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의 눈물
3권 (완결)
•62 - 92
•에필로그
62. 란시엔 (2)
어느 날, 라소니 왕국이 선전포고를 해 왔다. 그리고 그들은 곧장 수도까지 타고 진격했다. 평화에 젖어 있던 카시르 왕국의 귀족들은 이런 상황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채 적들의 칼에 쓰러져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적들은 왕궁까지 치고 올라왔다. 복구되기 시작했던 궁들이 다시 불에 타올랐다. 사방에서 왕족들을 찾으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란시엔은 개의치 않고 이카소를 향해 달려갔다.
“아바마마!”
“내 딸…….”
그는 심장이 뚫려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에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눈물방울을 닦아 주었다.
“이 아비의 소원을 들어다오. 아가야. 네가 반드시, 반드시……! 이루어다오……!”
그녀는 이것이 직감적으로 그의 유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한 자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그에게 귀를 갖다 댔다. 그리고 이윽고 그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눈을 감지도 못한 그는 팔을 떨어뜨렸다.
“아바마마!”
그녀는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차가운 궁에서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꼈던 존재.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 주던 존재. 그리고 함께 싸워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던 아버지……. 그런 그가 그녀의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안 돼!”
그녀는 흐느꼈다. 그러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며 그녀 대신 울어 주었다.
쏴아아……!
그때, 도망치던 뮤일라가 포박되어 병사들에게 끌려왔다. 뮤일라는 상황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한 듯 기사들에게 악을 써대고 있었다. 그 패악에 안겨 있는 란시엔의 동생, 라카에리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뮤일라의 패악과 내리는 빗소리가 그녀의 귀를 거칠게 찔러댔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소음이었다. 그녀는 귀를 막고 자신의 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다 여왕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이카소 루넨 카시르는 죽었군. 그럼 나머지 왕족들도 죄다 죽여라.”
그때 그녀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여왕에게 매달렸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여왕은 자신의 다리를 붙잡으며 눈물을 흘리는 아이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이의 눈에서는 처연함을 넘어서서 처절함까지 느껴졌다. 생존 의지가 대단한 아이였다.
“저들은 전부 포로로 데리고 가도록.”
그래서 충동적으로 그들을 살려 주었다. 여왕은 그들을 무너진 건물 안에 내버려두고 상황을 지휘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쏟아지는 비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란시엔……. 넌 그렇게 살고 싶어?”
그 와중에 뮤일라는 헛소리를 해댔다. 간신히 살게 되었는데, 죽고 싶은가 저 여자가! 그 헛소리를 들은 란시엔이 화가 나 그녀에게 속삭였다.
“제발 좀 닥치세요. 그 더러운 몸뚱이, 계속 굴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녀는 자신을 전혀 닮지 않은 동생을 꼭 껴안고 있는 뮤일라를 한기 어린 시선으로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라도 살아야 유언을 이룰 수 있다.
그녀는 카시르 왕국의 공주이자 아레마이의 대장이니까!
‘구걸을 하더라도 살아서…… 아바마마의 유언을 이루어야 한다.’
라소니 왕국 역시 대륙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나라였다. 그러나 이런 나라에도 무너질 정도인 카시르 왕국이 정말 약한 곳이었다. 이 광경을 보며 그녀는 진정 자신의 아버지가 하고 싶었던 일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라소니 왕국으로 나아가며, 저들에게 비웃음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녀는 반드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환하게 빛나는 카니벨라를 만났다.
* * *
그녀가 카니벨라를 처음 봤을 때는 팔자 좋다는 생각만 들었다.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후계 자리와 탄탄하게 받쳐진 세력, 그리고 여왕의 사랑까지. 카니벨라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공주님이었고, 그 자리는 그녀가 정말로 가지고 싶었지만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짜증 나.’
부러움으로 시작한 감정은 이내 질투심으로 변했다. 정말 볼 때마다 배알이 꼴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부터 네가 모셔야 할 카니벨라 공주마마다.”
거기에 절정으로 그녀는 카니벨라의 전속 시녀로 배정되었다. 왕족으로서의 모든 긍지를 버리고 이 나라에 헌신하며, 앞으로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카니벨라를 섬기라는 여왕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보였다.
“안녕, 난 카니벨라 루 라소니야! 잘 부탁해!”
“……란시엔입니다.”
“네가 왜 인사를 해? 어마마마께서 널 친구로 데리고 오신 거란 말이야!”
여왕이 저 아이에게 뭐라고 변명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저 말조차 듣기 역겨워 미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그녀는 화가 났다.
“네…… 알겠습니다.”
“반가워, 앞으로 잘 지내보자!”
카니벨라는 활짝 웃었다. 저 해맑은 웃음. 자신은 언제 지어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너무나 싫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옷차림으로 너 같은 바보 멍청이를 섬기고 있는데. 죽여 버리기 전에 그 입 찢어 버리기 전에 꺼져.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저 카니벨라에게 이끌려 정원의 꽃들과 궁 안의 여러 시설들에 대해 구경했다. 꽃을 보자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았다.
‘내가 꽃을 언제 만져 보았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런 사치스러운 일은 언제 했었더라? 그녀는 문득 슬퍼졌으나 입술을 깨물며 그 감정을 깊숙이 숨겼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내일 봐!”
그렇게 그녀에게 알 수 없는 감정만 잔뜩 안겨 준 카니벨라는 사라졌다. 그녀는 낯선 곳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서 속삭였다.
“짜증 나.”
옛날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약했던 과거가 싫고, 이미 떠나 버린 행복했던 시절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과거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카니벨라를 보면 그때가 자꾸만 생각났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도, 카니벨라에 대한 증오도 함께 샘솟았다.
