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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모든 것은 작전대로 (76/93)

75. 모든 것은 작전대로

그들은 하루 종일 체력을 충전하며 휴식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마지막으로 계획을 점검한 일행들은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늘은 운이 좋네.”

달도, 별도 비추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카니벨라와 라이넨은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옷에 복면을 쓰고 지붕 위를 달렸다. 라이넨은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카니벨라를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내가 너무 빨랐어?”

“아니, 괜찮아.”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둘은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어두운 골목 아래로 들어갔다.

“이제 할게.”

“목적지는 궁 안이야.”

그는 돌을 깨뜨렸다. 그러자 그의 몸 안으로 마력들이 들어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는 라소니 왕국의 궁 안에 가고 싶다는 간절한 사념을 보냈다. 그러자 마력이 파란색 빛을 띠더니 순식간에 그들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

성인이 되자마자 등 떠밀리듯 나갔던 궁이 그녀의 눈앞에 보였다. 그녀는 묘한 감정이 들어 움직이지 못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녀는 이내 자신의 뺨을 세게 쳤다. 짝 소리가 나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에게 한 번 웃어 주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라이넨은 너무나도 당당하게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의문이 들었다.

“알스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대충 예상은 가지.”

“어딘데?”

“내 궁.”

카니벨라는 계승권에서 멀어진 이후로 외진 곳에서 지냈다. 그곳은 온전한 궁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낡았고, 공주가 살기에는 격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곳이기에 누군가를 숨겨 놓기에는 딱이었다.

“너에 대한 소문이 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도 납치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거야. 그런데 궁 안에 있다는 것은 확정이 되었다? 그럼 뭐 간단하지.”

“네 궁은 어디에 있어?”

“조금 멀어. 그렇지만 남들 눈에는 띄지 않을 거야.”

마침 우연히 오게 된 곳이 살짝 외진 곳이었다. 바로 그녀의 어머니가 살았던 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본래 전 여왕의 궁은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러나 뮤일라가 즉위하면서 궁의 배치를 바꿔 버렸다.

뮤일라는 새로운 궁을 지었고, 그렇게 전 여왕의 궁은 화재 사건 때와 조금도 다른 것이 없이 휑하게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그 이후로 이쪽에 발걸음 하는 사람들은 사라졌고, 오히려 그 때문에 그들에게는 절호의 찬스였다.

“문제라면 란시엔이 있는 곳에는 조직원들이 득실거린다는 건데…….”

란시엔은 싸울 줄 몰랐기에 항상 자신을 지키는 사람을 은밀하게 배치해 두었다. 그 당시 그녀는 란시엔을 볼 때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사람들의 기척을 느끼곤 했었다.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이미 아레마이는 궁에 침투해 있었군.’

예전부터 아레마이는 마치 기생충처럼 궁 여기저기에 침입해서 나라 전체를 갉아먹고 있었다. 애국심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는 카니벨라였지만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바쳐 가면서 지켜왔던 왕국을 그런 식으로 망쳤다는 것에 화가 났다.

‘그래도 일단 가 보자.’

그들은 눈에 띄지 않게 걸었다. 그림자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며 주위를 살핀 라이넨은 딱 한마디로 이곳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으로 적막한 곳이었다. 궁이라고 하기에는 삭막할 정도로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나 아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혹시 자신이 잘못 짚은 게 아닐까 불안해졌다. 자신의 궁은 점점 다가오는데 주변에 느껴지는 기척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라이넨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조직원들을 물린 게 아닐까?”

“그럴 리가. 란시엔 그 애가 어떤 애인데.”

“의심이 많고, 신중하다고 했었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위험을 감수할 때가 있지.”

“위험을 감수한다고?”

알스카는 충성심이 큰 자였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멀뚱히 앉아 있을 리가 없었다. 분명히 무엇이라도 하려 할 테고 그런 그의 제안이 란시엔으로 하여금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하게 만든 것임에 틀림없었다.

“알스카가 어떤 수를 썼을 거야. 그래서 암살자들을 전부 물린 거고.”

“네 부하가 그리 대단한 사람이야?”

“머리가 비상한 자야. 그러니 어떤 작전과 그에 따른 대책을 세웠을 거야.”

“그래?”

“그러니 믿어 보자.”

그녀는 그의 확신 어린 말투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함을 떨쳐 보기로 했다. 그러자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들은 서둘러 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밤하늘은 어두웠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빨리 알스카를 구출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궁은 너무나도 어두웠다. 그녀는 다시금 나쁜 예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그녀에게 낯선 기척 하나가 사람을 넣어 놓은 것 같은 보따리를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지?”

그녀는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그녀에게 간단히 고개만 끄덕이고는 라이넨에게 무릎을 꿇었다.

“전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그는 바로 알스카였다.

*   *   *

당일 아침. 알스카는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여자 한 명 제압하기에는 괜찮은 상태로군.’

그는 몸을 간단하게 풀며 눈을 돌렸다. 란시엔을 제압하기 위한 물건이 필요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 옷장, 책장에 꽂혀 있는 몇 권의 책들. 이것이 다였다.

공주가 머물던 궁이라고 하였는데 너무나도 관리가 안 된 방의 모습을 보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이 방에 살고 있던 공주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공주의 궁이라고 하던데 정말이지 제대로 사람 취급을 안 한 것 같군.’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어서야 그가 원하는 것이 제대로 이루어질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성공시켜야 했다. 라이넨이 가만히 있으라고, 구출하러 올 테니 기다리라고는 했지만 진짜 그냥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라이넨이 갈 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야 했고, 그런 일에 있어 란시엔이라는 여자는 반드시 필요했다.

‘없으면 만들면 되지.’

