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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공을 세울 기회 (78/93)

77. 공을 세울 기회

루미니르 제국에도 아레마이 조직원들은 있었다. 비록 그 수가 적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귀족으로 변장하거나 그 주변 인물로 침투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소리였다.

그들은 귀족파에 소속되어 자신의 주변 인물들로 하여금 정보를 빼냈다. 혹은 지속적으로 황실에 대한 움직임을 수집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분석을 했다. 그러나 며칠 전에 라이넨이 터뜨린 폭탄으로 인해 그들은 한가로이 일을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황태자가 뭐라고 한 거야?”

“라소니 왕국에 선전포고?”

“우리가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하나?”

“지금 당장 본부로 복귀해야 하는 거 아냐?”

그들은 우왕좌왕했다. 라이넨이 선전포고를 할 것이라는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무엇보다 어떻게 저들이 자신들의 본거지와 대장의 정체를 알아차렸는지 알 수 없었다.

“공문을 보내.”

간부들은 모두 라소니 왕국으로 귀환한 상태였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긴급 상황에서까지는 아니었다. 루미니르 제국에 남아 모두를 지휘하게 된 한 조직원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선전포고를 했으니 지금 대책 회의에 들어갔을 것이다.’

“일단 대기해야 할까요?”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조직원의 앞에 또 다른 조직원이 나타났다. 그는 골똘히 생각을 한 후에 입을 열었다.

“대기한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황실에 귀는 열어 두도록 해. 요즘 황제가 뭘 그리 숨기는지 도통 나올 생각을 안 해.”

황제가 란시엔을 데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하면서 제국에 침투해 있는 조직원들을 경계하여 황궁을 임시 폐쇄했다. 입이 무겁고 최측근인 사용인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휴가를 받아 궁 밖으로 나갔다.

“황실은 침투하기 쉽지 않습니다. 황제가 지속적으로 사용인들을 교체하는 통에 조직원들이 계속 쫓겨났었습니다.”

“알고 있어. 그렇지만 주시하고는 있어. 수상해.”

조직원 생활을 오래 했던 자였기에 느껴지는 촉이 있었다. 황제가 단단히 두르고 있는 방패막을 뚫어야 했다. 그래야 그들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황실의 소식을 들을 수 없는 상태. 선전포고를 한 이후 라이넨이나 황제나 얼굴을 감추었다. 그저 조용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거리에 가서 소문들을 수집해 와.”

“네, 알겠습니다.”

거리에서 떠도는 소문들은 ‘진짜 정보’인 경우가 꽤 있다. 그리고 그 ‘진짜 정보’ 후보들을 종합하다 보면 그들이 찾는 진짜가 나오겠지.

‘대장,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란시엔은 일이 빨리빨리 처리되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가 그렇게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몇 년 사이에 2개의 왕국을 집어삼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며칠째 소식이 없었다.

“대장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갑자기 몰려오는 불길한 예감에 남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아까 임무를 위해 밖으로 나갔던 조직원이 다시 헐레벌떡 들어왔다.

“부대장의 공문입니다.”

느껴지는 다급한 기세에 남자는 재빨리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이윽고 얼굴이 일그러진 남자는 재빨리 소리쳤다.

“지금 당장 긴급회의 소집해!”

지금은 비상사태였다.

남자의 명대로 긴급 소집은 재빨리 이루어졌다. 침투한 자들 중에서도 A급 조직원들만 참여한 이번 회의에 대략 15명의 조직원들이 모였다. 그들은 남자가 오기 전, 자기들끼리 웅성거렸다.

“부대장께서 우리한테 오랜만에 임무를 주셨군.”

“잊어버리지 않았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네.”

여러 일들이 한꺼번에 터지는 바람에 슌카린은 그들에게 다음 명령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정보 수집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것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서서히 생겨나고 있었다.

아레마이의 조직원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대장에게 버림받는 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았기에 지금의 상태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관리하는 자는 슌카린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뒷골목 출신이라는 태생적 문제와 특유의 모난 성격 때문에 평판이 딱히 좋지는 않았다. 그저 란시엔이 임명해 준 부대장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뿐이었다.

“이제야 일을 할 마음이 생겼나 보군.”

“허허, 어이가 없어.”

“흥, 대장만 아니었어도…….”

간부들이 저지른 희대의 정보 유출과 탈출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카니벨라의 정체가 밝혀졌을 당시, 란시엔이 대놓고 슌카린을 질책했었기에 그는 신임이 이미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 그의 명을 따르는 이유는 란시엔이 아직 그를 부대장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에게 불만을 가진 그들은 회의장에 있으면서도 투덜거렸다.

“모두들 왔는가?”

남자는 헐레벌떡 뛰어왔다. A급 조직원 모두는 남자를 보자 벌떡 일어났다. 남자는 이곳의 유일한 A+급 조직원으로 차기 간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다들 바쁜데 미안하군.”

“아닙니다.”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회의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와야죠.”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일단 이걸 읽어 보게.”

남자는 그들에게 내려온 공문을 돌렸다. 그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동공이 커졌다. 그리고 종이가 처참하게 구겨졌다. 누군가가 거세게 소리 질렀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이 사실입니까?”

