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그날의 진실
“에이니라는 조직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느냐?”
모두가 란시엔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니가 누구냐니? 루미니르 제국의 전 황태자비 아니었나?
“에이니라는 그 조직원은 카니벨라 공주다.”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대장!”
모두의 눈이 커졌다. 심지어 회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던 슌카린은 너무 놀라 펜을 부러뜨렸다. 그렇다면 애초에 라이넨 황태자와 결혼했던 황태자비가 카니벨라 공주였던 것인가? 그럼 루시아는 위장 신분?
그럼 우리는 적에게 모든 계획을 노출시켰다는 것인가……?
모두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모두의 놀람에도 불구하고 할 말을 계속 이어 갔다.
“그 여자는 아레마이 안의 적들과 내통하는 스파이였다. 그런데 그 사실을 너희들 중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란시엔은 오랫동안 카니벨라를 봤기 때문에 그녀를 잘 안다. 자신이 아는 카니벨라는 절대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임했을 리가 없다.
“더 할 말 있나?”
말은 덤덤하게 했지만 그녀는 지금 이때까지 느껴 본 적 없는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아레마이는 그녀의 아버지가 남겨 주신 소중한 유산이었다. 그런데 그런 조직을 감히 카니벨라 같은 미꾸라지가 들어와서 망치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분노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싸늘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눈앞에 있는 적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그자를 조직 깊숙한 곳에 들어오도록 허락하다니. 네놈들이 지금 제정신인 것이냐?”
완벽주의 성향이 있었기에 그녀는 늘 작전의 완벽을 요구했다. 그렇기에 이번 사태는 더욱 충격적이었고, 그녀는 지금 당장에라도 카니벨라를 찢어 죽여 버리고 싶었다. 간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분노를 받아 내는 것뿐이었다.
“너희 스스로 너희들이 내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라.”
저들 말고도 간부로 세울 수 있는 존재는 많았다. 저들이 이번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 짓지 않으면 그녀는 가차 없이 이들을 처형대로 내보낼 것이다.
“대, 대장!”
“다 저희 잘못입니다. 죽여주십시오!”
“저희에게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일어나며 그들에게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너희들이 주도해서 카니벨라 그년이 황태자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죄다 캐내.”
“알겠습니다!”
그녀는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이번 임무를 해내지 못한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꽤 관대한 주군이었지만 이런 대형 사고까지 눈감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엄벌하여 그 싹을 잘라 내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그들을 살려 놓은 이유는 이때까지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것과 친분, 그리고 카니벨라를 심문하는 것에 있어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임무를 시작한다.”
그들은 결의를 다졌다. 적에게 조직의 핵심적인 계획을 유출하고, 일까지 맡긴 그들의 죄는 너무 크고도 컸다. 이것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면 아주 큰 후폭풍을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 * *
조직원들은 카니벨라를 고문실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녀는 자신의 곁에 가만히 서 있는 조직원들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은 심하게 뒤엉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멈춰 있던 생각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작전대로 이곳에 왔는데 알고 보니 대장이 란시엔이었다는 것까지.
‘내가 란시엔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다고?’
그녀에게 란시엔은 악마 그 자체였다. 그저 평범한 어린 시절로 끝날 수 있었던 그녀의 지난 세월은 뮤일라와 란시엔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당했다.
‘그런데 내가?’
내가, 내가 저 원수를 위해서 일했다니!
그녀의 어린 시절을 박살 내 버린 장본인, 그녀를 지옥에 빠뜨리고 자기의 어미와 함께 비웃던 짐승!
그런 자를 위해서 내 몸을 바쳤다고?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두통이 일었다. 이때까지 쌓았던 그녀의 모든 것이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전부 무너져 버렸다. 속은 울렁거렸고, 모든 것을 게워내고 싶었다.
그녀의 눈이 뿌옇게 흐려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눈에 힘을 주었다. 절대 저들 앞에서 굴복하거나 울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다짐을 할 시간도 없었다. 곧장 문이 열리며 조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일반 조직원들은 그녀의 정체를 알자마자 배신감에 휩싸인 표정이었고, 간부들은 살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중, 칸나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안녕, 카니벨라 공주. 정말 만나서 반가워. 우리를 이렇게 속일 줄이야! 정말 몰랐다니까?”
“…….”
“말 좀 해 봐. 내가 널 죽이기 전에.”
입을 열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이었지만 여기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무너져 버리면 라이넨 또한 위험해질 수 있었다.
“말하지 않겠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네 입에서 어제 먹은 음식까지 다 토해 낼 수 있게 만들어 버릴 거야.”
칸나는 고문 기구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칸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나가면서 언뜻 칸나로부터 고문을 엄청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잘못하면 죽겠는데?’
그녀는 직감했다. 그렇다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야, 지금 내 말이 말 같지도 않니?”
그녀는 어떤 순간이 있어도 입을 다물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죽게 된다면 아무것도 말해서는 안 되니까.
그런 그녀의 결의 어린 표정을 본 칸나는 피식 웃으며 부하들을 시켜 의자에 다시 묶여 있던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녀를 질질 끌고 가 양손을 천장에 묶어 매달았다. 칸나가 손을 까딱거렸다.
