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그녀의 바람
카니벨라는 이번에는 꿈도 꾸지 않고 일주일 동안 내리 잤다. 너무 달콤한 잠이었기에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귓가에서 자신에게 자꾸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기에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라이지였다.
“이모, 괜찮아?”
“응, 괜찮아. 많이 걱정했어?”
“응…….”
늘 온화하고 강한 그녀의 모습만을 봐 오던 아이에게 이번 일은 그만큼 충격으로 다가왔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보며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저 아이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었다.
“이제 괜찮아.”
실제로 전보다 몸이 많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통증도 없었다. 지금 당장 나가서 검을 휘둘러도 될 것 같았다.
‘지금 당장 가도 손색이 없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지극히 모든 곳이 정상이었다. 그리고 때에 맞춰 황제와 라이넨이 들어왔다. 그들은 일어나서 간단하게 몸을 풀고 있는 그녀를 보며 입을 벌렸다.
“괜찮은가?”
“네, 아주 가볍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황제는 그녀가 잠든 사이에 걸었던 치유 마법이 잘 들어 한숨을 쉬었다. 이제부터 아레마이 소탕이라는 같은 배를 타게 된 사람인데 그런 자에게 막 대할 정도로 그는 무자비한 사람이 아니었다.
“괜찮아?”
“응.”
그러나 라이넨은 그녀가 여전히 걱정되는지 그녀의 몸을 잡고 여기저기를 살폈다. 혹시라도 덜 나은 곳이 있나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말하며 사뿐사뿐 병실을 한 바퀴 돌았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 상태가 아니었다. 하루빨리 아레마이를 대적하고 그들을 끝장내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기세에 황제는 시종을 불러 라이지를 데려가게 했다.
“그렇다면 이제 덜한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 말에 둘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잠든 사이, 황제는 아레마이를 상대하기 위한 대비책을 짜기 위해 움직였고, 라이넨은 에리칼을 통하여 아레마이의 정보를 받았고, 카일라는 귀족들을 규합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아레마이와 대적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자신이 생각한 작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라이넨 대역 구출 작전.
“걸어서 라소니 왕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략 한 달이 걸립니다. 그렇지만 저들은 마차를 이용했을 테니 길어야 10일 정도일 겁니다.”
산맥을 타고 가면 길은 험하지만 시간은 많이 단축된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차와 같은 빠른 운송 수단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들은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니 그런 눈에 띄는 것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한 달이라는 시간을 소요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꽤 촉박한 일정이었다. 그녀의 말에 모두가 침묵에 잠겨 들었다. 라이넨이 투입시킨 자가 들키기 전에 빼내 오기 위해서는 한시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그녀가 잠들면서 대략 2주가 날아간 상태. 결국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더욱 짧아진 셈이었다.
“지금 당장 출발해도 늦습니다.”
“누구를 데려갈 생각이지?”
그녀보다 라소니 왕궁의 지리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그녀는 반드시 그곳으로 가야 했다.
“혼자가 편합니다. 암살자는 본래 혼자서 움직이니까요.”
“그건 내가 허락할 수 없어.”
“라이넨?”
“그렇다. 너 혼자서는 힘들다.”
“…….”
“그자를 구출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렇지만 빠져나오는 것은 너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데리고 가는 것이 좋아.”
라이넨에 이어 황제까지 말리자 눈썹을 삐죽거린 그녀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러나 도대체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 구출 임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난이도가 높으며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뒤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렇다고 라이넨을 데리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저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성이 들어왔다. 황후의 색을 그대로 물려받은 초록색 머리칼과 황금빛 눈을 가진 청년이 된 라이부스가 그들을 보며 상큼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넨은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무슨 일이지?”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죠. 그리고 형님은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 아닙니까?”
“…….”
그는 황태자였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일부러 대역을 보낸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뒤이어 들리는 말에 그는 이마에서 힘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제가 가겠습니다.”
절대 안 되었다. 그건 허락할 수 없다. 그에게 있어 라이부스는 항상 꿍꿍이가 가득한 동생이었다.
“안 된다. 그럴 바에는 나도 같이 가겠어.”
갑작스러운 아들들의 합류에 황제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이부스야 만일을 대비한 자식이지만 라이넨은 아니다. 그는 장차 자신을 이어 마법을 계승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그런 자식을 전장에 보내라고?
“잠깐 이리 오거라.”
황제는 그를 데리고 재빨리 병실 밖으로 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방음 마법을 건 후 호통을 쳤다.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무슨 소리이십니까?”
“네가 구출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자칫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냔 말이다!”
황제의 걱정에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라이넨은 현재 마법 계승 1순위였고, 그가 죽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일단 황제는 절대로 황태자를 바꿀 생각이 없었고 굳이 그가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이 작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기에 황제는 라이부스의 합류는 허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이넨은 안 된다. 라이부스와 라이넨이 동시에 죽기라도 한다면 마법을 계승할 사람은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죽은 후에 대륙에는 마력이라는 힘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어차피 아레마이가 저희를 다 죽이면 그 순간 마법은 계승될 그릇이 사라져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전 가족이라지만 라이부스 저놈은 못 믿어요.”
