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나이티
카니벨라는 이야기가 끝난 후 말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 라이부스를 보며 그에게도 사정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가혹한 사정이 아닐 수가 없었다. 라이넨에게도 라이부스에게도 가혹한 사정.
“그렇다면 궁에서 나가지 않고 계속 버티셨던 것은……?”
“맞아, 내가 계속 보여야지 형님께서 나를 견제하시고 황제가 되기 위해 계속 삶을 이어 가실 테니까.”
“…….”
“지금은 형님이 순조롭게 황제가 되어 가고 계시니 다행이지.”
가족 전체가 한 사람을 생각하며 잘되기를 원한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랬다. 어머니가 죽고 난 이후 그녀에게 남겨진 것은 폭력과 방치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라이넨이 정말로, 미치도록 부러웠다.
“…….”
그녀는 침묵했다. 순식간에 숲이 조용해졌다. 벌레들이나 짐승들의 울음소리도 없어 음산할 정도였다.
“제가 많이 싫으시겠습니다.”
“당연히 싫지. 넌 나타나자마자 형님을 흔들었어. 삶의 의욕을 가지게 한 건 좋았지만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놓아 버리려고 하셨다고.”
게다가 네가 없었을 때 형님이 얼마나 힘들어하셨는지 네가 봤다면 넌 네 목을 조르고 싶었을 걸?
그녀는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황제와 약속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라이넨의 곁에서 떠나겠다고.
“전하께서 바라시는 일은 곧 일어날 거예요.”
세상은 그녀처럼 손에 피가 잔뜩 묻은 사람을 황태자비로, 황후로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사람이었고, 라이넨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더러운 무언가다.
라이부스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녀의 표정 가운데서 라이넨의 모습을 발견했다.
카니벨라와 라이넨이 가지고 있는 어둠은 다소 닮은 구석이 있었다. 라이부스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랬기에 둘은 서로에게 더 끌리지 않았나 싶었다.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아, 분위기가 너무 칙칙하네. 좀 다른 이야기할 거 없어?”
“제 인생 자체가 이 밤하늘 같아서요. 황자 전하께서 하시는 이야기들이 가장 재미있을 것 같네요.”
“그런가?”
그는 무엇을 이야기할까 한참 동안 고민했다. 그러던 중 그의 머릿속에서 제국 건국 설화가 떠올랐다. 건국 설화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황족들만 알고 있는 설화였다.
[초대왕은 어지러운 세상에 한 조그마한 나라를 세웠다. 그 초대왕은 마법이라는 기적을 일으키는 힘으로 주변의 소국들을 종속시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법이 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자손 중 왕세자만 그 마법을 계승하게 했다.
마법 계승 의식은 알려지지 않은 채 그 명맥을 이어 갔고, 세자들이 일정 나이가 되면 왕은 마법을 계승시키고 얼마 되지 않아 죽는다.]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은 이걸 거의 모른다는 것이네요.”
“그렇지.”
“근데 왜 저에게 알려 주시나요?”
“넌 말한다 하더라도 남들에게 퍼뜨리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아서.”
“참 태평하시네요.”
“원래 그런 소리 자주 들어.”
그녀는 그의 능청에 한숨을 쉬었다. 무언가 엄청난 기밀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찜찜했다. 애초에 이런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라이부스 역시 이 설화에 대해 믿지 않았었다. 그가 마법 계승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지나가던 도중 황제와 라이넨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기 때문이다.
‘마법이라는 게 정말 있다고? 마법 계승도?’
그리고 이 계승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제국의 역사는 자그마치 천 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자랑했다. 그런데 아직 백성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본래 마법 계승 이야기는 황제, 황후, 계승 당사자, 교황, 황제의 수석 시종, 4대 공신 가문의 가주들만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이들에게는 일종의 장치가 있어 관련자 이외의 사람에게 이 사실에 대해 발설할 시 죽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라이부스는 그 모든 조건에서 제외되는 사람이었기에 카니벨라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괜히 말하게 될까 봐 불안해지잖아요.”
“하하.”
라이부스는 불안해하는 그녀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녀는 그가 얄미웠다. 아까 괜히 걱정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공간이 일그러졌다. 하늘이 깨어지고, 땅이 흔들렸다. 그녀는 주위를 바라보았다. 오로지 그들이 앉고, 딛고 있는 곳에서만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그들은 당황하여 벌떡 일어섰다.
“이, 이게 무슨!”
잠을 자던 라이넨과 루키에르가 벌떡 일어났다. 라이넨은 재빨리 그녀에게 달려왔고, 루키에르는 갑작스러운 현상에 당황해 입을 벌렸다. 그녀는 얼이 빠져 있는 방황하는 루키에르에게 소리를 질렀다.
“일단 아무거나 잡아!”
“네, 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공간이 그들을 집어삼키기 전에 재빨리 잡을 것을 찾아 움직였다. 그러나 허허벌판에 무엇인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으, 으아아!”
그들은 순식간에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으…….”
카니벨라는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누군가의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누구지?”
“아이야, 내가 기억나지 않느냐?”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투였다. 한참 동안 생각하던 그녀는 최근에 꿈속에서 만났던 꼬마를 떠올렸다.
“넌 그때의 꼬마?”
“난 꼬마가 아니지만 오랜만이구나.”
“오랜만은 무슨. 고작 해 봐야 한두 달 전이라고.”
꼬마는 여전히 재수 없는 말투를 지니고 있었다. 자신을 아이라고 부르며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의문의 소녀.
“네가 우릴 여기로 불렀어?”
