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꿈
카니벨라와 에리칼의 단원들은 황궁에 거주하는 의료인들의 숙소 문 앞에 나타났다. 옳은 곳에 온 셈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재빨리 문을 두드렸다. 그녀의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황궁의, 황궁의 어디에 있나!”
“여기 있습니다!”
“여기 환자가 있으니 즉시 치료하도록!”
웬 피투성이의 여자를 안은 사람 두 명이 나타나자 그곳에 있던 의료진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치료 도구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재빨리 치료가 시작되었고, 그들은 방해가 된다고 쫓겨났다.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런 모습으로 나타난 걸까요?”
“그건 알 수 없다.”
남자는 그저 자신의 옷을 적시는 피를 느꼈을 뿐이기에 그녀가 정확하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저 치료에 들어갔으니 죽지 않아야 한다고 비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때, 시종이 남자를 불렀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전 여기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부탁하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종을 따라 사라졌다. 황제의 궁은 의료진들 숙소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기에 조금 걸어야 한다는 점이 성가셨다. 시종은 남자를 황제의 침실로 안내하고는 사라졌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남자는 그런 시종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한 후,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에 남자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사고뭉치 아들놈 때문에 자꾸 늙어 가니까 부른 거지.”
황제의 짜증 어린 말에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뺐다. 그러자 칠흑보다 더 검은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의 정체는 바로 라이넨이었다.
그는 마차에서 내린 후 곧장 마을로 돌아와 계속 카니벨라를 기다렸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연히 그녀를 구출하게 된 것이다. 황제가 자신을 걱정하기에 투덜거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정도이시면 아직 정정하십니다.”
“에잇, 이놈아! 넌 여전히 상도덕을 몰라. 이런 서신만 던져 놓으면 내가 알아먹겠느냐?”
황제는 그가 보내온 서신을 그의 발밑에 던지며 짜증을 냈다. 그는 라이넨이 아들이지만 가끔 미치듯이 짜증이 날 때가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지금 아레마이라는 조직이 황실을 삼킬 음모를 꾸미고 있음. 그래서 사람을 보내 캐도록 지시함. 그리고 예전에 전 황태자비와 잠자리에 든 적이 있는데 그때 아이가 태어남. 그래서 아이와 키워 준 부모를 황실로 보냄. 잘 돌봐 주었으면 좋겠음.]
황제는 뜬금없이 등장한 아레마이라는 조직이 무엇이며 갑자기 여기서 죽었다고 알려진 전 황태자비가 왜 등장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전 황태자비와 자신의 아들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났다는 것도 황당했다.
일단 그들을 잘 돌봐 달라고 했으니 그 말을 따르기는 했지만 황제는 여전히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돌아온 김에 무슨 일인지 캐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흔들리는 마력 파장을 보니 꽤 급했던 것 같은데.”
“카니벨라가 큰 부상을 당하고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데려왔습니다.”
“부상?”
“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황제는 그러한 아들의 표정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 봐야죠.”
“흠……. 일단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두 설명하도록 해라.”
그는 황제에게 아레마이가 뭔지, 그들의 야망이 뭔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설명했다. 황제는 작전을 위해 적진에 침투했다가 큰 부상을 당한 카니벨라에게 연민이 생겼다.
“그 아이가 깨어나면 모든 걸 알 수 있겠구나.”
“그렇습니다.”
황제는 아들의 표정에 함께 마음이 아팠다. 지금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은 라이넬과 전 황후를 그리워할 때 짓던 표정과 똑같았으니까.
‘괜찮을 거다.’
황제는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결정되지 않았기에 쉽사리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잠시, 밖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미간을 주무르며 밖으로 나갔다. 달빛은 밝았지만 그의 마음은 한없이 어두컴컴했다. 당장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전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녀에게 가고 싶은 걸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해 주었던 시종이 나타났다. 그는 이것이 황제의 배려임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도록.”
그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아직 황궁의들이 분주하게 치료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축 늘어진 그녀를 보며 눈을 감았다.
어떻게 다시 만났는데, 왜 넌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있는 거야.
그는 울고 싶었다. 오해로 인해 헤어져야 했던 사랑하는 사람이 처참하게 돌아왔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는 겁이 덜컥 났다.
‘제발 버텨 줘.’
자신도, 라이지도 이곳에 있으니 버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이때까지 그녀의 삶이 너무 힘든 것을 생각하면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는 절망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전하!”
그렇게 치료가 끝날 때까지 그는 앞에서 서성였다. 그런 그를 본 황궁의가 놀라서 외쳤다.
