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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선전포고 (77/93)

76. 선전포고

란시엔은 눈을 떴다. 자신이 왜 온몸이 묶인 채 낯선 곳에 있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안녕?”

그때, 카니벨라가 음식이 들어 있는 쟁반을 가져오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쟁반을 든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표정 역시 일그러져 있었다.

“뭐, 뭐야? 네가 어떻게?”

“여긴 루미니르 제국이야.”

“뭐라고?”

라소니 왕국에 있던 그녀가 어떻게 하루 사이에 루미니르 제국에 올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의문에 카니벨라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일단 여기에 있어. 넌 아레마이가 우리를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인질로서 이용될 거야.”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들었다. 감히 날 이런 식으로 이용하려고 해? 그녀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닥쳐! 네가 감히 뭔데 우리의 숙원을 망치려고 들어?”

“아, 안 그래도 그거 말인데. 난 언제나 그 말을 들으면서 바보 같다고 생각했거든? 이루어져 가는 것이 놀랍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웃기지 마! 아바마마의 유언을 네가…… 감히!”

“그 아바마마는 내 아버지가 아니야. 그리고 내게 아버지는 없어.”

카니벨라는 싸늘하게 말했다. 이미 란시엔이 이곳에 붙잡혀 온 그 시점에서부터 아레마이는 무너지게 되어 있다. 카니벨라가 본 아레마이는 대장 한 사람이 없으면 우왕좌왕할 그런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여기서 계속 지켜봐. 우리가 네 야욕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말이야.”

란시엔은 계속 소리쳤으나 카니벨라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쟁반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손을 살짝 흔들고는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에서는 황제, 라이넨, 카샨, 라이부스가 앞으로의 일에 대해 회의를 나누고 있었다.

“왔는가?”

그녀는 황제에게 인사를 하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레마이를 공적으로 선포하고 그 아이가 그곳의 수장임을 이야기해 줘야지.”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제국에 남아 있는 아레마이 잔당들이 우리를 노릴 수가 있습니다.”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피식 웃었다.

“황궁 전체가 마력에 뒤덮여 있다. 저들이 혹시라도 움직인다면 내가 필요할 것이야. 나만이 그 아이가 있는 감옥 문을 직접 열어 줄 수 있거든.”

란시엔이 갇혀 있는 감옥은 특별히 황제의 마력에만 반응해서 문이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저들이 란시엔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다른 것이 걸렸다.

“이미 다른 나라는 아레마이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저 명분일 뿐이다. 저렇게 선포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나중에 전쟁을 걸 때 그럴듯한 이유가 생기니까.”

“……그렇군요.”

“네 나라를 없애 버릴 거라고 하니 슬픈 것이냐?”

황제의 질문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어제 궁에 갔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더라? 슬픔이었나? 아니면 경멸? 아니면…….

“아닙니다. 멸망시키셔도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정확히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정의하지 못했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어머니가 온 힘을 바쳐 다스렸던 나라가 란시엔 같은 사람에게 유린될 바에는 그냥 멸망당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사랑했던 라소니 왕국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렇군.”

황제는 그녀의 쓴웃음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저 아이는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럼 시기를 언제쯤으로 잡으실 생각이십니까?”

라이넨의 물음에 황제는 골똘히 생각했다. 언제쯤 공표해야 저들에게 알맞은 공격을 가할 수가 있을까?

“지금 바로 하셔도 무방합니다.”

“어째서지?”

“저들은 지금 란시엔이 사라져서 당황하고 있을 테니까요. 생각할 시간이 생기기 전에 저희가 먼저 선수를 치자고요.”

황제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움직여야 할 때였다. 재빨리 저들의 틈을 파고들어 무너뜨려야 했다.

“그건 내게 맡겨.”

나선 사람은 라이넨이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의문 어린 표정에 그는 씩 웃었다.

“원래 피해자 호소가 제일 잘 먹혀.”

*   *   *

정확히 하루 뒤, 라이넨은 루미니르 제국의 이름으로 라소니 왕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나선 것은 아레마이라는 악질적인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공식 석상에 잘 나서지 않는 라이넨이었기에 모두들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아레마이라는 조직이 무엇이냐고 웅성거리는 자들도 있었으나 그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아레마이에 대략 한 달 정도 납치를 당했고, 감금되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

모두들 그의 발언에 충격을 받았다. 대륙의 황태자에게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루미니르 제국민의 대부분은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뛰어났다. 그리고 라이넨은 그런 제국을 다스리게 될 차기 황제였다. 그런 그를 어떻게 했다고? 모두의 눈에서 분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더 가 볼까.’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갔다.

“아레마이의 수장은 라소니 왕국의 란시엔 공주였다. 그녀는 내게 루미니르 제국을 넘기라고 하루가 멀다 하고 협박했다.”

“그럴 수가!”

