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라이부스의 마음
그 이후로 습격은 있었으나, 루키에르의 활약으로 안전할 수 있었다. 카니벨라는 새삼 루키에르가 루카민 다음 가는 강한 기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차할 때 형제를 지키게 만들기 딱이었다.
“이제 곧 라소니 왕국에 도착합니다.”
며칠만 걸으면 라소니 왕국 국경에 도착할 것이다. 수도까지는 또 여기서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쓸 수 있는 운송 수단이 많기에 시간은 더욱 단축될 것이다.
“으아, 다행이다!”
그녀의 말에 라이부스는 쾌재를 불렀고, 라이넨은 다소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계속되는 습격에 지치기도 했고, 노숙도 피로를 가중시켰다. 그녀는 중간중간에 라이넨이 몸이 찌뿌둥하다는 듯 어깨를 치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적응한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말만 하면 모든 것이 제공되는 환경에 살았던 그들이기에 이번 여정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 줘.”
그녀의 미안한 표정에 라이넨은 표정을 풀었다. 함께 가기로 했고, 그녀는 그를 위해 최대한 배려해 주고 있었다. 그녀 혼자 갔더라면 지금쯤 국경을 넘어 수도로 가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발목을 잡는 게 아닌가 싶어 그는 미안했다.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혼자 가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같이 가게 해 달라고 했는데 오히려 방해만 되었어.”
“괜찮아. 혼자였다면 아마 난 첫 습격 때 죽었겠지.”
그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라이넨보다 강하다 하더라도 혼자서 그 많은 적들을 감당할 수는 없는 거였다. 루키에르가 나타나기 전까지 버티지 못했을 거고 레신카를 죽이기는커녕 그의 검에 비명횡사했을 거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라이넨과 라이부스를 데리고 온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마마, 이제 저녁입니다.”
루키에르의 말에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이미 지고 땅거미가 가라앉고 있었다. 슬슬 달과 별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늘도 어쩔 수 없이 노숙이네요.”
“아, 또 노숙?”
라이부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직 국경선 근처에도 가지 못했기에 노숙은 필수적이었으나 라이부스는 이제 노숙의 ㄴ자도 듣기 싫었다. 그런 그의 푸념에 루키에르가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 타이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황자 전하. 지금 여기 계시는 황태자 전하나 공주마마께서도 아무런 말씀을 안 하시지 않습니까.”
“아, 그건 맞는데…….”
그녀는 그런 그들의 광경을 다소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마치 아이를 달래는 엄마와 같지 않은가. 맛있는 걸 사달라고 조르는 라이지를 조용히 타이르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오래전 이야기 같았다.
“피곤해?”
그들의 투덜거림을 바라보던 그녀에게 라이넨이 다가왔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재미있어 보여서.”
“그래?”
“황자 전하가 부럽네.”
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 돌아섰다. 그리고 잠잘 공간을 물색하고 이불을 깔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라이부스는 땔감을 구하러 사라졌고, 루키에르는 모닥불에 필요한 돌을 찾으러 갔다. 그리고 라이넨은 사슴을 사냥해 왔다.
그러자 그녀는 라이넨이 구해 온 사냥감의 내장을 분리하고 먹을 수 있게 썰어 꼬챙이에 꽂았다. 이윽고,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며 사슴 고기가 익기 시작했다. 모두 배고픔에 입에 침이 고였다.
“맛있겠다.”
노숙의 좋은 점은 진짜 딱 하나였다. 여러 가지 고기를 먹어 볼 수 있다는 거?
라이부스는 자신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말이지 이것을 진리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정말 그것 말고는 좋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불편한 잠자리와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환경은 그를 힘들게 했다.
라이넨을 생각하며 버티고는 있었지만 이런 경험,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잘 시간이에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는 라이부스를 따로 불렀다.
“황자 전하께서는 저와 함께 불침번을 서 주세요.”
그는 거절하고 싶었으나,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기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은 모닥불 앞에 앉아 한없이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녀가 아까부터 입을 떼고 싶었지만 억지로 다무는 모습을 봤었기에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힘드시면 돌아가셔도 괜찮아요.”
“뭐?”
“저나 루키에르는 이런 환경에 익숙하고 라이넨 역시 전쟁에 참전하면서 여러 차례 겪어 봤을 거예요.”
“…….”
“그렇지만 황자님께서는 아니죠. 그리고 이번 구출 작전에 굳이 투입되실 필요도 없어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알스카는 라이넨의 심복이지 라이부스의 심복이 아니었다. 그리고 황실이 아레마이와 싸우고 있을 때 그저 숨어 있기만 해도 괜찮았다. 그는 그럴 의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는 괜한 오기가 났다. 이 여자한테 동정을 받는 것 같아 싫었다. 그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난 갈 거야.”
“……앞으로도 계속 이런 여정일 겁니다. 그런데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니까.”
그는 투덜댔다. 어차피 라소니 왕국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동경하는 라이넨과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다.
‘물론 형님은 나를 싫어하시지만…….’
라이넨과 라이부스는 어머니가 달랐다. 그리고 라이넨은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황실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볼 때 타인을 보는 것처럼 차가웠다.
실제로 이번 여정에서 둘은 개인적으로 말을 섞은 적이 없었다.
“어차피 형님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함께한 거야. 그러니까 절대 포기 안 해.”
“라이넨과 사이가 안 좋으신 거 아니었나요?”
“하하, 그렇게 와전이 많이 되긴 했지. 그렇지만 난 형님이 좋아.”
“어째서요?”
“하하, 이야기가 좀 긴데 들을 수 있겠어?”
“지금 남는 건 시간밖에 없는 걸요, 뭐.”