“어떻게 되었지?”
입에서 나올 말이 긴장되어 그의 입술이 탔다. 황궁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만,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워낙 심한 부상이셔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가 너무 늦은 걸까? 마냥 기다리는 게 아니라 빨리 그곳에 갔었어야 했을까?
아마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녀는 반드시 말렸겠지만 만약 과거로 되돌아간다면 그는 그런 선택을 했을 것 같다.
“고맙군…….”
“아닙니다.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순식간에 며칠이 흘렀다. 마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를 찾아와 그녀가 언제 깨어나느냐 물었다. 궁에 머물며 마리는 그의 신분을 알게 되었지만 그를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마리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황태자보다는 자신의 친구가 더 중요했다.
“아저씨, 우리 이모 어디 있어요?”
게다가 라이지는 그를 볼 때마다 카니벨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아직 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그는 형과 어머니를 잃은 후 버렸던 신에게 다시 빌었다. 제발 그 사람이 깨어나게 해 달라고.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대가라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그러니 제발 더 이상 내게서 소중한 사람을 그만 빼앗아 가라고.
그때, 그런 그의 간절함에 대답하듯, 시종의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분이 깨어나셨습니다!”
* * *
카니벨라는 무의식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둘러보았지만 안개가 짙게 끼어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너무나도 편안한 마음에 기분이 좋아졌다.
‘어? 그런데……?’
그러다 문득 기시감을 느낀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자그맣고 앙증맞았다. 시야도 평소보다 낮아져 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편안한 곳이었다.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문득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스쳐 갔다.
“이런, 안 된단다.”
그때, 인자한 목소리가 들리며 흑발의 꼬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난, 평범한 사람이라면 놀랄 만한 광경이지만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꼬마를 바라보았다.
‘누구지?’
“너무 아팠던 모양이구나. 모든 걸 잊어버렸어.”
꼬마는 마치 그녀를 잘 안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꼬마가 누군지 몰랐다. 머리가 텅 비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꼬마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넌…… 누군데?”
“내 이름은 너도 잘 알 것이란다. 생각해 보련?”
“……싫어.”
“싫더라도 생각해 내야 한단다. 사람은 때로는 자기가 원치 않는 것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야.”
“꿈에서도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라고?”
“이곳이 꿈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구나.”
“…….”
어? 그러게? 여기가 꿈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갑자기 문득 깨달은 사실에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런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린 듯 안개들이 요동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지극히 편안한 곳이었던 이곳이 마치 귀신의 집 같았다. 편안했던 안개들이 달려들어 그녀를 찌르는 것 같았다.
“아…….”
그녀는 벌벌 떨었다. 무서움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꼬마는 그녀를 일으켜 주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스스로 이겨 내야 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무서워.”
“이겨 낼 수 있단다.”
“아니, 난 못…… 해.”
“할 수 있단다. 이때까지 널 도와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잖니?”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있다는 거야? 지금 난 여기 혼자 있는데? 그런 그녀의 표정에 꼬마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때, 안개가 걷히며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엄했지만 자애로웠던 여왕, 모두에게서 방치된 자신을 자식처럼 대해 주던 루카민,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었던 라이넨, 그녀를 따뜻하게 바라보던 마리, 그리고 라이지까지…….
툭.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어째서 이 사람들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꿈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들이 베풀었던 따뜻함을 잊고 이곳에 있으려고 한 것일까. 그녀는 자신의 멍청함에 자책했다.
“이제 돌아갈 마음이 생겼니?”
“그래.”
그녀는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의 키가 다시 커지고, 시야도 본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본래로 돌아왔다. 안개들이 뭉쳐 그녀의 머릿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잊어버렸던 모든 것들이 그녀의 기억이 되어 자리를 잡았다.
아픈 기억, 슬픈 기억, 행복한 기억……. 그 모든 기억들이 그녀의 모든 것을 사로잡았다. 기억들이 톡톡 터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흥분이 가라앉자 눈을 가늘게 뜨며 꼬마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나 네 이름 몰라. 어디서 거짓말을 하고 그래?”
“허허, 내 나이쯤 되면 잊어버리는 것이 많아져서 말이다.”
“웃기고 있네.”
그녀는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꼬마는 나이에 맞지 않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란다.”
“그래, 돌아가야지.”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다. 그때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기대하지.”
그녀는 꼬마가 만들어 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빛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마치 그 환한 빛이 자신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그녀는 다시 현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