“…….”
라이넨은 늘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고 다니는 라이부스가 거슬렸다. 언제나 그에게 황후와 라이부스의 존재는 어머니와 형을 밀어낸 자들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가족임에도 라이부스가 싫었다.
황제는 이러한 그의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절대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아들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아레마이가 제국을 점령하는 그날, 아마 마법의 존재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도 가지 않아도 될 방법이 있지 않느냐? 굳이 네가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따지자면 카니벨라 역시도 굳이 이 구출 작전에 투입될 필요는 없어요. 이미 제국과 왕국 양쪽의 국적을 다 버린 사람인데 따지자면 외인이죠.”
“…….”
그녀는 루시아라는 이름으로 제국 국적을 취득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라소니 왕국에서는 실종된 지 2년이 지나면 사망 처리가 된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사망 처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따지고 보면 그녀는 외인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아레마이의 최종 목표는 루미니르 제국이었다.
“아레마이가 제국을 노리는 지금, 저희는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써야 합니다.”
“……어쩔 수 없구나.”
황제는 아들을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마음을 먹었기에 황제는 말릴 수가 없었다. 그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야 했다.
“그럼 저도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저 아이가 아들들을 잘 지켜 주기만을 바랐다. 안으로 들어가자 라이부스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황제에게 물었다.
“이야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너와 라이넨이 저 아이와 함께 라소니 왕국에 가면 된다.”
‘두 명의 황족과 동행이라…….’
그녀는 상당히 귀찮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라이넨은 라이부스를 싫어했고, 라이부스는 라이넨을 좋아하기에 그녀를 싫어했다. 그녀는 벌써 피곤해졌다.
이 둘 사이에 끼여서 임무를 수행하라고?
게다가 그녀는 단순히 라이넨의 대역을 구출하는 것이 아니라 아레마이를 엿 먹이기 위한 계획을 하나 더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계획에 이 둘이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일단 가겠다고 하긴 해야겠는데……. 시끄러워지겠어.’
일단 그녀의 앞에 있는 자는 감히 하늘과도 비견되는 황제였다. 그랬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제는 그녀에게 묘한 눈빛을 보냈다. 저 두 사람이 죽지 않게끔 지켜 달라는 뜻이었다.
“그럼 일단 이틀 후에 출발하도록 하죠.”
“그때까지 회복이 가능한가?”
황제의 물음에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마치 매우 쉬운 문제를 푼 어린아이와도 같은 당당한 미소였다.
“이미 깨어난 순간부터 제 몸 상태는 최상이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자네에게 내 아들들을 맡기도록 하지.”
“맡겨만 주십시오.”
그녀의 말에 황제는 부탁한다는 말을 한 후 사라졌다. 라이부스는 황제의 뒤를 따라 병실 문 너머로 사라졌다. 오직 라이넨만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이제 너도 가서 일하지 그래.”
“카샨이 대신 지휘해 주고 있어. 그리고 정말로 회복되었는가 궁금해서.”
“지금 너랑 라이부스 황자가 동시에 덤벼도 못 이길 정도로 상태 정상으로 돌아왔으니까 이제 그만 나가 봐.”
“네가 그만큼 강해?”
“난 그곳에서 행동 대장이었어. 그 정도 수준이면 기사단장 정도는 이길 수 있어.”
물론 그건 독 가루나 암기 같은 것들도 사용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녀를 포함한 모든 조직원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기자는 주의였다. 물론 그런 것들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얼추 호각을 이룰 수는 있겠지만.
그녀는 그를 내버려둔 채 몸을 풀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황제의 궁으로 숨어들었다. 황제는 자신의 결계에 낯익은 기척이 걸리는 것을 느꼈다.
의아함에 문을 열자 그녀가 시녀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들어가도 될까요?”
“그러도록.”
황제는 예의상 그녀에게 차를 태워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마시며 눈을 빛냈다. 이건 이제 라이넨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래, 무슨 일인지 말할 수 있나?”
“아무도 듣지 못하는 건가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차를 마시며 말했다.
“황제 폐하, 거래할 것이 있습니다.”
“……무슨 거래?”
“전 이번에 아레마이를 소탕하고 난 후에 제 아이와 친구들을 데리고 떠나겠습니다.”
“……어째서냐?”
라이넨과 카니벨라는 예전에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 그리고 모든 오해가 풀린 현재, 그녀가 그를 떠날 이유가 없었다. 황제는 둘이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전 자격이 없습니다.”
아레마이는 쓰레기들이 가득한 집단이었다. 대륙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쓰레기들. 그런 곳에 있던 그녀였으니 지난 행적이 밝혀지게 된다면 수많은 비난에 직면하게 될 터였다.
그녀는 라이넨을 사랑했지만 그가 그런 비난을 맞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예전처럼 헤어지는 게 차라리 나았다.
“라이넨을 말려 주는 것은 폐하께 맡기겠습니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있었다. 너무나 함께하고 싶지만 애써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대꾸하지 않는 사이, 그녀는 떠나갔다.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어떡한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