“그리고 라소니 왕국은 그 아레마이의 소굴이다. 그 나라 백성의 대부분이 그 조직에 속해 있고, 그들은 이 제국을 넘어서서 대륙을 정복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이제 본론이었다. 그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눈빛은 마치 사람들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목소리는 더욱더 힘차게 울렸다.

“그렇기에 나 라이넨 폰 루미니르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라소니 왕국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이것은 선전포고요, 그대들은 우리와의 전쟁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한 후 모습을 감추었다. 그 어떤 질문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제국 전역이 라소니 왕국 및 아레마이에 대한 반감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감히 제국의 차기 하늘인 황태자를 납치해서 이용하려 하다니! 이것은 제국민으로서 가장 큰 모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들을 쳐부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본때를 보여 주고 우리 제국의 위상을 드높여야 합니다!”

백성들이 나서서 자신들이 먼저 전쟁에 참여하고 싶다고 소리를 높였다. 허구한 날 성문 앞으로 가서 자기들도 데려가 달라고 아우성을 쳐서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라이넨은 저들의 저런 격렬한 반응에 웃음 지었다.

“명분이 우리에게 있는 데다가 참여 희망자도 이렇게 많으니 승리는 금방이겠군.”

“너무 방심하지는 말라고, 라이넨.”

“알고 있어.”

그러나 그녀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저들과 함께 전장에 나가서 싸운다면 아레마이를 없애 버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으니까.

‘이 희망이 절대 부서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수많은 세월 동안 자신을 괴롭히고, 불행에 빠뜨렸던 란시엔과 아레마이가 사라진다면 그녀는 행복감에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라이넨의 시선을 느끼자 차게 식었다.

“…….”

그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침묵에 어색함을 느꼈다. 그는 줄곧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카니벨라.”

“왜?”

“넌 이 모든 일이 끝나면 어떻게 하고 싶어?”

“글쎄…….”

그녀는 라이넨에게 대놓고 ‘난 널 떠날 수밖에 없어. 미안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머뭇거렸다.

“크, 큰일 났습니다!”

그때, 그의 시종 중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지금…….”

그 말에 라이넨은 벌떡 일어나 황제가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   *   *

아레마이는 비상이었다. 아침에 나오니 란시엔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그들은 그녀가 단순히 산책을 가는 줄로만 알았다. 잠을 자지 못할 때 그녀는 업무를 계속해서 보거나 바람을 쐬곤 했으니까.

그러나 납치해 왔던 황태자까지 사라지자 그들은 그때서야 란시엔이 단순히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가장 먼저 슌카린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준 D급 조직원은 마치 악귀처럼 변한 그의 표정에 무서워 벌벌 떨었다.

‘젠장!’

에이니의 정체가 사라졌던 카니벨라 공주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 도통 풀리는 것이 없었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 그녀를 고문했지만 탈출해서 사라져 버렸고, 그와 동시에 란시엔과 라이넨 황태자의 행방까지 묘연해졌다.

“간부들을 불러! 긴급회의에 돌입한다.”

그리고 슌카린은 현재 임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는 모든 인원들을 풀어 란시엔의 행방을 찾을 것을 지시했다.

‘대장,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그가 초조하게 머리를 돌리고 있는 사이, 란시엔의 소식을 들은 다른 조직원들이 급하게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칸나는 손톱을 물어뜯었고, 수이카는 평소처럼 멍했다. 시카온은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서류와 지도를 펼치며 분주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슌카린?”

오랜만에 회의장에 나타난 다른 간부들은 표정을 잔뜩 찌푸렸다. 대장을 지켜야 할 것들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그는 화가 났다. 천생이 군인인 그는 대장의 옆에서 보필해야 하는 규율을 어긴 슌카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닥쳐, 나도 아직 잘 모르니까.”

“아이고, 네가 부대장인데 그걸 모르면 어떡하니?”

“…….”

키슌은 비아냥거렸고, 슌카린은 애써 화를 참았다. 그들의 싸움에 회의는 시작도 전에 삐걱거렸다.

“부, 부대장! 큰일 났습니다!”

그때, 한 부하가 슌카린에게 급하게 달려왔다.

“뭔가?”

대장이 사라진 것보다 더 큰일이 있을까? 슌카린은 짜증을 내며 부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부하가 가지고 온 소식은 정말이지 그의 뒷골을 사정없이 흔들어 댈 만큼 골치 아픈 일이었다.

“라이넨 황태자가 루미니르 제국의 이름으로 아레마이와 라소니 왕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뭐라고?”

회의장 안에 있는 모두가 놀라서 일어났다. 왜 황태자가 갑자기 그들에게 선전포고를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알고?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군가가 표정이 하얗게 질린 채 중얼거렸다. 슌카린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 황태자가 주춤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때, 그의 머릿속에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절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어…….”

그는 음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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