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란시엔 (3)
왕국이 발칵 뒤집혔다. 여왕 궁이 불타고 사람들이 죽었다. 여왕은 시체가 되어 나타났고, 공주는 궁 깊숙한 어느 곳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왕비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당장 범인을 잡아!”
왕비는 처음 화재 사실을 알린 란시엔의 증언을 토대로 조사단을 꾸렸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범인이 누구냐고 다그쳤다. 그런 왕비의 닦달에 찾게 된 범인을 보며 모두 깜짝 놀랐다.
범인이 바로 왕국의 충직한 조력 가문이면서 동시에 공신 가문이었던 사키안느 백작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가문의 후계자인 아리안은 후계자 시험 당시 카니벨라와 친분을 쌓았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컸다.
“너, 너희들이 어떻게!”
“아닙니다, 마마! 부디 믿어 주십시오!”
사키안느 가문은 왕비에게 결백을 주장했으나 명백한 증거가 가득한 상황이었다. 왕비는 그들을 절대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배신감에 재판도 열지 않고 그들을 곧장 처형대로 내보냈다.
사건 관계자들 역시 처형당했다. 조사를 통해 제1 부기사단장 이라스가 이번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져 기사단이 통째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모두 그 사건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모든 기사단원이 고개를 숙인 채 처형장에서 자신들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해가 뜨면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돈 생기네그려.”
망나니들은 오랜만에 돈 벌 일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이번 사건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자들은 흉흉한 분위기에 혹시 자신도 이상한 일에 연루되어 죽을까 하여 몸을 낮추고 다녔고, 처형장에는 늘 사람들로 붐볐다.
그녀는 멀리서 처형당하는 이라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록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으나 이라스가 입술로 중얼거리는 것은 선명히 보였다.
‘대장과 카시르 왕국을 위해서라면 전 죽을 수 있습니다!’
“…….”
그렇게 한 사람을 희생해서 만든 궁의 소란. 소중한 부하가 목숨을 걸고 만들어 준 기회. 그녀는 그 소중한 기회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하하하.”
여왕이 죽었다. 비록 공주는 아직 살아 있지만 깨어나더라도 예전과 같이 돌아가기에는 힘들 것이라는 소견이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계획에 대놓고 태클을 걸 수 있는 사람들은 사라진 셈이었다.
이제 드디어 한 걸음 나아갔다. 아직 멀었지만 걸어가다 보면 그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바마마…….’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일단 제일 먼저 라소니 왕국을 장악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단쿤과 키슌을 이용해 뮤일라를 왕위로 올리고 마이클슨을 차기 후계자로 내세워야 한다는 여론을 만들어 냈다.
귀족들은 이방인을 왕위로 세워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반발했다. 그렇지만 여왕은 죽고, 왕비는 정해진 법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는 상태고, 카니벨라는 의식 불명인 상태였다. 왕좌를 채울 수 없는 그 어떤 왕족도 없기에 선택지가 없었다.
당사자인 뮤일라는 당황했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그녀의 설득과 권력을 향한 욕망에 결국 수락했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대관식이 진행되었다.
“그대는 신의 이름을 걸고 이 라소니 왕국을 온 마음으로 수호할 것을 맹세하는가?”
“네, 맹세합니다.”
다소 어수선한 상황이었기에 약식으로 진행된 대관식은 엄청 짧은 시간 안에 끝났다. 뮤일라는 자신이 원한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뮤일라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많았고, 그들은 아스트로 백작이 필두인 찬성파와 치열하게 싸웠다. 이루어져야 하는 수많은 안건 사항들은 뒤로 계속 밀렸다.
“그만하게. 이것은 나 또한 찬성한 일이다.”
그러나 왕비의 말에 반대파는 힘을 잃었다. 왕비는 뮤일라를 왕으로 인정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싸움이 일단락되며 뮤일라 일가는 라소니 왕국 왕족으로 정식 편입되었다.