“이 망할 것들,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 거냔 말이다!”

[대장이 사라졌음. 추정컨대 루미니르 제국 측에서 벌인 공작으로 예상됨. 그쪽에서 움직여 주기 바람.]

대장이 사라졌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들은 강하게 분노했다. 대체 대장 곁에서 보좌해야 할 것들은 그 시간에 무엇을 했단 말인가? 단체로 자리를 다 비운 것인가?

“대장이 있는 곳이 이곳으로 추정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납치되었던 라이넨 황태자도 지금 이곳에 있지 않은가.”

“…….”

모두들 침묵에 잠겼다. 그때 누군가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망할 루미니르 제국 놈들…….”

“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입니다.”

“이제 이판사판이다.”

남자는 공문에 적혀 있는 마지막 문구를 보며 중얼거렸다.

*   *   *

“크, 큰일 났습니다!”

라이넨은 갑작스러운 시종의 외침에 그를 쳐다보았다. 시종은 그에게 재빨리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지금 카니벨라 님을 당장 내쫓아야 한다는 귀족들의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는 그 말에 곧장 회의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말이라도 카니벨라의 귀에는 다 들렸다.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저 귀족들이 어떻게 알았지?’

애초에 그녀가 루미니르 제국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을 저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녀는 아레마이에 있을 때부터 화상 분장을 하고 다녔었고, 수도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게다가 레이의 분신(焚身)으로 인해 그녀는 죽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저들이 저렇게 난리를 친다?

‘귀족들 중에 아레마이가 변장한 자들이나 결탁한 자들이 있다.’

그녀는 골치가 아팠다. 아직 전쟁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 내부에서 칼이 들어온다?

“가 봐야겠어.”

분명히 라이넨은 못 오게 막을 것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우에 대해 결정되고 있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신변에 대한 문제는 그녀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날 쫓아내려 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구차하게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녀는 저들에게 절대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아레마이의 말도 안 되는 사상에 억지로 함께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더 싫었던 것은 그 조직의 꼭대기가 그녀가 증오해 마지않는 란시엔이었다는 것.

란시엔은 이미 그들의 손에 있다. 그렇지만 란시엔이 뿌려 놓은 악의 씨앗은 대륙 전체에 검은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이것을 다 뽑아내기 전까지 그녀와 란시엔의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문을 열었다. 라이넨의 전속 시종이 그녀를 말렸다.

“저, 전하께서 카니벨라 님이 오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라이넨이 어떤 의도로 그녀를 못 가게 했을지는 안다. 갔을 때 들을 아픈 말들과 혹시나 모를 위험에 걱정되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비켜.”

“안 됩니다.”

“억지로라도 뚫고 가겠어.”

그녀는 시종을 뚫으려 했지만 시종은 악착같이 버텼다. 그녀는 점점 짜증이 차올랐다. 그때, 라이부스가 보였다.

“뭐 해, 공주?”

“라이넨에게 가려 하는데 이 시종이 막아 떼어 내려 했습니다.”

라이부스는 시종을 보며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시종은 아무리 그래도 황족의 명까지 거부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비켜섰다.

“공주는 나랑 갈 거야. 나도 그 회의장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네.”

시종은 비켜섰다. 그녀는 라이부스와 함께 황제와 라이넨이 있는 회의장으로 향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회의장으로 간다고 하시는 겁니까.”

“아, 나도 전쟁터 나간다고.”

“예?”

“난 형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가는 거야.”

“…….”

그녀는 계속되는 습격에 피로감을 호소하던 그가 생각났다. 그러나 전쟁터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지독하다. 죽어 나가는 사람들과 인간성을 잃어버린 채 날뛰는 인간의 탈을 쓰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괜찮아.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뭐.”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게 대화하면서 오니 회의장은 금방이었다. 그때, 한 귀족의 고함 소리가 문을 뚫었다.

“어째서 아레마이 출신의 그 여자를 보호하려 드시는 겁니까?”

“말했지 않은가, 그 여자는 자신의 행위를 회개하고 우리에게 아레마이의 모든 정보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그 과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 여자가 저지른 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쫓아내야 합니다!”

“그 여자는 아직도 전하를 흔들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사사로운 것 때문에 이 제국을 포기하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전하께 충언을 드리는 것입니다. 죄인을 이 제국에 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내 백성이 되고자 하는 자를 내쫓아야 한다는 것인가?”

“전하!”

문밖으로 들리는 목소리는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저기에 얼마나 많은 아레마이 관련자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나를 외쳐 주니 참 반가운걸?

“그럼 내 스스로 이 제국에 진정으로 충성한다는 증거를 가지고 오지.”

그녀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귀족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라이넨과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고 오겠어. 그렇다면 자네들은 내 충성을 의심하지 않겠지?”

본래는 뒤에서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녀는 암살자고 뒤에서 펼쳐지는 각종 음해에서 라이넨을 구하기 위해, 아레마이를 부수기 위해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었다.

이제부터 뒤가 아닌 앞에서 전쟁을 주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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