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목숨을 건 탈출
이곳에서 더 이상 볼 일은 없었다. 이미 마리네 가족은 황실에 도착한 뒤였다. 라이넨이 준 공문과 서신 때문에 그들은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라이넨의 직속 조직 에리칼의 단장인 뷰이트가 파견한 부하 둘은 무료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아 심심하다.”
그중 여자 요원은 언제 카니벨라가 오나 오매불망하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령이 있기에 함부로 이곳에서 철수할 수 없었다.
“심심하지 않으십니까?”
“딱히.”
몸을 배배 꼬는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느긋해지기 위해 애써 책을 읽고 있었다. 그들은 라이넨으로부터 직접 카니벨라와 합류하여 후발대로 황실에 귀환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 때문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는 처지였다.
“흠, 스스로 탈출할 수 있다고 말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그럴 수도.”
다소 느긋한 여자와 달리 남자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카니벨라가 탈출하겠다고 한 시점에서 일주일이나 지난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나?’
남자는 카니벨라의 실력을 대충 알았다. 아무 기척도 없이 나타나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잔상에 남아 있었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렇지만 아예 걱정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레마이가 어떠한 곳인지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지만 언제나 현실은 가상을 뛰어넘는다.
‘저들에게 죽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큰일 날 일이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무참히 책을 구겼다. 남자는 자신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젠장.’
남자는 또다시 그런 일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남자의 모습에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화내시는데 같이 있어 봐야 좋은 꼴 못 보지.’
그렇지만 자신의 부하가 자리를 피하든 말든,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남자는 초조함에 입술을 짓씹었다. 이제 궁에 귀환하기 위해 출발해야 하는 한계치에 도달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나타났었어야 했다.
그러나 아직도 그녀는 행방이 묘연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그들이 직접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아레마이 단원이라고 했었지?”
“네, 단장님께서 직접 해 주셨던 말씀입니다.”
“그래, 그럼 우리가 직접 가도록 하지.”
“네? 그쪽으로 가자고요?”
부하는 깜짝 놀랐다. 그런 부하의 반응에 남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다소 보이며 짧게 말했다.
“그럼 계속 이렇게 기다린다고 해서 득 되는 게 있나?”
“…….”
부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런 부하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그는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부하는 그 말에 다소 귀찮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였다.
‘까라고 했으면 까야지.’
그리고 눈앞에 있는 남자의 말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다.
“네, 그럼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 * *
일단 카니벨라는 허물어지려는 정신부터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여기서 잘못 눈을 감았다가는 란시엔에게 죽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과다 출혈로 죽거나.
‘정신 차려야 해.’
다행히 처음에 갇혀 있을 때와는 달리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처리해야 할 사람이 비교적 적었다.
게다가 그들은 고문이 끝났다고 의자에 그녀를 묶어 놓았다. 아까처럼 매달아 놓으면 탈출은커녕 묶인 것을 풀기도 어려웠을 텐데 다행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훈련 때 배운 대로 밧줄을 몰래 풀어냈다.
“으…….”
그렇지만 훈련 때와 달리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빨리하려니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통증을 정신력으로 버텼다.
아직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절대로!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들어온 조직원을 덮쳐 기절시켰다. 그녀는 그 조직원이 여자라는 점을 이용해서 잠시라도 착각하게끔 의자에 묶어 놓았다. 그리고 그 여자의 옷으로 갈아입고, 열쇠로 옥을 잠근 채 품에 넣었다.
‘이러면 열기까지 조금은 시간이 지체되겠지?’
그렇게 모든 조치를 취한 그녀는 작전대로 기밀 정보실을 털기로 했다. 지금 상태로는 탈출도 어렵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어떻게든 라이넨에게 도움이 되고 아레마이를 엿 먹이고 싶었다.
‘가자.’
그녀는 간수 조직원의 옷을 빼앗아 입고는 평범한 조직원인 척 건물 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사람도 거의 없었을뿐더러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하로 내려갔다.
온갖 곳에 중구난방으로 자료들이 퍼져 있었다. 아레마이에는 똑같은 내용의 서류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란시엔에게 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복사해서 간부들이 있는 지부에 가져다 놓는 식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항상 간부들이 있는 지부에는 항상 모든 자료가 집결되었다. 그래서 그들이 거처를 옮길 때마다 자료도 같이 옮겨졌기에 시기가 맞지 않거나 여기저기 흩어져 방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젠장! 어디에 있는 거야?’
그랬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당장 자료를 찾아서 탈출해야 하는데 여기 앉아서 뒤적거리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게다가 점점 더 통증이 심해졌다. 이미 등과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그냥 대충 아무거나 가지고 가자!’
그래서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 중 가장 얇은 서류를 짚었다. 내용도 보지 않았다. 어차피 아레마이가 벌이는 일은 무엇이든지 중요하고 제국에게 위험이 되는 일이기에 어느 것이든지 도움이 될 터였다.