그리고 마이클슨은 후계자가 되었다. 그에 관련해서 인정하니 마니 또 싸움이 일어났으나, 왕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약에 효과가 들어 다행이야.’
뮤일라에게 왕비의 시중을 들으라고 했을 적에 그녀는 조직에서 만든 마약을 차에 타서 지속적으로 먹였다. 그 덕분에 적절한 때에 왕비는 자신의 의도로 움직이게 되었고, 라소니 왕국은 그들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아직 카니벨라가 남았다.’
카니벨라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 화마에서, 습격에서 살아남았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카니벨라를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사이, 카니벨라가 깨어났다. 다행히 범인이 누군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불안했다.
‘왜 살아난 거야? 그냥 죽어 버리지!’
이미 그 사건은 묻혀서 사라져 버렸지만 왕족인 카니벨라가 그 일에 대해 발언하기라도 하면 위험해진다. 다행히 그 전에 세력을 흩어 버렸지만 직계 왕족인 이상, 언제든지 계승권을 되찾아 마이클슨을 몰아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카니벨라를 보는 것만 해도 싫었다. 보는 눈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언니로 거두었지만 자신의 계획을 망쳐 버린 것만 해도 정말이지 용서할 수 없었다.
그 꼴도 보기 싫은 마음은 고스란히 폭력으로 표현되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툭툭 치고 다니는 정도였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잔인한 폭력으로 번졌다.
손등은 발길질이 되었고, 얇은 회초리는 순식간에 몽둥이가 되었다. 그녀는 본래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제거했을 당시 직접 자신의 손을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 카니벨라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직접 손을 쓰고 있었다.
자신의 언니(명목적으로는)의 몸에 멍이, 회초리 자국이 늘어가는 건 그녀에게 이상한 쾌감을 안겨 주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딸을 이상하게 보던 뮤일라도 곧 자신에게 태클을 거는 귀족들에 대한 스트레스를 카니벨라에게 풀었다.
그렇게 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된 카니벨라는 멍한 표정으로 항상 그들에게 물었다.
“왜……?”
“그냥요.”
“그냥……?”
항상 웃음 짓던 카니벨라는 불행에 찌들어 버렸다. 완벽하게 그녀와 같아졌다. 그녀는 카니벨라의 괴로움을 보며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많이 힘들었지. 자, 이제 괜찮아.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위로했다. 이제 여기 자신과 똑같아진 사람이 있으니 그녀는 행복했다.
‘이제 처리해 볼까?’
그렇지만 그녀는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카니벨라를 괴롭히는 게 재미있어도 존재만으로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죽이려고 했으나 갑자기 어린아이로 변했다.
마치 4~5살짜리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떼를 쓰고 울고불고하는 걸 보며 그녀는 또 때를 놓쳤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나 싶으면 자꾸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카니벨라를 보며 그녀는 골머리를 앓았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카니벨라를 3년 동안 철저하게 감시했다. 혹시 모를 의심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3년 동안의 감시 끝에 카니벨라가 완전히 어린아이가 되었다고 결론지은 그녀는 손을 놓았다.
그리고 시간은 또 흘러 카니벨라가 18살이 되었다. 의무적으로라도 혼인을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녀는 뮤일라가 내민 서류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성인이라…….”
이미 결혼을 하고도 남을 나이였지만 카니벨라의 상황이 특수했던 탓에 계속 왕궁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서류에는 카니벨라에 대한 상황과 국내외 모든 미혼 남자 리스트가 적혀 있었다.
‘이곳에 계속 데리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치워 버릴 것인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치워 버린다. 그래야 카니벨라를 처리하기도 용이해진다.
“딸…… 나는 이제 자도 괜찮을까……? 늦게 자는 건 피부의 적이야.”
“그러시던지요.”
얼마나 그렇게 보고 있었을까? 시간은 늦어 뮤일라는 하품을 하다 그녀에게 양해를 구한 채 사라졌다. 그녀는 서류 뭉치를 들고 여왕궁에서 나와 그곳을 바라보았다. 이 더러운 왕국의 한 부분이 된 어머니와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본래 살던 터전을 무너뜨린 이 증오스러운 곳을 위해 일하고 있는 자신.