“누군가가 마법에 대해 발설했기 때문에 불렀단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그녀는 자신이 예전에 봤던 그 기적이 마법임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구출을 할 수 있는 기한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엉뚱한 곳에서 발목이 잡히고 있었다. 조급해졌다.
“그냥 좀 봐주면 안 될까? 난 지금 바쁜데.”
“걱정 말거라. 내가 빼앗은 시간은 그만큼 빠르게 보답해 줄 테니.”
그녀는 꼬마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약속은 늘 지켰던 존재이지만 그만큼 비밀도 많아 의심스러운 존재였다. 덕분에 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녀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딱히 고맙거나 하지는 않았다.
“으, 여기가 어디야?”
“마마, 그 꼬마는 누구입니까?”
차례로 모두가 일어나며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으쓱했다. 나도 몰라 이 사람들아.
“내 집이란다. 환영한단다, 아이들아.”
누가 봐도 이쪽이 어른이고 저쪽이 아이인데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던지나 싶었다. 그러나 라이넨은 꼬마를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발, 그들과 같은 황금색의 눈, 그리고 예전에 보았던 것 같이 낯익은 얼굴…….
“당신은?”
“아, 그러고 보니 넌 나와 구면이겠구나.”
“형님, 저 아이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봤었단다. 저 아이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려 하기에 내가 도와주었지.”
라이넨은 카니벨라가 예전에 궁에서 요양을 빙자한 탈출극을 벌였을 때 꼬마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라이넨이 놀란 이유는 갑작스러운 재회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 소리쳤다.
“설마 초대 황제?”
그는 예전에 황제들의 초상화를 전시해 둔 방에서 지금의 저 모습과 똑같은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가 봤었던 것은 지금의 모습보다 훨씬 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었기에 괴리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러나 꼬마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오, 알아봐 주어 고맙구나.”
“초대 황제라고?”
“루미니르 제국의 역사는 천 년이 넘는데 그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카니벨라와 라이부스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사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러나 꼬마의 태연한 표정에 그들은 입을 벌렸다.
“지, 진짜로?”
“일단 안으로 들어오거라.”
그들은 꼬마의 부드러운 말에 일단 들어가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들어온 이들은 입을 벌렸다. 그냥 일반 사람들의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가득 있었다.
“저게 뭐야?”
“이게 무슨 냄새지?”
여러 가지 약물과 식물, 두꺼운 마법 서적, 이곳저곳에서 부유하는 여러 물건들, 끓고 있는 커다란 솥 등 그녀는 그제야 저 꼬마가 평범한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들에게 차를 내주며 꼬마는 말했다.
“내 이름은 나이티이고 초대 황제일 때 당시 썼던 이름은 에스라 폰 루미니르였다.”
“……!”
라이넨과 라이부스는 깜짝 놀랐다. 저 이름은 초대 황제가 썼던 이름이 맞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저 꼬마의 후손이라는 말이 된다.
“맞다. 너희는 내 후손들이고 만나서 반갑단다.”
“아, 예…….”
라이넨과 달리 나이티와 딱히 접점이 없었던 라이부스는 어정쩡하게 서서 내미는 손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이티는 그런 라이부스를 보며 웃고는 자신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아이야, 넌 잠깐 밖으로 나가 줄 수 있겠니?”
셋과는 달리 마법에 대한 그 어떤 연관성도 없는 루키에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카니벨라의 눈짓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나이티의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나이티는 손을 저어 허공에 방음 막을 만들었다.
“일단 앉을까?”
그들은 식탁으로 보이는 곳에 가서 앉았다. 차가 들어 있는 컵들이 허공에서 밑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이티는 차를 마시며 고요한 표정으로 라이부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찻잔을 내려놓은 후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야, 마법에 대한 것은 함부로 발설하지 말아 다오.”
그 말에 라이넨은 고개를 돌려 라이부스를 바라보았다. 라이부스가 어떻게 마법에 대해 알고 있는지 그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네가 마법에 대해 발설했군.”
“죄송합니다, 형님.”
“탓하고자 부른 것이 아니란다, 아이야. 어차피 이 아이는 마법을 목격한 적이 많기에 마법의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에 있어 위험한 것은 아니지만 계승은 다르단다.”
마법의 존재야 기적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끝이지만 마법 계승은 다르다. 마법 계승은 그 존재도 알려지지 않았고, 방법도 알려지지 않았다. 당사자 이외의 존재가 그것을 알게 되었을 시 그자는 죽게 된다.
또한, 혹시 마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죽기라도 한다면 그 즉시 마력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마법의 명맥은 끊어진다.
그렇기에 그만큼 비밀리에 계승되어야 했던 것이다.
‘뭐 이번 계승을 끝으로 마법의 존재는 사라지겠지만…….’
나이티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라이부스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아니란다. 넌 그저 그것을 들은 것뿐이지 않느냐.”
나이티는 따뜻하게 그의 실수를 감싸 주었다. 라이부스는 자신이 라이넨에게 해가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라이넨은 자신의 눈치를 보는 라이부스를 보며 표정을 찌푸렸다.
저놈이 갑자기 왜 저래?
“일단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잠자리에 들거라. 여기는 마법 결계로 보호받는 곳이니 습격 같은 건 걱정 안 해도 된단다.”
“네, 감사합니다.”
나이티는 손가락을 튕겼다. 방음 막이 깨지고 루키에르가 안에 들어와 있었다. 나이티는 손가락으로 위로 올라가서 자면 된다고 말했다. 라이부스는 급격한 피곤함에 재빨리 위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마마,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그녀는 루키에르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까지 보고 나이티에게 다가갔다.
“할 말이 있어.”
“무슨 말이니?”
“마법이라는 그런 무한한 힘이 있다면 왜 아레마이를 막지 못하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