“너. 지금부터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심문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조직원은 기쁘다는 표정으로 채찍을 들어 올렸다. 그자는 죽여 버리고 싶어 미쳐 버리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자가 바로 그녀가 위장을 위해 독살하고 우물에 버렸던 자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직원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고통이 오더라도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렇게 그녀에게 가장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각오했던 것과 달리 더 큰 통증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이건 어렸을 때 당했던 폭력과는 궤를 달리했다. 정말 영혼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정말 오랜만에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칸나는 그녀의 입을 떼게 만들기 위해 정말 오만 짓을 다 했다.
채찍은 정말 시작에 불과했다. 익사 직전까지 그녀의 머리를 물 안에 욱여넣기도 하고,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였다. 불에 지지기도 했고, 잠을 자지 못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고문에 그녀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크윽……!”
반항할 정신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녀를 몰아붙이는 그들은 정말이지 악마와 다름이 없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점점 흐려지는 시간 감각에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뷰이트의 부하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그녀와 반대로 슌카린은 시간이 지나도 입을 열지 않는 그녀를 보며 초조해졌다. 벌써 일주일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란시엔의 신임을 잃어버린 그는 진행되지 않는 상황에 화가 났다.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
슌카린은 그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으르렁거렸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은 흐렸지만 한마디는 할 수 있었다.
“절대로…… 너희가 원하는 대로 하지는…… 않을 거야.”
그건 라이넨을 지키겠다는 것과 동시에 절대 저들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시위나 다름없었다. 일종의 도발이었다.
그녀의 말에 슌카린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마약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만들기가 어려워 매우 귀한 것인 데다가 함부로 먹였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서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상황 탓에 결국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바로 화재 사건을 입에 담은 것이다.
“제 어미처럼 독하기는!”
그녀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그녀에게 있어 어머니의 죽음은 역린이나 다름없었다. 옆에서 칸나가 뭐 하는 짓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아주 중요한 기밀 사항 중 하나인데 그걸 얘기하면 어떻게 하냔 말이다!
“왜 네 어미 년처럼 뒈질 때 곱게 뒈지지 않는 거야? 꼭 반항하고 말이야, 모녀가 아주 똑같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 야.”
“무슨 소리긴. 우리가 네 어미를 죽였다는 뜻이지.”
실제 그 작전을 펼쳤을 때 슌카린은 어린아이에 불과해서 아무것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녀를 도발하기 위해 그는 비아냥거렸다.
“몰랐어?”
“……!”
그녀는 그 말에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가 그런 시련을 당했던 이유는 그저 아레마이 정복 사업의 일환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그녀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시궁창에 떨어진 것이었다.
“뭐라고?”
그 아픈 가운데서도 그녀에게서 어마어마한 살기가 뻗었다. 그런 그녀의 기세를 본 슌카린은 기분 나쁘다는 듯 비웃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놓았고, 그 충격에 그녀는 작게 피를 토했다.
“됐어. 이제 곧 황태자가 도착하니까 그놈한테 말하라 하자고.”
그들이 란시엔과 함께 라소니 왕국으로 귀환할 때 즈음, 아마 황태자를 태운 마차도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럼 이년 죽여?”
“아직은 아니다. 대장께서 지금 관광 명목으로 잠깐 어디 가셨다. 돌아오면 하지.”
“그러지 뭐. 기밀을 많이 알아서 안 죽이기도 찝찝했어.”
칸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힘을 많이 썼는데 상대에게서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는 것에 그녀의 이력(?)에 스크래치가 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슌카린이 기밀을 퍼뜨리는 실수를 저질렀으니 이제는 그냥 죽이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대장은 언제 돌아오시는데?”
“모른다. 아마 내일은 되어야 할걸?”
칸나는 이때까지 쥐고 있던 고문 도구를 놓고는 슌카린에게 물었다. 슌카린은 란시엔의 일정표를 쓱 보며 말했다. 일정표에는 미정이라는 글자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슌카린은 표정을 찌푸렸다. 란시엔은 이제 그들에게 자신의 일정을 굳이 공유해 주지 않았다. 이미 신뢰가 깨져 버렸다는 이유였다.
“너 때문에!”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났기에 슌카린은 카니벨라를 찼다. 다른 조직원들에 의해 의자에 묶여지고 있던 그녀는 그 발길질에 땅에 그대로 처박혔다.
“……!”
그렇지만 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슌카린은 그 모습에 그나마 진정을 했고, 칸나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대장이 내일쯤 오신다……. 어이, 너 지키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칸나는 옆에 있던 경비에게 지시하고는 슌카린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 도구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버티다가 혼자가 되자 허물어졌다. 눈이 가물가물했지만 억지로 버텼다. 란시엔이 올 때까지 이곳에 있으면 끝장이었다. 십중팔구 죽게 될 것이었다. 그럼 다시는 라이넨과 라이지를 만나지 못한다.
‘내가 어떻게 라이넨을 다시 만났는데,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그녀는 어떻게 보면 탈출의 귀재였다. 이때까지 수많은 곳에서 탈출해 봤고, 대부분 성공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해 보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