그는 자신이 품고 있던 비밀에 대해 그녀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 * *
라이부스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다. 형님을 잘 보필해 달라고. 외로운 사람이라고.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황태자라는 완벽한 신분과 따르는 수많은 가신들, 그리고 여러 조건들을 보며 부럽다고만 생각했다. 그는 황후의 손을 잡고 지나갈 때마다 그런 라이넨을 보며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질투가 되었다. 황제는 자식을 차별하지는 않았지만 황태자와 황자가 받는 교육의 질은 천지 차이였다. 그런 데다가 친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자꾸 형님 이야기만 했다.
그렇지만 커가며 그 질투는 사라졌다. 형님은 그만큼의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피하지 않고 열심히 했다. 그리고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적어도 손길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라이넨은 그의 투정을 어느 정도 받아 주었다. 물론 표정은 잔뜩 찌푸리긴 했지만 적어도 혐오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자신이 라이넨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찾을수록 그에게 아픈 기억을 자꾸만 되새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걸 알게 된 것은 6살 때였다.
“어마마마! 형님!”
그것은 우연히 보게 된 전 황후와 황태자의 추모식 때였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마차 안에서 라이넨이 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라이넨은 그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때리는 빗물 가운데서 라이넨의 눈물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 슬픔이 얼마나 짙은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그까지 감화되어 눈물이 흐르도록 만들었다. 그는 마차에 함께 있던 시녀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으아앙!”
라이넨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전 황후를 추모하던 그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다.
“아가야, 무슨 일이니?”
“그, 그것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울음을…….”
그러나 그들이 당황하든 말든 그는 그 슬픔에 동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강하게 낙인되었다.
“어마마마, 제게도 최고의 교육을 시켜 주세요.”
“갑자기 무슨 말이니?”
“밑에서 형님을 돕는 자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다짐한 것이 라이넨을 밑에서 은밀하게, 심지어 본인도 모르게 돕는 그런 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황후는 그의 생각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애가 의심할 거야. 괜찮겠니?”
“네, 애초에 그게 목적이니까요.”
황후는 걱정했다. 지금도 환영받지 못하는 동생인데 이렇게 했다가 라이넨에게 더 미움만 받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라이부스는 확고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했다.
그가 항상 라이넨을 보면서 느꼈던 기시감. 그것은 바로 라이넨에게 책임감과 의무감은 있지만 그것 아래에 의욕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라이넨에게 있어 황태자라는 자리는 그저 죽은 라이넬을 대신해 수행하는 기계적인 업무에 불과했다.
그리고 라이부스는 라이넨이 삶의 의지를 별로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도 단번에 느꼈다. 항상 죽은 눈으로 황궁을 돌아다니는 라이넨의 모습을 보며 그는 라이넨이 죽기라도 할까 봐 겁이 덜컥 났다.
아, 이렇게 되다가는 형님이 죽겠구나.
그래서 그는 삶이 즐거워서 살지 못한다면 적어도 의지를 계속 잇게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밑에서 활약하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면 라이넨은 어떻게든 안간힘을 써서 버티려고 할 것이었다.
“네 아버지께 상의해 보는 것이 좋을 거다.”
“아바마마께서도 허락하실 겁니다.”
황제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라이넨이다. 그런 황제가 아들이 저렇게 방황하고 죽은 눈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걱정 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늘 황제가 안절부절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황제를 찾아갔다. 황제는 늦은 밤에 갑자기 찾아온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보며 의아했다.
“무슨 일이냐?”
“아바마마께 제안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를 형님께서 황제가 될 말로 써주세요.”
“무슨 소리냐?”
“지금 형님께서 어떤 상태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
“저러다 형님께서 죽기로 결심이라도 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억지로라도, 저를 견제하면서라도 삶을 이어 나가게 하셔야 합니다.”
황제는 고작 6살짜리 꼬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확실히 라이넨은 위험한 상태가 맞았다.
“네게 생각이 있느냐?”
그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풀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걸 들은 황제가 끙하는 소리를 냈다.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라이넨과 라이부스의 사이는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형님께서 황제의 자리에 욕심이 나게 하셔야 합니다. 삶의 의욕을 조금이라도 찾게 해야 합니다.”
“그 아이에게 수많은 오해를 받을 것이고, 경멸의 시선을 받게 될 건데도?”
“감당할 자신이 있습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형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그래.”
황제는 기꺼이 악역을 맡겠다는 아이의 말에 미안해졌다. 어른들이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어린아이가 감당하게 만들어 버렸다. 황제는 이 가혹한 상황과 그런 아들의 결심에 미안해져 눈물을 글썽였다.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그렇게 라이부스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먼저 그는 황제의 지원 아래 최고의 교육자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검술은 제대로 배우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육체적인 유연함이 받쳐 주니 배움에 비해 더 높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행정적인 업무 처리에 있어 큰 재능을 보였다. 황제는 그런 그의 업적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었다. 물론 라이넨의 업적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그러나 그런 작은 움직임만으로 라이넨에게 경계 대상이 되었다. 라이넨은 그를 볼 때마다 표정을 찌푸렸고, 라이넨을 따르는 세력들은 갑자기 황자가 왜 저러냐고 말하며 입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는 연출되어야 하기에 그들을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저들을 흩어 버리기 위해 황제와 어느 정도 입을 맞춰 두었다. 갑자기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큰일 나니까.
그의 의도대로 라이넨은 황제 자리에 나아가기 위해 조금씩 의욕을 내기 시작했다. 남들이 봤을 때는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적어도 그자가 라이넨이기에 그는 감격스러웠다.
‘형님, 부디 황제가 되세요.’
그는 그렇게 형님을 황제로 만들기 위한 삶을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