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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안타까움 (69/93)

68. 안타까움

결과적으로 작전은 성공했다. 적들 안에 들어가 저들의 기밀 정보를 일부나마 빼 올 수 있었다.

‘다행이지.’

물론 그 과정에서 카니벨라 본인의 희생이 너무 컸지만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어머니를 죽인 자들이 아레마이라는 것과 베일에 싸여 있던 대장이 란시엔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자 오히려 안도했다. 란시엔이 아레마이의 대장이라는 것은 그녀가 쳐부수어야 할 적이 하나임을 의미했다.

굳이 자신의 힘을 분산시킬 필요가 없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면 된다는 것이다.

‘죽인다.’

그녀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을 죽도록 두들겨 팼던 란시엔은 원망을 넘어서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랬기에 언젠가는 보복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저 상황이 되지 않아 참고 있었던 것뿐.

그렇지만 아레마이의 수장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란시엔은 그녀가 반드시 쳐부수어야 할 적이 되었다. 그녀를 위해서 죽어 간 여왕과 루카민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반드시 란시엔을 저지해야 했다.

“루시!”

그렇지만 그녀는 상념을 이어 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들은 마리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마리, 오랜만이에요.”

그녀는 애써 평소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마리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런 마리의 반응에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붕대를 칭칭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 어쩐지 움직이기가 불편하더라.’

“루시, 괜찮아요?!”

마리는 혹시라도 만졌다가는 그녀가 아파할까 봐 안지도 못 하고 안절부절못한 채 그저 발만 동동 굴렸다. 그녀는 먼저 손을 뻗어 마리를 안았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마리, 전 괜찮아요.”

“흐흑…….”

아무렇지도 않은 그녀의 대꾸에 그게 더 서럽다는 듯, 마리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리고 소리 내어 울었다. 마리의 눈물이 순식간에 이불과 붕대를 적셨다. 그녀는 그런 마리의 격한 반응에 당황했다.

“마, 마리?”

“흑, 루시, 얼마나 아팠어요? 그 나쁜 놈들!”

“마리.”

“저 다 들었어요. 루시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일을 당했는지.”

“……마리, 어디까지 들으셨어요?”

그러자 마리는 라이넨에게 들은 모든 것을 말했다. 마리는 그녀가 라이넨에게 말했던 모든 것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자세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겁이 덜컥 났다. 혹시나 마리가 자신을 경멸하게 되면 어쩌나 싶었다.

경멸당하는 것은 익숙하지만 그것이 마리라면 정말 힘들 것 같았다. 그녀는 마리 덕분에 그 꿈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런 건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힘들었어요, 루시. 라이지를 제게 맡기면서 어떤 심정이 드셨어요? 전 그것을 상상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역시 마리는 마리였다. 착한 사람이었고, 그녀가 저질렀던 살인을 무서워하는 대신, 그녀가 어떠한 심정으로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걱정했다. 그리고 그녀의 상황에 공감해 주었다.

“마리, 정말 고마워요. 마리가 이런 사람이었기에 라이지를 맡길 수 있었어요.”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에 마리가 한참 감동하고 있던 차에 문이 벌컥 열리며 라이넨과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들어왔다. 낯익은 사람의 등장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오라……?”

“흑, 마마!”

에오라는 그녀가 황태자비였던 시절에 자신의 직속 시녀였다. 아직 자신을 잊지 않은 것도 놀라운데 눈물까지 흘리며 걱정할 줄이야. 자신은 존재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이렇게 슬퍼해 주니 미안해질 정도였다.

“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마께서 크게 다치셨다고 해서,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난 이제 황태자비가 아니야.”

“저한테는, 영원한, 마마예요.”

그녀는 침묵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친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불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어찌 되었든 다시 만나서 반가워, 에오라.”

“네, 저도요.”

에오라는 감격스러움에 울먹이며 그녀에게 현재 루미니르 제국의 상황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말에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아직 아레마이가 활동할 충분한 무대가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과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

여담으로 라이넨에게 약혼녀가 생겼다는 것도 들었지만 그녀는 그 말에 크게 신경 쓰지는 못 했다.

‘일단 아레마이를 무너뜨리는 것에 집중해야 해.’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라이넨과의 관계는 그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황제와 라이넨의 약혼녀로 추정되는 여자가 들어왔다. 다소 도도한 인상을 가진 여자로 분위기만 놓고 보았을 때는 라이넨과 잘 어울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소한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황제의 등장이었고, 그녀는 예를 갖출 의무가 있었다.

“황제 폐하,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환자에게 억지로 예를 갖추게 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도록.”

황제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예의를 갖추려 하는 그녀를 제지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함을 표했다. 참을 만하기는 했지만 몸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에 웬만하면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녀는 황제의 말에 곧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리와 라이넨이 놀라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제지했다. 스스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등에 베개를 대고는 몸을 고정시켰다.

“그렇다면…… 일단 마리, 에오라 밖에 나가 줘.”

“루시!”

“마마!”

“너희는 듣는 것만으로도 위험해질 수 있어. 난 절대 그걸 감수하고 싶지 않고.”

그녀는 절대 그들이 들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그들은 다소 서운했지만 평소에 그녀의 말이 얼마나 무게감이 있는지, 신뢰할 만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 반발하지 않고 나갔다. 그녀는 황제의 옆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카일라를 향해 말했다.

“영애께서도 들으시겠습니까?”