“아바마마…….”
그녀는 이카소가 남긴 유언을 되새겼다. 이 대륙을 자기 대신 정복해 달라는 그 유언을 이루기 위해 행동해야 했다. 그녀는 일이 힘들다는 뮤일라에게 시끄러우니 닥치라고 일갈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당신이 왕비 쪽을 파고들어야 우리 일이 편하다고.’
꽤 시간이 흘러 일에 익숙해지기도 하건만, 뮤일라는 허구한 날 투덜거렸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뮤일라가 그녀에게는 꼼짝도 못 한다는 점과 유혹에 능하다는 점이었다. 생각에 잠긴 그녀의 뒤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십니까?”
“그래. 이걸 모든 조직원에게 전하도록.”
“알겠습니다.”
그 이후 한참 동안 걷던 그녀는 낮에 왔던 정원에 도착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난 그녀는 꽃을 꺾고 있는 힘껏 그것을 짓밟았다. 그러다가 왕국 1 기사단장 루카민에게 의심을 샀다.
‘귀찮은데.’
마침 조직원이자 부기사단장 이라스에게 루카민을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판이 깔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때가 되자 그녀는 은밀하게 조직원들을 소집했다.
“우리는 라소니 왕국을 점령한다. 제일 먼저 마이클슨을 이용해.”
“네, 맡겨 주십시오.”
귀족으로 침투한 단쿤과 키슌을 필두로 협력자들은 마이클슨에게도 후계자 증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게 받아들여져서 후계자 시험이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마이클슨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짜증 나는군. 이래서는 우리의 본 계획을 앞당겨야 하잖아?’
짜증 날 정도로 무뇌아인 마이클슨을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서는 카니벨라를 없애 버려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녀는 카니벨라의 시녀인 만큼 카니벨라의 동선에 대해서만큼은 빠삭했기에 계획을 세우는 것에 있어 막히는 것은 없었다.
“란시엔, 도와줄 일이 있을까?”
“이걸 어머니께 좀 전해 주었으면 하는데요.”
최근에 함께 카니벨라의 궁에 배정된 일라인이라는 하녀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그녀는 쪽지 한 장을 주며 눈을 흘겼다. 일라인은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외진 곳으로 가 쪽지를 열었다.
[궁 안에 침투한 모든 조직원 긴급 소집. 계획 앞당길 필요 있음. 목표는 여왕, 공주 암살. 14일 전까지 계획 실행. 조직원들 밀입국 완료시키기.]
그렇게 계획 실행을 위해 조직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회의에서 그녀가 라소니 왕국 점령에 대해 발언하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이것이 1대 대장의 유언을 이루는 방법이다. 그리고 저들 또한 자신들의 나라가 멸망하는 그런 슬픔을 겪어 봐야 한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라소니 왕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군대를 이끌고 올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그 정도의 인력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기생충처럼 붙어먹어 서서히 왕국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사람이 마이클슨이었다. 그 멍청이는 조종하기에 매우 편한 사람이었다. 실질적인 모든 것을 장악하기 위해 마이클슨만큼 제격인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카니벨라와 여왕은 그들의 목적에 있어 방해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죽여야 했다.
“이러한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일주일 후, 우리는 라소니 왕국을 점령한다.”
“네, 알겠습니다!”
“카시르 왕국을 위하여!”
사람들의 우렁찬 대답과 함께 회의는 끝이 났다. 란시엔은 중얼거렸다.
“아바마마, 이제 시작이에요.”
거사 날은 금방이었다. 예상대로 후계자 시험 최종 승자는 카니벨라였다. 그녀는 기뻐하는 카니벨라를 보며 속으로 음습하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넌 곧 끝이다.’
이라스가 때맞춰 루카민을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으니, 이곳에서 실질적으로 그들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은 셈이었다.
“란시엔, 오늘은 일찍 가도 괜찮아. 계속 어마마마와 있을 생각이거든.”
“알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조직원들이 대거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무도 쓰지 않는 버려진 궁에 아레마이 조직원들이 그녀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의 결단력 있는 눈빛을 보며 말했다.
“오늘 너희가 할 일은 훗날 있을 카시르 제국의 건국을 위한 초석이다.”
“…….”
“난 너희들을 믿어. 반드시 여왕과 공주를 죽이고 임무를 성공해서 돌아오도록!”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그들은 여왕궁으로 향했고, 그녀는 정원에 갔다. 꽃을 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빨리 왕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무릎을 꿇었다.
“마, 마마! 여왕궁이 불타고 있습니다! 저 안에 공주마마가 있어요! 부디 살려 주세요!”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눈물 연기를 했고, 그것은 통했다. 왕비는 곧장 여왕궁으로 달려갔다.
“마마, 피하십시오!”
“누가 물을 가져오너라!”
“진압은 아직 멀었느냐? 당장 저 안의 사람들을 구해 내란 말이다!”
“불이 너무 거세 수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그곳은 아수라장이었다. 사람들이 신속하게 불을 끄고 있었지만 불길은 멎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을 보며 왕비는 울부짖었다.
“이산카! 카니벨라!”
넋이 나간 왕비를 대신해 시종은 화재 현장을 지휘했다. 일사불란하게 불을 끄고, 생존자를 수색하기 위해 길을 만들었다.
‘소용없어.’
멀리서 그 현장을 바라보던 그녀는 비웃음을 지었다. 저곳에서 여왕과 공주는 오늘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하라고 명했으니, 저들은 반드시 그걸 이뤄서 돌아올 것이다.
“아직, 아직 멀었느냐!”
왕비의 울부짖음을 보며, 그녀는 기괴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이 왕국은 우리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