‘짜증 나.’
그렇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괜찮았다. 방을 밝힌 그녀는 보던 서류를 마저 보기 시작했다.
‘조건에 맞는 사람이 너무 없는데.’
고위 귀족 혹은 왕자, 그러면서도 세력은 별로 없는 무능하고 한적한 자는 의외로 찾기가 힘들었다.
‘후…….’
그래도 계속 보다 보니 서류의 두께는 얇아졌다. 날이 밝아오는 것도 모른 채 서류를 보던 그녀는 어떤 한 사람에 대한 인적사항을 발견하였다.
“잠깐.”
그러고는 갑자기 서류를 내려놓더니 책장에 꽂혀 있던 다른 서류를 펼쳐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레미우스…… 레미우스…… 찾았다!”
한 나라를 염탐한 일종의 보고서였다. 그 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아주 꼼꼼하게 적혀 있었고, 그걸 정독하며 그녀는 쾌재 했다.
드디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찾았다. 그래도 좀 더 정확한 조사를 위해 그녀는 단쿤에게 정보를 수집할 것을 부탁했다.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단쿤이 내민 서류를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하하하!”
완벽한 사람을 찾았다. 이제 카니벨라를 이곳에 보내는 척 죽여 버리기만 하면 되었다.
* * *
그러나 그녀는 결과적으로 카니벨라를 죽이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카니벨라가 사라진 탓이었다. 그녀는 골치가 아팠다.
“정말이지 끝까지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구나.”
안 그래도 카니벨라의 신묘한 움직임에 의심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납치되어서 사라졌다?
모든 정황이 카니벨라가 죽었다고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말을 애초에 믿지 않았다. 석연치 않은 점도 많았고, 루카민의 존재가 밝혀지면서 그녀의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걸 제쳐 놓고 카니벨라만 찾기에는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일이 정말이지 너무 많았다.
“서류의 산이로군.”
본래 뮤일라가 결재해야 할 서류를 그녀와 왕비가 반씩 나눠서 맡고 있었다. 원래부터 뮤일라의 개입을 바라지 않았기에 딱히 불평하지는 않았지만 라소니 왕국 서류만 해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에 아레마이 관련 서류까지 살펴야 했다.
아레마이 연간 보고 서류의 양이 상상을 초월하기에 조직 사업(마약, 노예, 외식업, 금융 사업 등)뿐만 아니라 무기 밀매, 규모 확장 사업, 조직원 선발 등 모든 것이 그녀의 손을 거쳐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매일매일 서류에 파묻혀 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왕비를 죽이지 말걸 그랬나?’
어차피 그때가 되면 똑같은 선택을 하겠지만 그녀는 내심 푸념을 해 보았다. 왕비가 죽으면서 그녀가 결재해야 할 서류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게다가 레미우스 왕국과 시스티아 왕국 점령을 위해 조직원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편지와 서류가 날아왔다. 간부들이 맡은 일에 대한 보고서들만 살펴보는 것에도 시간이 걸렸다. 홀로 모든 걸 감당할 수 없어 조직원 몇 명을 빼 왔는데도 일이 많았다.
“좀 쉬었다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와중에 카니벨라를 찾기 위해 추격대를 꾸릴 여유가 없었다. 이런 일은 성격상 그녀가 직접 지휘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다가는 서류에 깔려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고 싶은 것이지, 과로사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늘 생각하는 건데 넌 눈물 나게 운이 좋구나.”
카니벨라가 들었다면 정말이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말이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죽이려고 할 때마다 이상하게 상황을 모면해 가는 게 운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카니벨라를 추적하는 일은 조직의 비원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으로 미뤄졌다. 탄력을 받고 있는 일을 중간에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카니벨라를 이대로 방치할 수도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카니벨라. 과연 네가 내 앞에 어떤 몰골로 나타날지 정말 기대가 돼.’
그녀는 음흉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