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유혹
“루키에르 마키아르?”
그러나 카니벨라는 처음 들은 이름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혹시나 이 남자가 란시엔이 깔아 놓은 또 다른 함정이 아닐까 의심했다. 란시엔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그녀의 살기가 짙어졌다.
그렇지만 루키에르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 자신에 대해 설명하며 그녀에게 사정했다.
“전, 마마의 편입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받아 주십시오!”
“그래,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내가 널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 말이다.”
루키에르는 싸늘하고 한기가 어린 그녀의 표정에 재빨리 자신이 겪은 모든 것을 말하기 시작했다.
“전 북부에 원정을 갔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습격을 받아서 부하를 모두 잃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니 가문은 멸문을 당했습니다!”
그 뒤는 대충 예상이 갔다. 그 뒤로 란시엔에게 복수하기 위해 떠돌다가 그녀를 만난 것이다.
‘란시엔…….’
카니벨라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도대체 란시엔으로 인해 인생이 망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단 말인가.
“우리는 지금 란시엔에게 한 방 먹이러 가는 길이다.”
“그렇다면 저도 반드시 끼워 주십시오! 전 그 마녀에게 복수하고 싶습니다!”
그녀는 루키에르를 일행으로 맞이하기로 했다. 란시엔에게 가진 복수심이야 그녀 못지않게 큰 데다가 기사단장 출신이니 혹시나 라이넨과 라이부스가 위험에 빠진다면 맡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마마, 그럼 지금 저희는 라소니 왕국으로 가는 것입니까?”
“그래.”
“제가 반드시 마마께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며 초조해했다. 그녀는 그런 그의 표정에 심드렁하게 일갈했다.
“루키에르, 난 너의 실력을 믿는다. 그러니 네 실력에 확신을 가지도록.”
“네, 감사합니다!”
루키에르는 그녀의 말에 눈물까지 흘렸다. 그녀는 루키에르를 힐끔 쳐다본 후, 라이넨과 라이부스의 부상을 치료해 주었다.
“많이 안 다쳐서 다행이야.”
“너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라이넨은 그녀의 상처들을 보며 표정이 흐려졌다. 아무리 이런 상처가 익숙하다고 해도 아프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반응에 오히려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다쳤을 때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던 사람이 있던가?’
아레마이에서 이런 것은 일종의 훈장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녀는 홀로 항상 상처를 치료하고, 버텼다.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노력할게.”
“이제 출발하면 안 될까?”
그런 그들의 뒤로 라이부스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피비린내 나는 곳에 더 있고 싶지는 않았다. 코가 썩을 것 같았다.
“일단 그러죠.”
그들은 재빨리 흔적을 지우고 시체들을 묻었다. 그리고 곧장 길을 계속 걸어갔다. 그녀는 역겨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라이부스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이 사람도 살인의 무게에 눌리는 사람이군.’
언제까지 계속 이런 여정이 이어질지 그녀 또한 알 수 없었다. 아마 라소니 왕국에 도착할 때까지 그러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몸을 벌벌 떨거나 굳어 버리면 그건 저들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지금 가는 이 길에 이런 일은 앞으로도 많을 겁니다. 익숙해지는 것이 좋아요.”
이번의 실패로 인해 란시엔은 이를 갈고 있을 게 뻔했다. 행동대장을 잃었으니 더 많은 암살자를 보낼 테지. 그리고 그럴 때마다 검에, 손에 타인의 피를 묻혀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수많은 살인을 하며 무뎌져 갔다. 라이넨과 루키에르는 전쟁을 겪으며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습득했다. 오직 라이부스만이 이 비정상적인 상황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런 핏물과 친해져야 했다. 그는 그것이 지독하게 싫었다.
‘하지만 형님을 위해서라면…….’
그는 한번 강해져 보기로 했다.
* * *
라이넨 대신 라소니 왕국에 침입한 에리칼의 조직원, 알스카는 이런 상황이 너무 가시방석이었다. 아레마이의 대장이 대륙 최고의 미녀인 란시엔인 것도 충격인데 그런 그녀가 자꾸 자신을 유혹하려 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이 라이넨이 되어 있는 상태이고, 그런 라이넨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어야 자신들의 야욕이 빨리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런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진짜 너무한 일이었다.
