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작전 회의 (79/93)

78. 작전 회의

갑작스러운 카니벨라의 선언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전쟁이라니. 저 여자가 지금 우리의 편에서 전쟁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 전쟁에 참전하겠다는 뜻인가.”

“그래.”

단연컨대 지금 그녀보다 전쟁을 많이 해 보고 사람을 많이 죽여 본 존재는 별로 없을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아레마이 단원들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그러나 앉아 있는 귀족들에게 그녀의 말은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자의 어리석은 만용에 불과했다. 그들은 코웃음을 치거나 분노했다.

“지금 자네는 우리가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라이문타 후작은 그녀의 선언에 화가 났다. 제국을 위협하는 적들을 무찌르는, 제국의 명운이 달린 전쟁을 장난처럼 여기고 있는 그녀가 미치도록 싫었다. 라이넨과 부부의 연을 맺었을 때부터 후작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귀족들의 모습에 코웃음 쳤다. 지금 누가 장난을 친단 말이야.

“내가 장난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유감이군.”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걸어 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옆으로 사라졌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로 간 거지?

“너희들 모두가 내 움직임을 놓칠 정도로 약한데 무슨 수로 내 참전을 막겠다는 거지?”

그녀는 어느새 라이문타 후작의 목을 뒤에서 단검으로 겨누고 있었다. 라이넨은 순식간에 자신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앗아 간 그녀의 솜씨에 경악했다. 마치 알스카를 구출하기 위한 여정 때 힘을 아꼈나 의심하게 될 정도로 압도적인 속도였다.

“…….”

회의장은 순식간에 침묵에 잠겨 들었다.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소름이 끼치는 침묵이었다. 그리고 들리는 것은 그녀의 목소리밖에 없었다. 그녀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그들의 귀를 긁어댔다.

“너희들이 나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저 내가 전쟁을 장난처럼 여긴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전에 라이넨과 부부였다가 도망친 일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군.”

“…….”

“나는 전쟁에 참여한다. 나만큼 그 조직과 원한이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만큼 그들의 실체를 알고 있는 자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라이부스의 곁으로 돌아왔다. 검에는 살짝 피가 맺혀 있었다. 라이문타 후작은 자신의 목에서 살짝 흘러내리는 피에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선언했다.

“그러니 너희는 반대할 자격이 없다.”

“허락하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전하듯 바라보던 황제가 조용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감사하다는 의미로 무릎을 꿇었다.

“내가 허락하지. 혹시 반대하는 사람 있나?”

“…….”

있을 리가 없었다. 저런 압도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제국을 도와주겠다는데 반대할 사람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침묵으로 황제의 말에 긍정했다. 그들의 누그러진 기세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회의를 파하지.”

황제의 말에 그녀는 자신의 시선을 피해 회의장에서 나가는 귀족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의 눈에 잡히는 수신호가 있었다.

-여자가 전쟁에 참여한다. 기회가 있을 때 죽여라.

-대장을 찾아라.

‘어디 있나, 아레마이!’

그러나 회의장에 있던 귀족들이 워낙 많았기에 그녀는 얼굴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들이 제국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어떤 귀족인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진즉에 사용인의 수를 줄이고 란시엔을 깊숙한 곳에 숨겨 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정보를 유출 당할 뻔했다.

‘말해야 할 것이 하나 늘었군.’

그녀는 회의장을 빠져나오는 척하면서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궁을 지키던 기사들은 그녀의 익숙한 얼굴에 비켜섰다. 황제는 어김없이 집무실에서 서류와 씨름하고 있었다.

“왔는가?”

“네.”

그녀는 구석에 있는 소파에 앉아 시녀가 차려 놓은 다과를 음미하며 기다렸다. 그때, 라이넨과 라이부스, 카일라, 카샨이 들어왔다. 모두가 오자 황제는 서류 결재를 멈추고 그들이 있는 상석에 가서 앉았다.

“찾았는가?”

“확실히 있다는 건 찾았지만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다시 생각해도 아쉬웠다. 그들의 얼굴을 봤더라면 훨씬 더 일이 쉬웠을 텐데.

“그래도 방비를 잘해 둬서 다행입니다. 저들이 란시엔의 소재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

“미리 숨겨 놔서 다행이군.”

“예.”

란시엔은 황제의 궁 지하에 있는 지하 감옥에 있었다. 아레마이가 궁을 들쑤실 것으로 예상해 미리 숨겨 놓았다. 잠깐 깨어났던 란시엔은 곧 황제의 마력이 함유된 다량의 수면제를 들이켠 뒤 잠들었다.

“그에 대한 대비를 하셔야 할 것입니다. ‘대장’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입니다.”

대장의 명이라면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루어내는 조직이 아레마이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대장 없이 잘 굴러갈 수 있을까? 지금쯤 슌카린은 엄청 머리를 굴려 란시엔의 소재를 파악하고,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만큼 아레마이에게 란시엔은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절대 뺏길 수 없었다.

“그 여자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죠.”

라이부스는 화제를 돌렸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선전포고를 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이제 전쟁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카샨이 보고서를 보며 말했다.

“징집은 이미 끝났습니다. 지휘관들도 모두 선별해 놓았고요.”