그녀는 그 자료를 재빨리 품에 넣었다. 혹시나 땀과 피에 젖어 글씨가 보이지 않을까 이중으로 감쌌다. 이제는 진짜로 탈출할 때였다.
그녀는 지금부터 시간 싸움이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그녀가 합류 중간 지점에 도착할 때까지는 저들이 그녀의 탈출 사실을 알아서는 아니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문에 귀를 붙였다. 다행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유의하며 복도로 나왔다. 밤이었기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뒷문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뭐지?’
이상했다. 너무나도 쉬웠다. 마치 그녀가 이렇게 탈출하게끔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함정은 아니겠지……?”
불안했으나 지금은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잡혀 온 후 이미 일주일이 지난 상태였다. 어떻게든 빨리 그들에게 돌아가서 합류해야 했다.
‘라이넨의 명이 있으니까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을 거야.’
에리칼은 라이넨의 명에 죽고 사는 조직이라고 했다. 그랬으니 절대 그녀가 오기 전까지 수도로 귀환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그들이 과연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까……?
아레마이의 지부들은 뒷골목 중에서도 외진 곳에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숲 한가운데였기에 그녀는 어떻게든 중간 지점이라도 가야 했다. 그렇게 해야 저들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녀는 뒷문 바로 옆에 마구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훨씬 더 빠를 뿐 아니라 지금 이 몸 상태로 걷거나 뛰는 것은 자살 행위니까.
“이랴!”
그녀는 어둠 때문에 움직이기 용이한 흑마를 골랐다. 다행히 말은 명마였기에 빠르지만 부드럽게 달렸다. 중간 지점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뛰어난 시력은 지금 아레마이 단원들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잡아냈다.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역시나 함정이었던 것이다!
“크윽!”
그녀는 더 빨리 말을 몰았다. 뒤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최대한 몸을 숙였다. 상처 입은 부위들이 아팠지만 지금 저것들을 맞았다가는 죽는다.
“저 여자를 잡아라!”
“여의치 않을 시 사살해라!”
“잡는 자는 높은 등급으로 올라갈 수 있다!”
“우오아아!”
높은 등급이라는 말에 하급 조직원들의 눈이 뒤집혔다. 그래서 그녀를 잡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이용했다. 단검, 그물, 갈고리, 밧줄 등을 던졌다. 심지어 불화살을 쏘거나 독을 푸는 경우도 있었다.
‘젠장!’
그들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졌다. 숲을 거쳐서 가야 하는 그녀로서는 뒤에서 날아오는 불화살 때문에 연기가 나서 숨이 점점 막히기 시작했다. 게다가 자신의 행적까지 노출되니 매우 성가셨다.
‘이제는 그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줘야 할 텐데…….’
버티기가 너무 힘들었다. 눈은 의지와 상관없이 점점 감기고 있었고, 고삐를 잡는 손도 자꾸만 풀리고 있었다. 이러다 그들과 합류하기도 전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마치 그녀가 이곳을 지나가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합류하기로 한 에리칼의 단원들이 나타났다.
“자, 이 손을!”
남자는 그녀의 가까이 말을 몰고 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 남자의 손을 잡았다. 남자는 힘으로 그녀를 자신의 뒤에 태웠다.
“꽉 잡아!”
남자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그녀는 힘겹게 남자에게 기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버티는 것이 이제는 너무 힘들었다. 눈꺼풀도 무거웠고, 몸도 너무 무거웠다. 그리고 손도 미끄러웠다.
‘젠장.’
한편, 남자는 자신의 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허물어짐에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 놨기에 이 모양이 된 거야?
남자는 자꾸만 빠지려는 그녀의 양손을 자신의 왼쪽 손으로 잡았다. 옷 뒤가 피로 젖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초조함에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더 가야 해?”
“도착 지점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마침 부하의 말이 들려왔다. 남자는 말을 더 빨리 달렸다. 뒤에 있는 그녀가 힘없이 흔들렸지만 지금으로서는 차라리 빨리 가는 것이 나았다.
언제 뒤에서 날아오는 저 애먼 것들에 맞을지도 몰랐고, 지금과 같은 심각한 부상 상태에서는 빨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안에 있는 종이들 찢을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부하는 품에 넣어 놓았던 종이들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는 고삐를 쥐며 달렸다. 뒤에서 날아오는 불화살들 덕분에(?) 시야는 넓어서 공터에 그려 놓았던 동그라미는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럼 찢어!”
남자의 말과 함께 부하는 말 위에서 뛰어내리며 종이들을 찢었다. 남자는 뒤에 함께 타고 있던 그녀를 껴안고는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둘은 정확하게 원 위에 안착했고, 그 즉시 원 위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부하는 남자의 손을 꽉 잡았다. 남자는 그녀를 더 꽉 안았다. 그리고 그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뭐야, 어디 갔어?”
“찾아, 수색하란 말이다!”
그리고 갑자기 쫓던 적들이 타고 있던 말만 남겨 놓고 사라져 버린 황당한 상황에 조직원들은 수색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없었다.
이미 황실로 이동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