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믿어지지 않는 재회
그렇게 열심히 서류의 산에 파묻혀 있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란시엔은 루미니르 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간부들을 만나 회포도 풀고, 제국의 상황도 알기로 했다.
‘진행이 얼마나 된 건지 궁금하군.’
사실 억지로 얻어 낸 기회나 다름없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란시엔은 라소니 왕국의 실세였다. 그녀가 말하면 꺾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제 뮤일라는 그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옥새도 그녀에게 있으니 뮤일라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없었다. 물론 본래도 그러하긴 했지만 이제는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마이클슨은 그런 뮤일라를 보며 자신에게 왕위를 넘겨달라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쳤지만 그녀는 무시했다. 애당초 마이클슨을 후계자로 세운 것은 자신이 편하게 활동하기 위한 방패막이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주무르고 있는 라소니 왕국의 국정을 마이클슨에게 넘겨줄 생각 따위는 단 1%도 없었다. 저 바보에게 왕위를 넘길 수는 없다.
‘일단 생각을 비우고…….’
명목은 일단 관광이었으니 루미니르 제국에서 발급하는 임시 신분증을 받는 것에는 큰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런 제국의 제도에 감탄했다.
‘이런 제도는 괜찮겠군.’
그녀는 이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여행자 신분으로 제국에 들어왔다. 다른 왕국들과 뭔가 공기가 느껴짐과 동시에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이제 곧 이 제국이 그녀의 것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아바마마, 이제 곧입니다. 그곳에서 제가 대륙 정복의 꿈을 이루어내는 것을 지켜봐 주십시오.’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마차를 타 굳어진 몸을 주물거렸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왔다. 카시르 왕국, 라소니 왕국과는 차원이 다른 문화 수준을 가진 제국을 보니 탐욕이 들끓었다.
이것은 우리의 것이다. 아레마이의 것이고, 나 란시엔 루넨 카시르의 것이다!
그렇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안내에 따라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옷가게에 갔다. 그녀가 위장을 위해 동행한 왕국의 귀족은 자신이 준비한 것이 왕족을 만족시켜 기분이 좋았다.
“마마의 마음에 흡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리고 저딴 개소리를 시전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이딴 소리를 하는 저놈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다.
‘이딴 코스를 준비해 오다니, 이놈은 내가 이딴 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무리 그녀가 카시르 왕국 출신에 후계 신분을 스스로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일반적인 라소니 왕국의 영애들과 비슷했다. 이런 것보다는 정치 외교가 훨씬 재미있었다. 제국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남자 귀족을 동행시켰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
‘나에 대해 좀 더 잘 아는 놈을 데리고 왔어야 하는데.’
차라리 단쿤과 같이 오는 것이 나을 뻔했다. 단쿤은 오랫동안 그녀를 봐 왔기에 그녀에 대해 잘 안다.
밥과 차는 배를 채우고, 입가심을 위해서 나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렇다 쳐도 옷은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한때 똑같은 옷만 입었더니 옆에서 하도 들볶아 매년 옷을 만들었었다. 그래서 이미 많기도 하거니와 여기까지 와서 이러니 귀찮았다.
그럴 시간에 이곳의 백성들의 생활 수준과 강점, 약점, 역사, 특산물 등에 대해 파고드는 것이 나았다.
그래야 정복에 좀 더 수월하니까.
아직 이곳에서의 활동은 소득이 거의 없는 편이다.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크긴 하지만…….
‘슌카린에게서 아직 소식이 없다.’
다른 왕국들과 달리 루미니르 제국은 간자를 침입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공작을 벌일 때는 루미니르 제국 출신 조직원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밀정은 쉽지 않았다. 마치 철벽처럼 심어도, 심어도 계속 잡혔다. 그러했기에 아레마이는 계속적으로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이번에 정말 어렵게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70명 이후에는 다시 경계가 강화되어 더 이상 침입시키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있는 그들만으로 뭐든지 해결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들을 믿었다. 그들은 최고의 조직원들이고, 해야 할 것은 반드시 해내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인 척 안내에 따라 하루를 보냈다.
‘괜찮군.’
다행히 이 이후로는 그녀가 나름 원하는 일정이었다. 그녀는 조각품, 그림, 노래, 춤 등을 보며 이곳의 예술 수준에 대해 알 수 있었고 건물들을 보며 건축 양식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루미니르 제국에 대한 겉핥기 정도라도 이 정도라면 꽤 큰 수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주위를 볼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엉겨 붙었다.
“저 영애 얼굴 좀 봐. 정말 아름다워.”
“이 세상에 나타난 천사의 실체가 아닐까?”
“도대체 무슨 화장품을 바르기에…… 물어보면 가르쳐 줄까?”
“저분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죠? 너무 아름다워서 질투도 할 수 없네요.”
“아…… 첫눈에 반해 버렸어! 가서 말을 걸면 받아 줄까? 제발 대답해 봐!”
그녀를 두고 사람들이 외모를 극찬했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아니면 남자든 여자든 모두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될까 싶어 망사가 달린 모자를 쓰고 왔지만 그녀의 미모는 감춘다고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귀찮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빨리 숙소에 들어가는 것이 나았다.
“마마, 들어가고 싶으십니까?”
“그러도록 하지.”
다행히 이 귀족이 이런 눈치는 빨라 다행이었다. 그녀는 배정된 숙소로 향했다. 호텔은 고급스러워서 편히 쉴 수 있었고, 또한 방음이 잘되어 있어 비밀 이야기를 하기에는 딱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문하신 밀크티 나왔습니다.”
호텔 직원이 트롤리를 밀고 와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밀크티를 놓았다. 그녀와 직원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곧장 일어나 문을 잠그고는 직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웬일이지, 슌카린? 정기 보고일이 아닐 텐데?”