그는 하루에 한 번 있는 란시엔과의 독대 때문에 미쳐 버리는 걸 넘어서서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는 그녀의 몸매에 관심이 없었고,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지겨웠다. 아니, 오히려 시간 낭비였다.
‘전하, 왜 저한테 이런 걸 시키셨습니까!’
아무리 라이넨의 안전 때문에 대역으로 투입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번 임무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짜증 나는 임무였다.
란시엔은 남자라면 전부 몸매로 유혹이 가능하다는 그런 상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입고 오는 드레스가 죄다 파여 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란시엔이 가지고 있는 오만에 속으로 혀를 찼다.
모든 남자가 여자의 몸만 보고 헤벌쭉하지는 않았다. 이 여자는 너무 똑똑해서 오히려 멍청한 사람이었다. 모든 세상의 기준을 자신의 경험으로 바라보고,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자만에 빠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이런 수준 낮은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 짜증 났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화를 삭였다. 화를 분출하는 것은 훗날 해도 충분했다.
“왜 아무런 말씀을 안 하시는 건가요?”
알스카는 란시엔이 무섭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장기는 머리 회전 하나뿐이고, 무력은 없다. 아마 그가 검을 어설프게 휘둘러도 금방 죽을 사람이었다. 처리하라고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가만히 있었다.
‘느껴지는 강자들의 기운이 한두 개가 아니야.’
란시엔은 약하지만 그녀를 지키는 자들은 강했다. 그는 시간을 끌기 위해 왔지만 라이넨의 비밀 정보기관의 구성원인 만큼 무엇인가를 수집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한담…….’
란시엔의 같잖은 행동은 꼴 보기 싫었으나 그녀와 가까워져야 했다. 이미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계속해서 이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가는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차분한 겉모습과 달리 그녀는 과격한 사람이었기에 지금쯤이면 적당한 반응을 보여야 했다.
“왜 그러세요?”
란시엔이 순진함을 꾸며냈다. 그러한 가식적인 표정에 역겨움을 느꼈으나 그는 애써 웃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저 대어를 낚아야 할 시간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사실 부끄러움이 많아서요.”
라이넨에게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는 없는 단어나 마찬가지지만 란시엔이 그걸 알 리 없었다. 게다가 카니벨라의 죽음(정확하게는 레이) 이후 그는 공식 석상에서도 잘 나오지 않았기에 그녀가 만날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란시엔은 황태자와 이렇게 오랫동안 마주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그에 대해 정보를 캐낼 기회도 지금이 아니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온전하게 그녀에게 사로잡힌 후에는 제국으로 돌려보내 줘야 하니까.
‘드디어 시작인가?’
란시엔은 처음 끌려왔을 때 자꾸만 탈출하기 위해 애쓰던 황태자가 떠올랐다. 이미 왕궁은 아레마이의 소굴이었다. 그러나 그걸 모르고 자꾸 쓸데없는 희망을 가지고 애써 탈출을 희망하던 그의 모습은 한심했다.
“황태자가 저런 사람이었나?”
그녀는 피식 웃으며 황태자를 관찰했다. 어디까지 탈출하면서 쓸데없는 희망을 품고 좌절하는지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갇혀 있는 궁 밖, 두 번째는 정원, 세 번째는 그녀의 궁 앞…….
황태자는 그녀가 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정말 수도 없이 많은 탈출 시도를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쳤는지 그녀에게 협조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는 거지만.
“대장, 지금이 때입니다.”
“대장께서 유혹하지 못하는 남자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이번에도 반드시 성공해 보도록 하지.”
그녀는 사용할 수 있는 건 다 사용했다. 외모, 재력, 두뇌, 사람 등 모든 것을. 그러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녀의 뜻대로 펼쳐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넘어가지 않을 것처럼 굴던 뻣뻣한 이 남자도 결국 굴복했다.
‘카니벨라 그년을 아주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다고 알려졌던데 꼭 그것만은 아니었군.’
