 란시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