아레마이가 제국을 모욕했기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자원해서 이번 전쟁에 참여했다. 백성들은 반드시 저 근본 없는 나라와 조직을 부숴 버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쟁 전 훈련에 매진했다.

“황족들 중에서 출전할 자는 황태자 전하입니다.”

“잠깐, 나는?”

카샨의 말에 라이부스는 반발했다. 그 또한 전쟁에 참전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카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궁을 지킬 황자가 없어집니다.”

그 말에 라이부스는 혹시나 라이넨이 죽으면 네가 대신 황태자가 되어야 한다는 걸 확실히 알아들었다. 그는 쓰게 웃었다. 형님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이번에도 그저 대타 노릇이나 해야 한다니.

“황자 전하께서는 황궁에서 할 일이 있으십니다.”

그 말에 라이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굳이 전쟁터에 나가지 않아도 활약할 수 있는 일은 있다. 그리고 쇠약한 황제를 돌보기에는 딱이었다. 그는 라이넨과 달리 꽤 살가운 아들이었으니까.

“그럼 난 아바마마와 함께 황궁을 지켜야겠어.”

“부탁하지.”

“……네, 형님.”

그는 라이넨의 가벼운 말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라이넨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쯤 되니 라이부스가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그럼 전쟁에 참여하는 자들은?”

“황족 중에서는 황태자 전하이고, 여기 있는 카니벨라 공주도 참전합니다.”

카샨의 말에 카일라가 말을 보탰다.

“귀족들 중에서는 저희 아버지를 비롯해 대부분의 귀족들이 참여해요. 일단 황태자파는 몇 명을 제외하면 다 나갑니다.”

“귀족파는?”

“일단 제국의 존속이 걸린 문제이니 대부분 참전한다고 했습니다.”

“다 합치면 규모는?”

“대략 100만입니다.”

카샨은 서류를 보며 대답했다. 전력은 절대 모자라지 않았다. 라소니 왕국은 소국인 만큼 군사의 규모가 절대 제국보다 크지 못했다. 아마 라소니 왕국 정도는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아레마이였다.

“아레마이의 정확한 규모는 모르는가?”

“대략 20만~30만 정도의 규모입니다. 온 대륙에 퍼져 있고 대부분 라소니 왕국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란시엔이 수장이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아레마이 단원들 일부는 이번 라소니 왕국과의 전쟁에 라소니 왕국 군사 측으로 참전하겠지만 귀족이나 타국에 있는 단원들은 참전하지 않을 게 뻔했다. 결국 최종 목적은 그들인데 잘못해서 대륙 전쟁으로라도 번지면 골치가 아파진다.

그러나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일단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저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모여들겠지요.”

카샨과 라이부스가 차례로 말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우선이다.

“이틀 후 출정식을 한다. 그때, 다시 한번 아레마이에게 선포하면 되겠군.”

그들이 악이라는 것에 다시 한번 쐐기를 박는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명분을 다시 한번 선포한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루미니르 제국과 라소니 왕국의 전쟁에 절대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돌아오겠습니다.”

“아레마이를 반드시 섬멸하겠습니다.”

라이넨과 카니벨라는 황제에게 선언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회의를 파하지.”

‘진짜’ 회의가 끝이 났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카니벨라 역시 라이지에게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겨우 한 달 남짓 보지 못했는데 벌써 아이가 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카니벨라 공주.”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현 라이넨의 약혼녀 카일라였다. 라이넨은 카일라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카니벨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와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하시죠.”

그녀는 순순히 카일라를 따라 궁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카일라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궁금했다.

“당신은 이번 일이 끝나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그녀의 얼굴이 팍 식었다. 설마 내가 나중에 라이넨과 사랑하는 사이라고 약혼 관계에 훼방이라도 놓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는 갑자기 카일라가 시시해졌다.

“라이지와 마리, 루카스를 데리고 떠날 겁니다.”

“그렇군요…….”

“혹시나 하는 말인데 제가 당신과 라이넨의 사이를 방해할 것이라고 오해하지는 말아 주세요. 그럴 생각은 없으니까.”

카일라는 그녀의 그런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해명했다. 절대 그런 의도에서 한 말은 아니라고.

“그렇다면?”

“전 아마 이번 전쟁이 끝나면 라이문타 가문의 주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애초에 카일라가 라이넨의 약혼녀 자리를 받아들인 것은 차기 라이문타 후작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카니벨라와 라이넨 둘의 사이를 갈라놓는 주범이 되고 싶은 생각은 단연컨대 절대 없었다.

“전하와 전 거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번 전쟁을 끝으로 깨지겠죠.”

“그렇다는 말은……?”

“이변이 없다면 황태자 전하의 옆자리는 다시 비워질 것입니다.”

그 말에 그녀는 표정을 굳혔다.

“그 말은 저보고 다시 황태자비의 자리에 오르라는 말씀이십니까?”

카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카일라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자신의 무엇을 보고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공주만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

카일라는 그녀의 두뇌 회전력, 결단, 무력, 라이넨을 향한 사랑을 보며 그녀가 아니고서는 절대 황태자비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반발하는 사람이야 많겠지만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다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사라지리라.

“…….”

카일라는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악수를 했다. 카일라는 그런 그녀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차기 황후이시여.”


0