그러나 그는 자신을 은밀하게 쳐다보는 시선들이 매우 불편했다. 이래서는 뭔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벌떡 일어났다.

<자꾸 방 안에만 있으니 답답해서 미칠 것 같군요. 앞으로 탈출하려 하지 않을 테니 적어도 나갈 수라도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제가 있는 궁까지는 나오셔도 됩니다. 그 이상 가면 안 되지만.>

이미 어느 정도는 돌아다녀도 된다는 확답을 받은 상황이었기에 그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당장 그녀를 찾아가서 오늘 하루만큼은 궁 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누려 보고 싶다고 말했다.

“무슨 일이기에 혼자 계시고 싶다고 그러는 건가요?”

란시엔은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벌컥 여는 그의 행동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오자마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먹이는 것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그는 뻔뻔했다. 다소 불량한 태도로 그는 그녀에게 일갈했다.

“제 첫 요구입니다. 들어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후…… 좋습니다. 허락하죠.”

그녀는 곧장 사용인들을 불러 궁 안의 모든 아레마이 조직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혹시 몰라 대기시켜 놓았던 암살자들도 모두 물렸다. 그는 그녀가 명령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한마디 던졌다.

“오늘 밤에 오실 때도 혼자서 오세요. 누군가 문밖에서 저희를 지켜볼 걸 생각하니 벌써 부끄럽거든요.”

“……네, 그러죠.”

황태자라는 신분이기에 다소 까다롭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능글맞고 변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란시엔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런 뻔뻔한 작자가 황태자라니. 내일도 이렇게 방만하게 굴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러나 알스카에게는 이미 오늘이 이 궁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었다. 다음 날까지 머물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고, 아무리 라이넨이 늦게 움직였다 하더라도 이제라면 라소니 왕국에 도착했을 터였다.

‘곧 전하께서 도착하신다.’

그는 그것을 단단히 믿었다. 그의 주군은 절대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과감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럼 오늘 밤에 뵙겠습니다.”

“네, 기대하죠.”

그는 마지막으로 란시엔에게 인사하고는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며칠 만에 더욱 피곤함에 절여져 예민해져 있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예감이 좋았다. 이제는 일을 실행하기 위한 완벽한 준비만이 남아 있었다.

‘그럼 밧줄이나 보따리를 만들면 되겠네.’

그는 재빨리 궁 안을 뒤졌다. 그리고 이불보를 이용해 밧줄과 보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선을 점검하고, 자신의 작전이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다시 한번 따져 보았다.

“완벽해.”

그는 실로 그렇게 생각하였고, 오늘로 이제 이 지긋지긋한 궁과도 이별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란시엔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벌써 밤이었다. 달과 별이 먹구름에 가려져 빛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불길할 정도로 어두운 하늘을 보며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 가운을 입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니. 정말 굴욕적이군.’

황태자가 오만방자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무례한 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작전을 바꾸기로 하였다.

“오늘 밤을 보내고 나면 황태자를 죽인다.”

그리고 엉뚱한 곳에서 황태자를 죽였다고 발표하게 만든 후, 내란으로 쑥대밭이 된 제국을 먹어 버려 아버지의 소망을 이룰 것이다.

‘아버지.’

참으로 오랫동안 달려온 길이고, 마지막이 보이는 길이었다. 저런 불손한 황태자쯤이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오늘 이후 귀신이 되어 저승을 떠돌게 만들어 전란의 씨앗이 되게 만들 것이다.

‘출발해야겠군.’

적막한 곳을 홀로 걸으며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점검하였다. 어떻게 제국 내에서 내전을 일으킬지에 대한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카니벨라가 과거에 머물던 궁에 금방 도착했다.

“망할 카니벨라 년…….”

카니벨라 생각이 나자 란시엔은 다시 한번 이가 갈렸다. 그녀를 놓친 것은 란시엔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실수였다.

“계십니까?”

한참을 그렇게 이를 갈던 그녀는 곧장 알스카가 머물러 있는 방에 들어갔다. 그는 편안한 복장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 반갑게 맞이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아닙니다. 오랫동안 일 하시느라 힘들 것 같아 음료를 준비했습니다.”

그녀는 본래 남이 주는 건 먹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하루쯤은 황태자의 비위를 맞추는 척하겠다고 생각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가 건넨 주스를 받아 마셨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감돌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러나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지며 쓰러졌다. 본래 잘 자지 못하는 육신에 견딜 수 없이 피로가 깃들고 있었다.

점점 눈이 잠기고 있었다. 통제 불능의 몸은 그저 흐느적거리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함정에 가볍게 걸린 그녀를 비웃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잘 자라고.”

“끅…….”

그녀는 소리를 치고 싶었다. 당장 저놈을 잡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속마음은 목소리가 되지 못했고, 그녀는 그렇게 잠들어 버렸다.

‘효과가 좋아 다행이군.’

간신히 적을 잠재웠지만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이제는 시간 싸움이었다. 그는 혹시나 그녀가 깨어나서 난동을 부릴 것에 대비해 재갈을 물리고 몸을 꽁꽁 묶었다. 그리고 곧장 그녀를 보따리 안에 넣었다.

궁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 낯익은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재빨리 자신의 주군에게 가서 무릎을 꿇었다.

“전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알스카, 너도 무사해서 다행이군.”

라이넨은 자신의 부하에게 수고했다며 어깨를 쳐 주었다. 그때, 카니벨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이동해야 해.”

그들은 즉시 성문으로 이동했다. 라이부스와 루키에르가 여유롭게 그들을 기다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들을 본 라이넨은 곧장 품에서 돌을 하나 더 꺼내 즉시 깨뜨렸다.

그들의 몸에 빛이 감돌며 루미니르 제국의 황실로 곧장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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