“간부 처벌권에 대한 보고 때문입니다.”
“간부 처벌?”
아레마이는 기본적으로 충성이 기반으로 되어 움직이는 조직이었다. 각자의 사연으로 인해 이곳에 오더라도 적절한 보상과 동기를 부여해 저절로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샘솟게 만들었다. 그러했기에 배신자가 적었고, 그것은 높은 등급일수록 더 했다.
“최근에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적을 죽이려던 간부가 있습니다.”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너희들 정신이 단체로 빠졌나? 그런 자를 뽑은 것도 모자라 간부랍시고 집어넣은 거야?”
그녀는 불같이 화를 냈다.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흠집이 났다는 것이 미치도록 짜증이 났다. 도대체 그 조직원은 누구이기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누구야, 그놈?”
“에이니라는 조직원이고 전 황태자비 출신입니다.”
“뭐?”
“라이넨 황태자 납치를 막고 자신이 직접 죽이려고 한 혐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여자에 대한 서류 내놔.”
슌카린은 곧장 란시엔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녀는 그 서류를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 조금 달라진 얼굴이었지만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조직원은 바로 카니벨라였다.
“하, 하하하하하하!”
“대, 대장?”
그녀의 광기 어린 웃음을 본 적이 있으니 놀랍지는 않았지만 최근에 이렇게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슌카린은 더욱 무서웠다. 그녀는 부하들을 치하해 주고, 효율적으로 조직을 운영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일 때는 온몸이 벌벌 떨렸다.
“이년 어디 있어?”
“지금 이곳 지부에 있는 간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만…….”
“지금 바로 출발하겠다.”
푸흐흡, 그녀는 기괴하게 웃었다. 온몸이 즐거움으로 들썩거렸다. 드디어 오랫동안 앓던 이가 빠질 때였다.
“크크큭.”
그렇게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재빨리 밖으로 나가 마차를 탔다. 슌카린은 그녀를 에스코트하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정말 기쁘기 그지없었다. 언제 찾을 수 있을까 늘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일그러질 카니벨라의 표정이 너무나도 기대되었다.
“당장 안내하도록.”
그녀는 지부에 도착했다. 모두가 그녀의 등장에 놀라 고개를 숙였다.
“모두 고개를 들고 할 일을 하도록. 그리고 간부들은 회의실에 모두 대기해 있도록.”
“네!”
일반 조직원들은 곧장 자신들의 업무로 복귀하였다. 한편, 슌카린은 다른 임무를 위해 자리를 비운 자들도 모두 다 불러들였다.
“슌카린, 그건 칸나에게 맡기고 넌 이리 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하 감옥에 발을 들였다. 카니벨라가 그곳에 있었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대장, 저자가 바로 에이니입니다.”
옆에서 슌카린이 설명해 주었으나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반가움에 모자를 벗었다. 자신의 모습을 보자 눈이 커지며 경악하는 카니벨라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어째서……?”
자신을 보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난 네가 반가운데 넌 어찌 내가 반갑지 않은 것 같아.
“오랜만이야, 카니벨라. 나 기억하지?”
“란…… 시엔?”
그녀는 모자를 슌카린에게 맡기고는 카니벨라가 있는 감옥의 문을 열었다.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카니벨라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 카니벨라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왜 이제야 내 앞에 왔어? 진즉에 왔으면 좋았잖아. 그럼 이런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났을 텐데.”
“…….”
충격으로 몸이 굳어 버린 카니벨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문득 재미가 없어져 카니벨라를 떼어 놓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표정은 매우 멍했다.
“나 혼자 이야기하게 만들 거야?”
“…….”
혼자서 말하는 것은 재미없다. 그녀는 곧장 흥미를 잃고 카니벨라를 밀었다. 힘없이 바닥에 엎어진 카니벨라는 그저 바닥에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네게 묻고 싶은 게 많아.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내게서 떨어지면 안 돼? 알겠지?”
그녀는 카니벨라의 귓가에 다시 한번 더 속삭여 주었다. 그리고 일어나며 슌카린을 불렀다.
“슌카린.”
“예, 대장.”
그녀의 표정은 차가워졌고, 말투는 가라앉았다. 아까의 그 나긋나긋한 말투와는 차원이 달랐다. 슌카린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무릎을 꿇었다.
“간부들은 지금쯤 안에 다 모였겠지?”
“그럼 그곳으로 간다.”
그녀는 카니벨라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을 딱 쳐서 조직원들을 불렀다. 그들은 재빨리 달려와 그녀에게 부복했다.
“저자를 고문실로 보내.”
“예?”
“이유는 회의 이후에 알려 주도록 하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거들떠도 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슌카린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따랐고, 조직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라는 대로 따르도록.”
“예!”
다소 머뭇거리던 그들은 슌카린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둘이서 한 팔씩 잡고 고문실로 이동했다.
‘에이니, 네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아서 나오기는 힘들 거야.’
“슌카린, 어디에 있지?”
그러나 깊게 뭔가를 생각할 틈은 없었다. 슌카린은 재빨리 란시엔을 회의장으로 안내했다. 오지 못한 간부 둘을 제외한 모든 간부들이 그녀의 등장에 일어섰다.
“앉도록.”
모두 착석했다. 그녀는 슌카린은 옆에 세워 두었다. 슌카린은 익숙하다는 듯, 회의 내용을 기록하기 위해 수첩과 펜을 가지고 왔다. 그녀는 간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불렀다.
“슌카린, 칸나, 수이카 멜, 시카온 레칸트, 레신카.”
“네.”
“내가 이때까지 부하 보는 눈이 없었다.”
그녀의 싸늘한 말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이 진정할 틈도 주지 않은 채 폭탄을 던졌다.
“에이니라는 조직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