“저희 아버지께서는 황태자파의 수장이십니다. 제가 들어서 나쁠 건 없다고 봐요.”

“그렇다면 들으십시오.”

그녀가 배신한 것이 확정된 순간, 그들은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귀족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자가 도움을 준다면 훨씬 더 원활하게 아레마이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제가 알아 온 것을 알려 드리기에 앞서 제가 누구인지부터 밝히겠습니다.”

란시엔과의 관계는 그녀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것이니까.

“전 과거에 라소니 왕국의 공주였습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고백에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 공주?

“그렇다는 것은…….”

“제가 바로 실종 후 사망 처리된 카니벨라 공주였습니다.”

황제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라이넨을 쳐다보았다. 아들은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그제야 황제는 깨달았다. 아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황제인 자신조차 알기 힘들게 정보를 은폐시켜 버렸다는 것을.

‘이것 참, 나나 귀족들이나 전부 놀아났군.’

그렇지만 황제는 이내 표정을 수습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게 아레마이와 무슨 상관이라는 거지?”

“상관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현 아레마이의 수장은 카시르 왕국 출신의 공주거든요.”

“……!”

카시르 왕국. 대륙의 5국 중에서 가장 소국이었으며 라소니 왕국에게 멸망당한 비운의 나라였다. 그때 당시 여왕(카니벨라 엄마)이 그곳의 왕족들을 살려 줘서 대륙 안에서 엄청난 화제를 이끌었다.

그런데 그 카시르 왕국 출신의 공주라면…….

“라카에리는 멍청해서 누군가를 이끌 사람이 안 됩니다. 그럼 나머지 남은 사람은 란시엔밖에 없죠.”

“……정말 놀랄 일이군.”

“그리고 라소니 왕국에서 저와 란시엔의 사이가 안 좋다는 건 꽤 유명하고요.”

모두들 그 말에 그녀를 저렇게 만들어 버린 원흉이 란시엔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이넨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처를 치료한 황궁의들이 이렇게 잔인한 상처는 난생처음 봤다면서 학을 떨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일단 이걸 좀 보시겠습니까?”

그녀가 황제에게 내민 것은 암호로 된 서류 한 뭉치였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가지고 온 아레마이의 기밀 자료였다. 황제는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 그녀에게 다시 서류를 내밀었다.

“이것은 각 나라의 아레마이의 지부가 있는 곳을 기록한 서류입니다.”

“……!”

“아레마이는 라소니 왕국에 지부가 유독 많습니다.”

“그렇다는 건…….”

“네, 대장이 거주하는 곳에 맞추어서 지부도 만든 겁니다.”

아레마이는 대장에게 모든 것을 충성하는 조직. 이런 설정이 충분히 가능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본거지는…….

“본거지는 라소니 왕국의 궁 안입니다.”

“뭐라고?”

“그런데 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지하에 만들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왕족을 위한 비밀 통로도 많으니 거기에 통하도록 만들면 아무한테도 안 들키겠죠.”

“…….”

정확하게 왕궁의 어디인지 위치가 기록되어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일단 그것을 안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었다. 그녀는 라소니 왕국의 공주였고, 그곳에서 18년을 살았다. 그래서 왕궁의 지리에 빠삭했다.

후보가 될 만한 곳을 생각해 보자면…….

그녀는 재빨리 움직이기 위해 침대에서 한쪽 발을 뺐다. 그런 그녀의 기세에 황제는 놀라 소리쳤다.

“아니, 지금 어디로 가려 하는 것인가!”

“황태자 전하 대신 라소니 왕국에 간 그 사람을 구하러 가야죠.”

“지금 갈 수 있다는 말인가?”

그녀는 피식 웃었다. 아프긴 해도 견딜 수는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회복된 결과이겠지만 훈련 기간 동안 이것보다 더 크게 다친 적도 있었다. 그랬기에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있어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일단은 움직이지 말게. 지금 자네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그러는가?”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어찌 그런 몸으로 움직이려고 하는가!”

“네?”

진심으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보며 그들은 표정을 굳혔다. 도대체 아레마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기에 저렇게 상태가 엉망인데도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거지? 황제와 카일라는 처음으로 그녀가 안타까워졌다.

“일단 몸을 회복하는 것에 전념해요. 당신의 말대로 아버지께 말해서 귀족 세력들을 규합할게요. 그리고 그곳에 같이 갈 수 있는 사람부터 뽑아야죠.”

“아…… 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카일라의 말에 안심했다. 라이문타 가문이라면 세력이 큰 편이기에 모든 귀족들은 아니더라도 제국 귀족의 70% 정도는 포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제국을 침공할 그들의 무기가 하나 줄어드는 셈이다.

“일단 작전은 나중에 세워 보도록 하고 자네는 환자답게 잠이나 자게.”

황제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의 빠져나온 다리 한쪽을 침대에 넣어 주고 그녀의 몸을 침대에 완전히 눕혔다. 게다가 손수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황제의 호의에 당황해 몸을 바르작거렸다.

“일단 잠이나 자게.”

그리고 황제는 그녀의 얼굴 위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작은 빛 가루들이 쏟아지며 그녀를 수마로 이끌었다. 이내 새근거리며 잠든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라이넨, 너는 지금 당장 그자들의 정보를 모으도록 해라. 그리고 자네는 후작에게 말해서 세력을 빨리 규합해. 이제는 그들과의 전쟁이야.”

“네, 알겠습니다.”

둘은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루미니르 제국 황실과 아레마이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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