그래서 안심했다. 한 사람이 머릿속에서 지워졌으니 이제 새로운 사람을 그의 머릿속에 가득 심어 주면 된다. 라이넨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기만 한다면야 아레마이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그녀가 가졌던 잘못된 생각은 세상이 언제나 그녀를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또한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쉽게 접혔다 펴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파멸은 소리 없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피곤해. 이 짓도 얼마 못하겠어.’
알스카는 잠든 척하며 침대에서 버티고 누워 있었다. 그러자 방 앞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던 시선들이 사라졌다. 평범한 사람들의 반응이랍시고 탈출 소동을 몇 번 벌였더니 감시자가 늘었다.
물론 그는 그것을 감지할 수 있기에 적당히 연기를 이어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궁 안에서 자유롭게 거느리고 다녔다. 시선이 집요했기에 뒤돌아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너무 예민하게 굴면 저들이 의구심을 품게 만들 수 있었다.
“좋아.”
이제 그를 지켜보는 시선 따위 없었다. 그는 재빨리 움직이기로 했다. 아무런 제약이 없을 때 하나라도 더 조사해서 주군에게 바쳐야 했다. 라이넨이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일종의 본능이자 주군을 위한 충성이었다.
그는 어둠에 적절한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을 썼다. 그리고 탈출 소동을 벌이며 익혀 두었던 궁의 지리대로 착실하게 움직였다. 마침내 아무도 없는 란시엔의 집무실에 들어갔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며 그의 몸이 안전하게 착지했다.
‘아무도 없지?’
혹시라도 누군가 있을 수도 있기에 그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이게 아레마이 연간 계획서인가.’
그는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그는 모든 것을 외우고는 언제 들어왔냐는 듯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직후, 란시엔이 눈가를 주무르며 들어왔다.
“오늘도 밤을 새워야 하다니……. 정말 정신은 피로한데 몸은 피곤하지 않으니 미치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류를 열심히 결재하는 그녀의 모습을 그는 멀리서 지켜보았다. 왠지 저 상황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신께서는 우리의 편이군.’
사람은 반드시 잠을 자야 하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잠이 부족해지면 본능적으로 잠을 보충하려 들었는데 란시엔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평소에는 밤을 새우거나 2~3시간 정도의 짧은 수면 시간을 가지는 그녀는 어떤 특정한 날이 되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잠만 잤다.
그리고 알스카는 그런 그녀의 몸이 곧 한계에 부딪힐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하면 용이하게 탈출함과 동시에 제국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머리를 굴리다 보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본래도 잠이 없었기에 그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해진 일정처럼 그를 찾아온 란시엔의 기세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누가 봐도 피곤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그렇지만 그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피곤해 보입니다.”
“……네.”
평소와는 달랐다. 누가 봐도 건성이었으나 그는 작전 실행의 순간이 빨리 찾아옴에 오히려 기분이 더 좋았다.
“혹시 잠을 못 주무십니까?”
“…….”
“저는 누군가가 제 체온을 함께 나누어 줄 때 잠이 잘 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공주께서도 그 포근한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군요.”
그녀는 갑작스러운 전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에는 그저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 급급하던 그가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의구심이 들었다. 이 남자가 도대체 나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 거지?
그녀는 그의 눈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는 순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번 속아 줘 볼까?’
그가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이것이 작전의 진전에 있어 도움이 된다면 괜찮았다. 그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대기시켜 놓아야겠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그가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오늘 밤에 찾아오세요. 잠에 잘 들게 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잠 좀 못 잔다고 해서 괴로운 것도 아니고.”
“아닙니다. 저 또한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안쓰럽더군요.”
애초에 한 번 거절할 것이라는 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이 여자는 절대 한 번 말한다고 해서 미끼를 물 여자는 아니니까.
“흠…….”
그렇지만 그녀로서도 그를 유혹하는 것이 급했을 것이고, 그렇기에 그는 반드시 이 작전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일 밤에 올게요.”
그녀는 한발 물러나 내일 오겠다고 말하며 그에게 싱긋 웃었다. 그 역시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
“네, 반드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